1화 : 멈춰버린 시계
부산, 1997년 5월의 어느 날.
교실 창밖으로 늦봄의 따스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오후 3시 42분. 늘 그렇듯 시계의 초침은 그 시간에 멈춰 있었다. 이 오래된 시계는 아버지가 군 생활을 마치고 제대할 때 받은 것으로, 내게는 가보나 다름없었다.
"김진우!"
수학 선생님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선생님은 내가 또 딴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칠판에 나와서 이 문제 풀어봐."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라면 이런 상황에서 당황했겠지만, 오늘따라 그런 감정조차 들지 않았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나는 주목받는 것을 싫어했지만, 지금은 그저 무감각했다. 칠판 앞으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머릿속은 여전히 5년 전 그날의 기억으로 가득했다.
그날도 지금처럼 화창한 날이었다. 부모님과 함께 해안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운전석에서 90년대 초반 히트곡을 흥얼거리고 계셨고, 어머니는 조수석에서 지도를 펼쳐 들고 계셨다. 그때만 해도 내비게이션 같은 건 흔하지 않았으니까.
차 안에서 나는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진 속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강렬한 빛이 도로를 뒤덮었다. 그 빛은 마치 시간을 멈추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차는 멈춰 섰고, 주변은 고요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부모님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계셨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내 시계는 매일 같은 시간에 멈추기 시작했다. 오후 3시 42분에.
"진우야, 괜찮아?"
옆자리 친구 민수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민수는 내 유일한 친구라고 할 수 있었다. 항상 밝고 활발한 성격으로 내 반대편에 있는 아이였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함께해 온 단짝이었다.
"응, 괜찮아." 나는 애써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 마음속은 여전히 그날의 의문으로 가득했다. 그 빛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왜 내 시계는 계속 그 시간에 멈추는 걸까?
수업이 끝나고 민수가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최신 게임잡지가 들려 있었다.
"야, 오늘 PC방 갈래? '디아블로'가 대세래. 전국 PC방이 미쳐 돌아간다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평소라면 흔쾌히 따라갔겠지만, 오늘은 다른 계획이 있었다.
"미안, 오늘은 집에 일찍 가봐야 해. 아버지 약을 받아와야 하거든."
민수는 실망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5년 전 그 사고 이후로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알았어. 다음엔 꼭 같이 가자. 그때까지 내가 네크로맨서 마스터가 되어 있을 테니까!"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수는 항상 나를 웃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 나는 우연히 한 시계방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시간의 톱니바퀴'라는 간판이 달린 이 가게는 처음 보는 곳이었다. 이 동네에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가게였다. 호기심에 이끌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가게 안은 온갖 종류의 시계들로 가득했다. 벽시계, 탁상시계, 회중시계, 그리고 손목시계까지. 모든 시계들이 똑딱거리며 시간을 알리고 있었다. 공간을 가득 채운 시계 소리는 마치 작은 심장들이 함께 뛰는 것 같았다.
"어서 오세요."
가게 안쪽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중년의 남성이 작업대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는 회색 머리에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고, 안경 너머로 따뜻하면서도 통찰력 있는 눈빛이 느껴졌다.
"시계가 고장 났나요?"
나는 조심스럽게 내 시계를 내밀었다.
"네, 이 시계가 매일 같은 시간에 멈춰요. 오후 3시 42분에요."
시계방 주인은 안경을 올리며 시계를 자세히 살폈다. 그의 손길은 수십 년간 시계를 다뤄온 장인의 그것이었다.
"흥미롭군요. 이런 경우는 처음 보는데..."
그는 시계를 작업대 위에 올려놓고 정밀한 도구로 뒷면을 열었다. 잠시 살펴본 후, 그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 시계는 단순한 고장이 아닌 것 같군요. 내부 구조가... 특별해요."
나는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물었다.
"특별하다니요?"
"이런 시계를 '시간의 조각'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어요. 특정 시간에 멈추는 이유가 있죠. 그 시간이 당신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나요?"
나는 놀랐다. 이 사람은 어떻게 그런 것을 알고 있는 걸까?
"5년 전... 그 시간에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시계방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이 시계는 당신의 시간과 깊이 연결되어 있어요."
나는 경계하면서도 호기심을 느꼈다. 평소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것을 꺼리는 내가 이 노인에게 이렇게 마음을 열고 있다는 것이 스스로도 놀라웠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시계방 주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시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신비로운 존재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잊고 싶은 순간에 멈춰 서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가 다시 찾아야 할 순간을 가리키기도 하죠."
그 순간 내 손목시계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놀라서 시계를 바라보았다. 초침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고, 시계 유리창 너머로 은은한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뭐지...?"
그 빛은 마치 다른 세계로 연결되는 문처럼 보였다. 5년 전 해안도로에서 본 그 빛과 같았다.
"당신의 시계가 반응하고 있군요."
시계방 주인이 말했다.
"시간이 당신을 부르고 있어요."
"반응한다고요? 대체 이게 무슨..."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주변의 모든 것이 빛 속으로 녹아들어 가는 것 같았다.
나는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