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기억의 조각
눈을 떴을 때, 나는 전혀 다른 장소에 서 있었다.
주변에는 낯익으면서도 낯선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오래된 미끄럼틀과 녹슨 철봉, 그리고 삐걱거리는 그네. 이곳은 내가 어린 시절 자주 놀던 놀이터였다. 하지만 모든 것이 새것처럼 보였고, 주변의 건물들도 지금과는 달랐다.
"설마...?"
내 목소리는 허공에 흩어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놀이터에는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보이지 않는 듯 그냥 지나쳐 갔다. 한 아이는 내 몸을 통과해 달려갔다. 마치 내가 유령이라도 된 것처럼.
시계방 주인의 말이 떠올랐다.
"시간의 톱니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했나 보네요."
그가 말했던 것처럼, 내 시계의 톱니바퀴가 나를 다른 시간으로 데려온 것일까?
놀이터 한쪽 벤치에 앉아 있는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파란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머리에는 하얀 리본이 달린 머리띠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어딘가 익숙했다. 사진 속에서 본 그 소녀와 닮아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공책 한 권이 들려 있었고, 공책 표지에는 "시간의 조각들"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시간의 조각들...?"
시계방 주인이 말했던 '시간의 조각'과 같은 의미일까? 이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닌 것 같았다.
그 순간,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지수야..."
나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보지 못하는 듯했다. 그녀의 눈빛은 내가 서 있는 곳을 통과해 멀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수는 공책을 펼쳐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 옆에 앉아 그녀가 쓰는 내용을 들여다보았다.
"오늘도 너를 기다렸어. 하지만 넌 오지 않았어. 우리 약속 기억하지? 항상 3시 42분에 만나기로 했잖아. 오늘은 엄마가 또 병원에 갔어. 아빠는 계속 전화만 받고 있어. 뭔가 심각한 일이 생긴 것 같아. 하지만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아."
내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3시 42분. 내 시계가 매일 멈추는 그 시간. 시계방 주인이 말했던 '특별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지수. 어린 시절 친구였던 그녀. 왜 나는 그녀를 잊고 있었을까?
지수의 글씨체는 깔끔했고, 생각보다 어른스러웠다. 그녀는 항상 그랬다. 또래보다 조숙했고, 책을 많이 읽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도 그녀는 놀이터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 무슨 책을 읽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어린 왕자'라고 대답했다. 그때 우리는 열 살이었다.
그때, 놀이터 입구에서 누군가가 지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지수야! 이제 가자!"
목소리의 주인공은 지수의 아버지였다. 그는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젊어 보였지만, 얼굴에는 깊은 피로감이 서려 있었다. 그의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 있었는데, 그 시절에는 아직 휴대전화가 흔하지 않았다. 지수의 아버지는 IT 회사에서 일하는 엔지니어였고, 항상 최신 기기를 가지고 있었다.
지수는 공책을 덮고 일어섰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놀이터를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도 기다릴게, 진우야."
그녀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손을 뻗었지만, 내 손은 그녀를 통과해 버렸다. 그녀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내 손목시계가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시계 유리창 너머로 은은한 빛이 스며들었고, 내 시야가 다시 흐려지기 시작했다. 시계 안의 톱니바퀴가 빠르게 회전하는 것이 보였다. 시간의 톱니바퀴가 나를 다시 현재로 데려가려는 것 같았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다시 '시간의 톱니바퀴' 시계방에 서 있었다. 시계방 주인은 여전히 작업대 앞에 앉아 있었고, 내 시계를 살펴보고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돌아왔군요."
시계방 주인이 말했다. 그는 전혀 놀라지 않은 표정이었다.
"방금... 제가 어디 갔었나요?"
나는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의 시간 속으로 갔었겠지요. 시간의 톱니바퀴는 당신을 당신에게 중요한 순간으로 데려갑니다."
나는 방금 경험한 일이 꿈인지 현실인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내 손에는 작은 종이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 그것은 지수의 공책에서 나온 페이지였다. 페이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항상 3시 42분에 만나자."
이것은 꿈이 아니었다. 나는 정말로 과거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지수를 만났다. 시계방 주인이 말했던 것처럼, 시간의 톱니바퀴가 나를 다른 시간으로 데려간 것이다.
"이게... 정말 시간 여행인가요?"
시계방 주인은 미소 지었다. "시간 여행이라기보다는... 시간의 창문을 통해 들여다본 것에 가깝습니다. 당신은 그 시간에 존재했지만, 그들에게 보이지 않았죠."
"그럼... 제가 과거를 바꿀 수는 없는 건가요?"
"그건... 복잡한 문제입니다. 시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유연하지만, 동시에 단단하기도 합니다. 어떤 일들은 바뀔 수 있고, 어떤 일들은 바뀌지 않습니다."
나는 종이를 바라보았다.
"지수... 그녀는 제 어린 시절 친구였어요. 하지만 왜 저는 그녀를 잊고 있었을까요?"
"때로는 우리가 가장 소중한 것을 잊기도 합니다. 특히 그것이 고통스러운 기억과 연결되어 있을 때는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계를 고칠 수 있나요?"
시계방 주인은 고개를 저었다.
"고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의 시계는 고장 난 게 아니에요. 그것은 당신에게 무언가를 알려주려고 하는 거죠."
"무엇을요?"
"그건 당신이 직접 찾아야 할 답입니다."
시계방을 나오면서, 나는 종이를 주머니에 넣었다. 집으로 향하는 길, 나는 지수에 대한 기억을 더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어떻게 만났고, 왜 헤어졌을까?
집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이미 저녁이었다. 창밖으로는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서랍을 열어 오래된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에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이 있었다. 사진첩, 작은 장난감들, 그리고... 조개껍데기 하나.
사진첩을 열자 첫 페이지에는 내가 지수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다. 우리는 해변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사진 뒷면에는 "진우와 지수, 1989년 여름"이라고 적혀 있었다.
"어떻게 이걸 잊고 있었지?"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지수는 내 어린 시절 가장 친한 친구였다. 우리는 항상 함께 놀았고, 비밀을 공유했다. 그리고 우리는 약속했다. 항상 3시 42분에 놀이터에서 만나기로.
그 시간은 지수의 어머니가 병원 치료를 마치고 돌아오는 시간이었다. 지수는 그 시간에 혼자 있기 싫어했고, 나는 그녀와 함께 있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녀를 잊기 시작했다. 왜일까?
그때, 방문이 열리며 누나 진희가 들어왔다. 대학교 2학년인 누나는 항상 바쁘게 지냈지만, 부모님이 일하러 나간 후에는 집에서 나를 돌봐주곤 했다.
"진우야, 뭐 해?"
누나는 평소처럼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녀의 눈에는 항상 약간의 걱정이 담겨 있었다. 아버지의 건강이 좋지 않은 이후로, 누나는 가족을 위해 많은 책임을 떠안고 있었다.
나는 사진첩을 들고 물었다.
"누나, 혹시 지수 기억나?"
진희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 네가 어릴 때 항상 같이 놀던 그 애 말하는 거야?"
"응. 걔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진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갑자기 왜 물어? 그 애는... 갑자기 이사 갔잖아. 그날 밤에 이상한 일이 있었다고 어른들이 수군거렸어."
"이상한 일?"
"응. 밤하늘에 강한 빛이 보였다고. 그리고 다음 날, 지수네 가족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아무도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몰랐어."
내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 빛. 내가 해안도로에서 본 그 빛과 같은 것일까? 시계방 주인이 말했던 '시간의 조각'과 관련이 있을까?
"누나, 그게 언제였지?"
"음... 5년 전쯤이었을 거야. 네가 열두 살 때였으니까. 그때 우리 가족도 그 해안도로에서 사고가 났잖아. 아빠가 그때부터 아프기 시작했고..."
정확히 내 시계가 멈추기 시작한 때였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의 톱니바퀴, 시간의 조각, 그리고 그 빛.
"그런데 갑자기 왜 지수 얘기를 꺼내?"
나는 잠시 망설였다. 누나에게 시간 여행을 했다고 말하면 믿어줄까? 하지만 그건 너무 비현실적인 이야기였다.
"그냥... 문득 생각나서."
누나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누나가 나가고 나서, 나는 결심했다. 지수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빛의 정체를 알아내야 한다. 시간의 톱니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나는 그것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알고 싶었다.
시계를 바라보니 시간은 오후 3시 40분이었다. 곧 3시 42분이 될 것이다. 나는 시계를 꼭 쥐고 기다렸다. 시계방 주인의 말처럼, 시간의 톱니바퀴가 나를 다시 다른 시간으로 데려갈 수 있을까?
2분 후, 시계가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시계 안의 톱니바퀴가 빛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어디로 갈까? 나는 눈을 감고 지수를 생각했다.
"지수야, 널 찾을게."
서울, 2023년.
지수는 병원 상담실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오래된 시계가 쥐어져 있었다. 시계는 항상 같은 시간에 멈췄다. 오후 3시 42분에. 시계 안의 작은 톱니바퀴가 가끔씩 빛을 발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걸었고, 거리에는 자율주행 자동차가 다니고 있었다.
지수는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성공한 건축가로 일하고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었다.
"최근에 기억나는 것이 있나요?" 주치의가 물었다.
지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눈빛에는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
"특별한 건 없어요... 그런데 요즘 이상하게도 특정 시간이 떠올라요. 3시 42분이요. 그리고 가끔 꿈에서 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요. 그 아이는 계속 내 이름을 부르고 있어요."
"그 아이의 이름을 기억하시나요?"
지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진우... 그 아이의 이름은 진우였어요."
그 순간, 그녀의 시계가 떨리기 시작했다. 시계 유리창 너머로 은은한 빛이 스며들었다. 시계 안의 톱니바퀴가 빛나기 시작했다.
시간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