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제목을 지으려고 하니 모든 책의 제목에 '승무원'이나 '비행'을 갖다 대본다. 지금 글을 쓰는 책상 옆 책장에는 김연수의 『소설가의 일』 책이 꽂혀있는데, 『승무원의 일』이라고 바꿔보는 것이다. 김혼비의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는 『우아하고 호쾌한 비행』,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은 『승무원의 새벽』으로, 송수진의 『을의 철학』은 『승무원의 철학』, 이석원의 『우리가 보낸 가장 긴 밤』은 『우리가 보낸 가장 긴 비행』과 같은 식이 된다. 이러고 있다 보면 다들 제목을 어쩜 그렇게 찰떡같이 잘 지었나 대단하게 느껴지면서 그럴 자신이 없는 나는 그냥 모른 척 가져다 쓰고 싶은 것이다.
친구를 만나 자문을 구하니 책을 안 읽는 친구는 노래 제목에 비행을 갖다 붙였다. 아이유의 『나만 몰랐던 이야기』가 『너만 몰랐던 비행 이야기』로, 심수봉의 『사랑밖엔 난 몰라』가 『비행밖엔 난 몰라』가 되었다. 뭔가 이것도 그럴듯해서 책뿐만 아니라 영화나 노래 제목도 살펴봐야겠다는 팁을 얻었다. 하여간 요즘 나는 책 제목 짓기에 꽂혔다. 브런치북 응모 기간이 11월 1일까지니 아직 시간은 꽤 남았다.
토요일 오후, 콧바람도 쐬고 책 제목의 힌트도 얻을 겸 아부지랑 사운즈한남으로 향했다. 독립서점 스틸북스를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스타그램에서 #책스타그램 해시태그로 핫한 곳이었다. 큐레이션 한 다양한 분야의 책과 브랜드 소품이 놓여있어 넋 놓고 구경하기에 좋았다.
나는 그곳에서도 버릇처럼 눈에 띄는 제목을 가져다가 내 식으로 바꿔보고 있었다. '음. 『고기로 태어나서』라, 이거 예전에 재밌게 읽었는데... 『승무원으로 태어나서』? 아니야, 식상해.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 팟캐스트에서 추천한 책이었지. 사야겠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자동적으로 대입되는 단어.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승무원의 죽음』...? 어머, 뭐라는 거야.' 이런 식으로 혼자서 속 시끄럽게 책을 들척이는데 뒤에서 내 마음속의 목소리가 실제로 들렸다.
"나는 오늘 사표 대신 비행을 했다..." 나를 따라 근처에서 이리저리 책을 보던 아부지가 뱉은 말이었다(원래 책 제목은 『나는 오늘 사표 대신 총을 들었다』). 서점에 오기 전 커피를 마실 때 딸내미가 책 제목이 고민이라고, 아빠도 좀 생각해보라고 했더니 저러고 있었나 보다. 아부지는 멈추지 않고 계속 읊조렸다.
"보통이 아닌 비행(『보통이 아닌 날들』)... 나는아나항공승무원이다(『나는지방대시간강사다』)... 모든 승객에게 좋은 승무원일 필요는 없어(『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어』)... 나는 승무원이 되어서도 가끔 울었다(『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가끔 울었다』)... 살면서 쉬웠던 비행은 단 하루도 없었다(『살면서 쉬웠던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그 조용한 서점에서 적어도 내게는 잘 들릴 만큼 아부지 목소리가 또렷하게 깔렸고 나는 더 이상 웃음을 참지 못했다.
"풉, 아부지! 뭐 하는 거야~!"
아부지는 여전히 책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은빈이 책 제목 지어줘야지... 음, 저건 또 보자... 죽고 싶지만 비행은 하고 싶어(『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그러다 서로 책을 한 권씩 들어 보이면서 함께 제목을 바꾸기 시작했다. 아부지가 '승무원'이나 '비행'이란 단어를 넣어서 바꿔보는 책의 제목은 너무 웃겼다. 결국 끝까지 웃기기만 하지 가져다 쓸 건 없었단 말이기도 하다. 우리는 서점에서 털레털레 걸어 나왔다. 소득이 있는 것 같기도, 없는 것 같기도 한 기분이었다.
저녁 시간이 다 되어 어스름한 한남동 거리에 불빛이 하나 둘 켜졌다. 오늘도 제목을 정하진 못했지만, 중얼중얼 '승무원과 비행' 이 두 단어를 번갈아 말해보는, 언젠가 잊지 못할 아부지의 모습을 하나 더 득템한 하루였다.
그러니까 제목은 뭘로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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