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하게 기억되는 일본인 승무원

내가 일본항공사를 그만두고 유일하게 보고 싶은

by 우자까

1. 일본항공사 ANA(All Nippon Airways)를 6년이나 다녔다고 하면 다들 하는 말이 있다.

"일본어 되게 잘하겠다~!" ㅡ당연하다는 눈빛과 함께

"아뇨, 별로 못하는데요." ㅡ역시 당연하다는 눈빛을 보내며

이렇게 말하면 곧바로 상대는 의아한 눈빛을 띨 것을 알기에 "네, 뭐 그냥 쫌... 간단한 대화 정도는 가능해요...^^a" 슬쩍 웃으며 겸손을 가장한 팩트를 날린다.


나는 일본어를 (잘)못한다. 그런데 어떻게 일본항공사를 들어갔느냐고 묻는다면 서류 전형부터 시작해 최종까지 면접과 시험은 영어로 이루어졌다고 말하겠다. 그렇다고 또 영어를 잘하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썩 아니올시다. 이전 글에서도 썼지만 영어 면접 대비서를 통으로 외워서 답변을 짜깁기하는 식으로 여차여차 면접을 치러냈다. 그럼 어떻게 일본인 승무원들과 일하며 승객을 응대할 수 있었냐고?


일단 승객을 응대하는 건 생각보다 간단했다. "무슨 음식을 드시겠습니까", "무슨 음료를 드시겠습니까"와 같은 서비스에 필요한 문구 외에 필요 이상으로 긴 대화(씨리어스한 컴플레인)가 이어질 것 같으면 내가 잘 써먹는 말이 있었다.

"니혼진 죠무잉 욘데 마이리마스~!(일본인 승무원 불러오겠습니다~!)"

일본인처럼 생긴 데다가 일본어로 공손히 말하는데 일본인 승무원을 불러온다고? 승객은 그제서야 내 명찰을 슬쩍 내려다본다. 가타카나로 '우웅빙'이라고 표기된 명찰을 보면 '아, 난데. 캉코쿠진(아, 뭐야. 한국인).' 슬며시 뒤로 물러난다. 이 말은 꽤 요긴하게 쓰였는데, 특히 컴플레인 하는 승객을 다른 승무원에게 넘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주 써먹다 보면 간혹 한 번씩 "쿄오이쿠오(교육을) 도노요우니(어떻게)~! *&@*$&@!!!" 꾸지람이 떨어지는 승객을 만나기도 했지만 화가 난 데다 빨리 말하는 일본어는 더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소중한 나의 마음이 상처 받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애초에 일본어를 열심히 공부해서 처음부터 알아들었으면 없었을 일임을).


일본인 승무원과는 영어와 일본어를 섞어서 소통했다. 중장거리 비행의 경우 한국인 승무원은 단 한 명만 탑승했지만, 친절한 일본인 승무원들은 일어를 잘 못하는 외국인 승무원에게 최대한 영어로 말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내가 일본어에 유창하지 않듯이 그들도 영어가 유창하진 않았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프앤하프 의사소통법을 구사했다.


"우상, 마이 카트 이즈 후루데스~(My cart is full~)!"ㅡ기내식 수거로 카트가 가득 찼다는 소리

"와따시 이마 베리 비지데스요, 조또 모멘트네~(I am very busy right now, just a moment~)"

조금 긴 예시를 들자면.

"우상, 아노... 오캬쿠사마와 이마 베리 앵그리데스요(That passenger is very angry right now)... 다까라~ 위 해브투네? 왓치 케어풀리데스!(So we have to observe carefully)"


독자님들, 감이 잡히시는지.

비행 내내 이어지는 대화가 이런 식이니 서로의 외국어 실력이 뽀록나며 우린 부끄러움을 느꼈고 이내 눈치가 보이다가 다소 피곤해졌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도착지(미국이든 방콕이든)에서는 따로 놀았다. 나는 이미 전 비행으로 도착해 역시나 혼자서 놀고 있는 한국인 승무원과 만나 밥을 먹었다. 그렇게 비행을 이어나가길 몇 년... (나란 놈, 꾸준히 공부하지 않는 놈) 한 일본인 승무원이 내 앞에 나타나 압도적인 멘트로 인사를 건넸다.


"언니, 나 한국어 잘해요. 씨발~!"

이후 그와 내가 친구가 될 수 있었음은 두말할 필요 없겠다.


2. 그는 내게 파격적인 인사말을 날렸고 나는 조금 당황했지만 일본어와 영어만이 가득한 기내에서 한국어를 들으니 반가운 마음이 먼저 생겼다.

"어... 어?! 잘하시네요. 근데 시발은 어디서 배우셨어요?" 물었다.

"이화여대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인 친구 많아서 씨발도 배웠어요, 씨발." 그는 무척 밝은 미소를 지으며 씨발.

한국인 친구가 많아서 씨발인 경우가 있었던 건지 씨발이란 말까지 배운 게 씨발스러운 건지 다짜고짜 씨발을 남발하는 그가 나는 그냥... 너무 좋았다. 기내 바깥으로 웃음소리가 새어 나갈 만큼 크게 웃어젖히자 그는 내 반응에 만족했는지 더 호기로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오늘 사무장 완전 씨발년이예요, 씨발. 나 오사카 출신이라고 사투리 쓰는 걸로도 무시해. 진짜 짜증나, 쒸이발."

나는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웃으며 다시 물었다.

"혹시 씨발 말고 다른 욕도 할 줄 알아요?"

그는 씨익 웃으며 "그럼~ 개웃겨. 깜놀. 짭새. 재수 없어. 근데 친구들은 내가 씨발이라고 하는 걸 제일 좋아해요. 언니도 그런 것 같은데...?"

부정하지 않았다.


그와 나는 서비스하는 와중에도 간간이 한국어로 이야길 나눴다. 그가 구사하는 한국어가 너무 귀엽고 재밌어 자꾸 웃음이 터졌다. 분명 상스러운 욕이지만 오늘 처음 만나 함께 비행을 하는 어여쁜 승무원이면서도 외국인의 입에서 나오는 욕이기에 그랬으리라. 내가 큭큭 거릴수록 그는 더 자극적인 단어로 나를 웃겼다. 덕분에 나리타 공항에서 뉴욕 JFK공항까지 가는 12시간이 즐거웠다...? 즐거웠다니! 뉴욕은 좋지만 뉴욕까지 가는 비행이 너무 힘들어(이 노선은 특히 비즈니스 클래스 승객들이 잠을 잘 안 자고 요구가 많음) 몇 년을 왔다 갔다 하면서도 뉴욕 비행은 헬이라고 싫어했는데... 모국어를 쓰는 것은 활력을 불어넣고 외로움을 느끼게 하지 않는 일이었다.

폭소에 가까운 웃음만 흘러넘치는 대화는 우리를 친근하게 만들었다. 뉴욕에 도착한 다음 날 함께 맨하탄으로 놀러 나가자는 작전을 세웠다. 작전이라고 한 까닭은 그가 다른 일본인 승무원들을 따돌리고 나와 단둘이 놀러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선배들이 이미 그에게 야구 경기를 보러 가자고 했기에 그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와 함께 그들과 마주치지 않을 시간에 호텔에서 빠져나와 나를 만나기로 했다. 우린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을 보기로 했는데, 상반신을 탈의한 식스팩 인간 사자들이 널뛰는 라이온킹 뮤지컬보다 체류지에서 처음으로 일본인 승무원과 보낼 시간이 나를 설레게 했다.


3. 우리는 점심으로 쉑쉑 버거를(이때만 해도 한국에는 쉑쉑이 입점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 동부만 가면 쉑쉑을 먹는 게 필수 코스) 먹고 뮤지컬을 본 다음 치즈케익팩토리에 가서 디저트도 먹으며 사진을 찍었다. 그러면서 대화도 많이 나누었는데, 그중에서도 그가 씨발을 남발하며 한국어로 말하는 일본인 나쁜 남자 스토리(그가 만났던)는 꿀잼이었다. 나도 질세라 한국인 나쁜 남자 스토리(내가 만났던)를 전했다. 그는 한국인 남자가 훨씬 로맨틱하고 다정할 거라 생각했기에 다음에는 한국 남자와 연애를 해보고 싶다 생각했는데 그쪽 또한 절망스럽다며 개탄했다. 미혼 여자들의 대화란 국적을 불문하고 이렇게 흘러가는 것이었다.


난생처음 해본 일본인과의 데이트는 그렇게 즐거웠습니다!


라고 마무리하고 싶으나 문제는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일어났다. 시차 부적응으로 나타나는 나의 고질병(잠을 못 자면 토부터 나오고 마는 병)이 도지기 시작한 것이다. 속은 메스껍고 머리통이 무거웠다. 기차를(전철 아니고 기차요) 탔는데 또다시 문제는! 이 기차를 타고 45분은 더 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우리가 묶는 호텔은 맨하탄에서 멀어도 너무 멀었다.

한국어 좀 더 해보라고, 아니 그냥 욕이나 좀 더 해보라고 그를 부추기던 나는 갑자기 별다른 말도 반응도 대꾸도 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피로가 밀려와 몸통이 빳빳해지는 기분이 들어 눈을 질끈 감았다. 토하기 직전 느껴지는 전조증상이었다. ‘호텔에서 잠이나 처잘걸, 잠도 못 자며 노느라 몸을 혹사시켰네. 비행 때 안 자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잘 놀아놓고선 컨디션에 좌우된 가벼운 나는 되도 않는 자책을 속으로 했다. 그는 안색이 좋지 않은 내 눈치를 살피다(살피든 말든 이미 나는 신경 쓸 수 없는 상태) 가방에서 부스럭부스럭 소리를 내더니 봉지를 꺼냈다.


하리보 젤리였다. 곰돌이 모양의 기본 하리보 젤리. 그는 젤리를 먹으면 정신이 좀 들 거라고 말하며 봉지를 뜯어 젤리 한두 개를 자기 입에 넣더니 내게도 건넸다. 피식 웃으며 곰돌이 두 개를 먹는데 젤리가 이렇게 새콤달콤한 맛으로 침이 살살 고이게 만드는 식품이었나 싶을 만큼 맛이 있었다. 당분이 가득한 탓에 감각이 혀로 쏠리며 메슥거리던 속이 어느 정도 덤덤하게 느껴졌다. 나는 빠르게 다시 봉지에 손을 가져가 이번에는 여서 일곱 개를 한 번에 집어먹었다. 그도 봉지를 털어 서너 개를 손바닥에 떨어트린 다음 아예 봉지를 내게 넘겨주었다. 나는 호텔이 있는 역까지 가는 45분 동안 질겅질겅 젤리를 씹어댔다. 눈을 길게 감았다가 뜨면 건너편 좌석에서 그가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 후로도 우리는 몇 번 브리핑실에서 만나 반가워했고, 비행 앞뒤로 시간을 맞춰 공항 한식집에서 식사도 했다. 그러다 서로 다른 비행과 시차 속에서 점차 연락이 뜸해지다가 내가 국내 항공사로 이직을 한 후에는 그마저도 안 하게 됐다.


그리고 내겐 비상시를 대비해 젤리를 챙기는 습관이 남았다. 작은 가방에도, 비행할 때 끌고 다니는 캐리어에도 젤리가 들어있다. 카페에서 쌉싸름한 커피에 곁들여 먹거나 운전하는 뚱목이 입에 한두 개씩 넣어주기도 하고, 기내 서비스 후 갤리에서 음료와 함께 오물오물 씹어먹기도 한다. 젤리는 사탕보다 씹는 맛이 도드라지고, 껌보다는 씹어서 삼키기까지 하는 맛이 있다. 씹으면 씹을수록 배어나는 신맛과 단 맛에 쫀득쫀득한 식감까지, 나의 첫 번째 직장 ANA항공에서 쌓았던 기억도 이렇게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나름의 밀도와 정도를 촘촘하게 가지고 있었다.


+사탕이나 초콜릿도 좋아요. 가방이나 주머니에 누군가를 위해 건네줄 요깃거리가 들어있는 것만으로 마음까지 넉넉한 기분이 드니까요. 저는 이곳에서 비행할 때마다 기장님이나 후배 승무원들, 정비사님에게 꼭 한 번씩 사탕이나 젤리를 건네요. 별것 아닌 것들이 손에서 손으로 넘어가면서 기어이 웃게 만들고, 서로 수고한다며 고맙다고 말하게 되지요. 그렇게 생기는 온기 덕분에 비행이란 것도 할만한 거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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