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기다리는 기분을 만끽했다. 애타고 막막하고 지루한 기다림이 아닌, 설레고 생각만 해도 벅차고 옆구리가 간질거리는 기다림 말이다. 기다리던 소식 이후에 이어질 꽃길을 상상하면 그렇게 웃음이 났다. 정말이지 간만에 가져본 기분 좋은 기다림이었다. 딱 3주간.
내가 기다린 건 출판사의 메일이었다. 10월 휴직 기간 동안, 그동안 써온 원고를 모아 출판사에 투고했다. 몇 년간 써온 비행 일지는 책 한 권 분량을 거뜬히 넘겼고, 지금 이 시국이야말로 책을 내기 좋은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로 항공업계는 파국을 맞았고 더는 비행을 이어나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를 비롯한 동료들 모두 비행을 그리워했다. 어쩌면 그래서 나의 비행 일지가 비행에 목말라있는 이들에게 위안이 되고, 이 막막한 시기에 여행이 고픈 사람들에게도 따뜻한 비행 이야기로 온기를 더해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드물게 쓰긴 했지만 2014년부터 지금까지 7년간 글을 써오며 책을 낼 거란 기대를 내심 가졌다. 책을 내고 싶던 출판사는 한 곳이었다. 삐---(밝히진 않겠습니다만). 삐---에서 나오는 에세이의 모양이나 결이 좋기도 했거니와 삐---의 팟캐스트를 오랜 시간 들어오며 삐---에 애정이 갔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팟캐스트 방송=삐---출판사=♡싸랑♡! 그러니까 책을 낸다면 사랑하는 삐---에서!(이 정도면 그냥 밝혀? 이미 눈치 챘을 듯) 뭐 이렇게 흘러갔던 것이다. 그래서 출간기획서를 쓴 이후 투고 메일을 삐---에 제일 처음으로 보냈다. 또 『어느 소방관의 기도』를 낸 S출판사에도 보내고(승무원의 기도라는 책도 내주실 까봐), 현재 같은 항공사에서 일하고 있는 기장님이 책을 낸 H출판사에도 보내봤다(『부시파일럿, 나는 길이 없는 곳으로 간다』). 구질구질하지만 먼저 책을 내서 성공한 기장님의 덕 좀 볼까 싶어 투고 메일에 기장님의 책을 살짝 언급하기도 했다.
S에서는 이번 주 안으로 출간 여부에 대해 결정한 뒤 연락을 준다고 했지만 결국 '출판사의 색깔이나 방향과는 맞지 않아 출간이 어렵다'라는 메일을 받았다. H에서도 '진행이 어렵다'라고 했다. 출판사의 열렬한 환영까지(지금까지 승무원의 이런 글은 보지 못했다! 너무 재밌는 비행 스토리다!) 바라지는 않더라도 막상 출간 반려를 연속으로 당하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삐---, S, H 외에도 두 곳에 더 보냈는데 연락은 없었다. 보통 투고 메일을 100, 200군데에 보내라는데 나는 한 번에 모든 출판사에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반응을 지켜보며 조금씩 수정한 후 찔러볼 생각이었다. 두 개 출판사에서 거절을 당하고, 세 개 출판사에서 연락이 없으니 출간기획서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에! 삐---에서 연락이 왔다. 투고 메일을 보낸 지 16일 만이었다.
단순히 잘 읽어봤다는 내용의 답장이 아니라 세상 따뜻한 관심이 담겨있는 메일이었다. 샘플 원고에서 승객을 대하는 따뜻한 태도와 직업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느껴지며 코로나로 항공사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와중에 작가님(크흑, 삐---에서 나를 작가님이라고 불러주다니!)과 동료 승무원들이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도 궁금하다고 했다. 원고 계약 여부와 전체 원고가 완성되어 있는지도 물었다. 나는 곧바로 블로그와 브런치, 인스타그램 등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원고를 모으고 붙여가며 전체 원고를 만들기 시작했다. 목차와 글의 순서를 수정하느라 꼬박 며칠이 걸렸다. 최종 원고를 보내자 꼼꼼히 읽고 검토하느라 시간이 다소 걸릴 수도 있다는 답장이 돌아왔다.
그렇게 기다리길 3주. 그 3주의 시간 동안 기분이 하늘을 날다가도 바닥으로 꼬꾸라졌고, 삐---출판사 로고가 박힌 책을 상상하며 가슴이 두근거리다가도 혹시나 또 출간 반려 메일이 와있을까 봐 메일함을 열기가 두려웠다. 회사에서 어이가 없고 답답한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책만 내면 이 사사로운 일에서 해방된다는 생각에 설레며 메일함을 열었고, 변기에 앉아 일을 볼 때마다 메일함을 들여다보는 중대한 일을 함께 했다. 상사랑 밥 먹는 괴로운 시간에 확인하면 기쁜 소식이 더 크게 느껴질 것 같아 메일함을 또다시 열었고, 뚱목이에게 "여보, 나 됐어!" 외치고 싶어 현관 문을 열기 전에도 역시나 메일함을 열어보았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생일이 다가오자 내 생일 따위는 모르고 있을 삐---가 '혹시 생일날, 생일 선물로...?' 연락을 줄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다. 정작 생일에는 동네 치과에서 스케일링을 공짜로 해준다는 연락과 안과에서 생일 축하한다는 문자나 왔다.
그리고 며칠 전, 베스킨라빈스에서였다. 생일날 기프티콘으로 받은 아이스크림을 사 먹기 위해 베스킨라빈스에 갔다. 그날따라 뻑뻑하고 꾸덕꾸덕한 게 먹고 싶어 쿠키앤크림이랑 피스타치오 아몬드랑 녹차 맛을 골랐다. 아이스크림을 푸는 아르바이트생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팔 아프겠다...' 생각하며 쳐다보는데 내가 너무 빤히 보고 있어 아르바이트생이 부담스럽겠다 싶어서 시선을 돌려 습관적으로 메일함이나 열었다. 열었는데......!!!
"안녕하세요, 우은빈 작가님. 삐---입니다." 메일이... 와있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메일인데 바로 클릭할 수가 없었다. 확인하기 무서웠다. 결국에 안 되었다는 메일이면 어떡하지... 이거 하나 기다리면서 버텼는데, 그래도 생각하면 힘이 났는데, 기대할 수 있었는데... 안 되면 어떡하지.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면서 메일을 눌렀다. 여전히 따뜻하고 격려하는 문장이 이어졌지만, 결국 '출간하기 어렵겠다는 결론'이었다. 착잡한 심정을 느끼기도 전에 아르바이트생이 손님을 대하는 특유의 서비스 톤으로 물었다.
"집까지 얼마나 걸리세요~?"
천리 길이요...
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5분밖에 안 걸린다고 스푼은 필요 없다 말했다.
가게에서 나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도 내가 삐---의 연락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바로 전화를 받은 엄마에게 결국 출간 반려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말했다.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있는대로 모든 위로와 격려의 말을 긁어모아 쏟아냈다. 훗날 돌이켜보면 다 네게 잘 되는 방향으로 일이 풀리려고 지금 안 된 거구나~ 싶을 거다, 삐---가 네 마음속 1위 출판사라지만 오히려 네 책은 다른 출판사에서 내야 잘 되는 책일 수도 있는 거다~, 지금 당장 나쁜 일이라고 끝까지 나쁜 일로 남는 건 아니다~, 너는 어차피 계속 쓸 것이니 조급한 마음 갖지 마라~. 다 좋은 말이고 맞는 말인데... 너무 길었다. 이만하면 됐다 싶었는데 엄마는 계속 이어갔다. 전화하며 이미 집에 들어와 스피커폰으로 바꾼 후 손 씻고 옷까지 갈아입었다. 이제 그만 샤워나 하고 싶은데 엄마의 위로는 그칠 줄 몰랐다. 통화시간을 보니 38분째였다. 나는 엄마의 말을 끊고 낚아챘다.
"엄마, 엄마! 나 괜찮아~!!! 그래, 계속 도전하면 되지! 출판사가 그렇게 많은데 책 내자고 해줄 곳이 어디 한 군데 없겠어? 진짜 없으면 독립출판이라도 하면 되지! 하여간 괜찮으니까 걱정 마!"
아쉬운 마음은 오간데 없고 괜찮다고 오히려 큰소리쳤다. 길고 긴 위로를 듣고 있자니 내가 죽을 일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위로를 받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고 그래서 진짜 괜찮은 것만 같았다. 뭐지, 엄마의 새로운 수법인가.
이만 씻고 밥 먹어야 하니 끊자고 했다. 퇴근한 뚱목이에겐 간단하게 소식을 전했다. 엄마와의 통화로 지친 나는 더 얘기하고 싶지가 않았다. 뚱목이는 내가 생각보다 멀쩡해 보이자 역시 강한 여자라고 추켜세웠다.
그 후 더 많은 출판사에 메일을 보내고 있다. 몇 개의 출간 반려 메일이 더해졌고 답장이 없는 곳은 더 많다. 조금이라도 기가 죽을라치면 엄마의 길고 긴 위로가 생각나 이만 지겨워져 고개를 젓는다.
다 때가 있는 법이랬다. 그 '때'라는 것도 내가 만들지 않으면 영영 오지 않는댔다.
나는 그놈의 때를 만들려고 지금 부단히,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는 것이라고. 그래서 그 때가 온다면 꽉 붙잡고 만끽하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