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승무원이 대뜸 다음주에 한국으로 놀러 간다며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나의 동기인 '안상(さん)'이 줬다고 했다. A4용지에는 서울의 맛집 리스트와 관광 명소가 빼곡하게 차있었다. 주소와 약도는 일본어, 한국어, 영어 순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수기로 작성했으나, 원본이 아닌 복사본이었다. 일본인 승무원 말로는 안상이 비행 때 복사물을 여러 장씩 가지고 다니며 승객들에게 나눠준댔다. 대충 짐작이 갔다. 비행 중 내게도 많은 외국인 승객이 한국의 맛집 정보를 물어보았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나는 추천하는 장소가 바뀌거나 말끝을 흐리기 일쑤였다.
'언니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쿨하게 이 종이 한 장을 슥, 건넸겠구나.'
안 언니는 나보다 6살이 더 많았고, 이전에 아랍에미레이트 항공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었다. 처음으로 항공사에 입사해 뭐든 서툰 나에 비하면 의젓한 어른 같기만 했다. 당시엔 언니가 정말 큰 언니로만 보였는데, 그때의 언니보다 나이를 더 먹어보니 언니도 제법 어렸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믿고 따르기 편한 언니들을 좋아해 지금까지도 친한 동생보다 친한 언니의 수가 월등히 많은데, 안 언니도 그중 하나다.
입사 후 우린 3개월 동안 일본 도쿄 기숙사에서 지내며 훈련을 받았다. 기숙사는 훈련 센터까지 전철이나 버스로 30분 이상 걸리는 거리에 위치했다. 조용한 동네였기에 동기 16명이 함께 등하교(우리는 그렇게 불렀다)할 때는 나란히 두 줄로 서서 걸었다. 도로를 여러 명이 차지하거나 시끄럽게 수다를 떨기라도 한 날에는 어김없이 회사로 민원이 들어왔다. 그럼 교관들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졌고, 다음날 우린 두 줄 맞춰 걷지만 소곤소곤 말해야 한다는 걸 잊지 않았다. 분명 나는 취직을 했는데, 여전히 학교에 다니는 기분이기도 했다.
처음으로 간 일본에서 그곳 생활을 즐기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매일매일이 시험의 연속이었다. 하늘 위 기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나쁜 상황이란 상황은 다 공부하고 시험을 봐서 통과해야 했다. 테러, 폭발물 처리 절차, 기내난동승객, 화재, 감압, 응급처치 등에 대해 공부하다 보면 하늘에서 순항하는 비행기가 실은 꽤나 큰 위험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게 실감 났다. 아슬아슬한 비행에서 삐끗 잘못하면 아찔해지는 건 순식간일 테니까.
나와 나보다 어린 동기는 아찔한 사건 사고 케이스만 보여주는 수업에서 걱정이 많았지만, 잠도 많았다. 때로는 전날 밤 공부를 마저 다 끝마치기도 전에 뻗어버렸다. 그러고 다음날 아침, 울상을 지으며 안 언니에게 매달렸다. 언니는 나와 동생을 앞에 세우고 뒤따라 걸으며 시험 예상 문제를 짚어주었다. 알아듣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 준 다음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요약을 시키거나, 순서를 뒤바꿔 얘기한 다음 우리더러 올바르게 순서를 짜보라고 했다. 언니가 일러주는 방식은 시험 보기용 방식으로 등교하는 짧은 시간 동안 머리에 욱여넣기 딱이었다. 언제부턴가 언니가 미더운 마음에 마음 놓고 자버린 날도 있었다. 실제로 나는 3개월 동안 딱 한 번 시험에서 떨어져 재시험을 보았는데, 안 언니는 다음날 재시험까지 무사히 치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모든 교육을 마치고 첫 모의비행도 안 언니와 둘이 함께 했다. 일본에서 베이징으로 가는 노선이었다. 난생처음 승무원으로 안전점검을 하고 승객에게 기내식 서비스를 제공한 나는 긴장한 탓인지 속이 자꾸만 메슥거렸고 결국 토까지 했다. 언니는 한국에서부터 가지고 온 까스활명수를 내밀었다. 기내에는 각종 비상약이 있었지만, 까스활명수의 시원함을 따라올 순 없었다. 나는 까스활명수를 벌컥벌컥 마셨고, 거하게 트림을 했다. 그렇게 첫 비행을 마무리했다. 그 후 우리에겐 매달 한 달 치 비행 스케줄이 주어졌고, 나도 언니도 비행 스케줄로 바빠 도통 보질 못했다.
지금 내 앞에 놓인, 안 언니가 외국인 승객에게 주려고 만든 종이 한 장은 그간 언니가 어떤 모습으로 비행해왔는지 내게 파노라마처럼 보여주었다. 언니는 여전했다. 여전히, 자기가 아는 것을 더 잘 전해주려 애썼고 그게 타인에게 도움이 되길 바랐다. 그 마음은 참으로 넉넉한 것이어서 받는 사람까지 풍요롭게 채워주는 마음이었다. 언니를 만나서 그 종이에 대해 물으면 언니가 뭐라 답할지 듣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인스타그램에서 승무원 에피소드 웹툰만 모아볼 수도 있어요:) @flyingwoopi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