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주관적인 비행 목표는 매번 똑같다.
'최소 한 명 이상의 승객과 스몰토크 하기'
이는 단순히 음료와 식사를 제공하는 것에서만 그치고 싶지 않아서다. 수많은 항공사 중에 기꺼이 우리 항공사를 선택하고, 그날 하필이면 내 비행기를 탄 승객을 어찌 그냥 보내겠는가. 승객과 서비스 외에 말 한마디 안 나눠본 날에는 기억에 남는 얼굴이 없다. 기억에 남는 얼굴이 없으면 기억에 남는 비행도 없게 된다. 그럼 그렇게 기억에 남지 않을 비행이나 하며 캐리어만 끌고 다니는 것이다.
「어바웃 타임」 영화에서 마음에 특히 와닿았던 장면이 있다. 줄거리는 이렇다. 과거의 한순간으로 돌아갔다 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주인공이 더 이상 시간 여행을 하지 않고, 대신 순간순간의 삶을 온전히 느끼며 살아가기로 결심하고는 끝이 난다. 그 결심이 있기까지 그는 하루를 두 번씩 산다. 첫째 날 하루는 정신없이, 둘째 날 하루는 전날 이미 겪어봤기에 여유가 있고 남을 챙길 줄도 안다. 아내보다 먼저 일어나 아이들의 아침밥을 챙기고, 일터에서 동료의 긴장을 풀어주기도 하고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며 일터를 더 즐겁게 꾸린다.
내가 특히 좋아하는 장면은 이 부분인데, 첫째 날 그는 샌드위치를 사며 점원을 쳐다보지도 않고 부랴부랴 계산만 치르고는 뒤돌아선다. 둘째 날 그는 샌드위치를 사며 계산을 치를 때 점원과 눈을 맞춘다. 점원은 시원한 미소와 함께 좋은 하루를 보내라고 말하고, 그 역시 웃으며 고맙다고 말한다. 똑같은 하루지만 첫째 날은 그냥 그렇게 흘러가는 하루고, 둘째 날은 사람과 일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마주하며 보내는 하루다. 긴장과 걱정 때문에 볼 수 없었던 세상의 아름다움을 둘째 날에는 느끼는 것이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지금 살고 있는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으로, 우리 말로는 현재를 잡아라, 영어로는 Seize the day로 번역되는 라틴어다. 주인공은 이것을 절실하게 깨닫고 똑같은 하루를 두 번 사는 것보다 그냥 주어진 하루 치를 제대로 살아가기로 하고는 시간 여행을 그만둔다.
We're all traveling through time together everyday of our lives.
우린 우리 인생의 하루하루를 함께 시간 여행을 한다.
All we can do is do our best to relish this remarkable ride.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이 멋진 여행을 즐기는 것뿐이다.
샌드위치 하나를 살 때조차도 서로 아이컨택을 하고 웃으니 완전히 다른 장면이 된다는 인상을 받았다. 일상을, 나의 하루를 풍요롭게 만드는 비법은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영화 속 그 장면은 내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고, 나는 그 장면을 두고두고 기억하며 비행을 이어왔다. 그래서 나는 비행에서 만나는 승객에게 따뜻한 시선을 담아 눈을 맞춘다. 그리고 서비스 중간중간에 승객들에게 묻는다. 여행인지 출장인지, 우리 항공사는 몇 번째 이용하는지, 모녀인지 자매인지 친구인지, 여행은 어땠는지를. 멋쩍어하고 데면데면한 승객도 있지만 신이 나서 이야기를 늘어놓는 승객도 있다. 그렇게 얘기를 나누다 보면 뜻밖의 수확을 얻을 때도 있다. 회사에 도움이 될 만한 건의 사항이라던가 여행지에서 일어났던 재미난 스토리 같은.
한 번은 이런 적도 있었다. 뉴욕에서 돌아오는 비행이었고 아리따운 여성 승객이 혼자 탑승했다. 나는 서비스를 이어나가다 여성 승객에게 혼자 여행 다녀오시는 길이냐고 물었고, 그녀는 퉁명스럽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말을 이어나가기 싫어 보여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끝맺었다. '그럼 필요한 것 있으시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이제 기내 조명을 곧 끌 거니까요.' 그녀를 지나쳐 갤리로 들어가 서비스 물품을 정리한 뒤 한숨 돌렸다. 소등하자 기내는 어둑해졌다. 밝은 조명의 갤리에 있다가 기내로 나가면 눈앞이 침침했다.
얼마 후 아까 전의 그녀가 갤리로 들어섰다. 필요한 것이 있냐고 묻자 없다고 했다. 보통 승객들이 승무원이 일하는 갤리에서는 잘 머물지 않지만, 그렇다고 나가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아니... 기내가 너무 어두워서, 답답해서요.' 암흑공포증 같은 건가? 비행기에서 폐소공포증, 공황장애를 겪는 승객을 여러 번 보아왔기에 어림짐작해 대답했다. '네. 아무래도 좀 어두우면 괜히 답답하고 그렇죠. 여기서 좀 쉬세요. 따뜻한 차 한 잔이라도 하시겠어요?' 그녀는 그러겠다고 했다. 나는 차 한 잔을 건네주고, 내 할 일을 했다. 비행 관련 서류들을 확인하고 작성을 마쳤을 때에도 여성 승객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차는 다 마신 것 같았다. '아무래도 비행이 좀 길죠? 장거리 비행은 승무원보다 앉아만 있어야 하는 승객들이 더 고될 거예요.' 그녀는 어쩐지 무력감에 잠긴 듯이 웃었다. '여행은 어떠셨어요?' 그녀는 여전히 별 대답 없이 나를 향해 웃어 보였다. 나는 괜히 무안해져 말을 이었다. '뉴욕은 너무 붐비지만, 그래도 갈 때마다 좋은 것 같아요.' 그러자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그녀가 불편해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로 알아차리곤 괜히 부끄러워졌다. 딱히 뭐라고 더 할 말이 없어 기내나 한 바퀴 돌고 올 요량으로 트레이를 집어 들었다. '그럼 쉬고 계세요...!' 갤리를 막 나서려는 데,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결혼하셨어요?"
나는 의아했다.
"네? 아니요...?"
"저는 했어요. 며칠 전에."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빤히 바라봤고,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뉴욕에 들렸다가 칸쿤으로 가는 신혼여행이었는데, 어젯밤에 봐버린 거예요."
그다음 말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핸드폰을 봐버렸다는 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에는 얼마 전에 본 「완벽한 타인」 영화가 생각난다.
그리고 나는 꽤 오랜 시간 그녀와 대화를 나눴다. 다른 여자와 만남을 이어오면서 결혼을 진행하고 신혼여행까지 온 남자와 한시라도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 견딜 수 없어 무작정 돌아오는 비행기를 탄 여성 승객과의 긴긴 대화였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딸꾹질을 하면서도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갤리에 앉아 있을 수 있게 간이 의자를 펼쳐주었다. 그녀는 두 번째 식사 서비스를 시작할 때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비행이 끝날 때까지 나와 더 이상 말을 나누지 않았다. 나도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그녀가 비행기에서 만난 승무원에게 결혼한 남자의 외도를 발설한 것을 후회하거나 수치스럽다고 여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 할 때, 그녀는 내 손에 쪽지를 쥐여줬다. 그녀 뒤로는 많은 승객들이 비행기에서 내리기 위해 밀려 있었다. 승객 하기를 빨리 진행해야 했기에 서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모든 승객들이 내리고 나서야 쪽지를 열어볼 수 있었다.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다행히도 그녀는 내가 오히려 생판 모르는 남이었기에 말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날 나는 누군가를 믿는다는 게 뭔지, 전혀 모르겠는 마음으로 비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바로 어제, 한 승객이 하기 할 때, 그날의 그녀처럼 내 손에 뭔가를 쥐여주고 내렸다. 50대 아저씨 승객이셨는데, 하필이면 비행 중에 딱 한 마디 섞어본 승객이었다. 맛있게 드세요, 이 한 마디가 다였다. 국내선 비행이라 비행시간도 짧은 데다가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려 좌석벨트 착용 사인이 오랫동안 켜져 있어서 음료 서비스를 할 시간이 부족했다. 좌석벨트 착용 사인등이 꺼지자마자 우리는 부랴부랴 음료 서비스를 했다. 승객과 이야기할 틈 따위는 없었다. 서비스를 마치자마자 금세 착륙 사인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비행을 마무리하고 승객들이 하기하는 데, 갑툭튀로 한 아저씨 승객이 뭔가를 쥐여준 것이다. 그게 뭔지 확인하기도 전에 아저씨 승객은 나를 지나쳐 재빨리 비행기에서 내리셨다. 그것은 스타벅스 기프트 카드였는데, 카드 봉투에는 휘갈긴 글씨로 이렇게 적혀있었다.
'참 수고가 많으십니다. 승무원분들과 함께 커피라도 드세요.'
카드에는 6만 원이 충전되어 있었다. 김포공항에는 스타벅스가 없어 집으로 돌아와 같이 비행한 동료들에게 기프티콘을 하나씩 보내주었다. 나는 당분간 카드에 충전된 금액만으로 커피를 마셔도 충분할 것이다. 지금까지 만났던 승객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었고, 어제는 말 한 번 제대로 못 건네본 승객에게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받고 말았다.
이렇게 다시 또, 역시나, 산다는 건 이상한 종류의 마술 같다고 문득 생각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존재가 나타나 함께하다 한순간 사라져버린다. 검고 텅 빈 상자에서 흰 비둘기가 나왔다가도 마술사의 손길 한 번으로 사라지듯이.* 내게 승객들이란, 그런 마술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