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 잘하고 이쩌?

네, 지금 공항 가는 길이에요. 다녀와서 또 얘기해요.

by 우자까

“응비니. 비행 잘하고 이쩌?”


비행을 마치고 호텔에 도착해 열어본 카톡에는 짧지만 대찬 기운의 애교가 담긴 메시지가 와있었다. 가부장적이고 무뚝뚝한 데다 무신경하기까지 한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의 큰아빠한테서 온 메시지이기에 대찬 기운의 애교라고 할 수밖에 없겠다.


전직 대한항공 안전보안요원으로 근무하셨던 큰아빠는 조카가 항공업계에서 승무원으로 일하게 되자 굉장히 기뻐했다. 아마도 항공업계 종사자들이 쓰는 전문 용어와 은어, 해외 스테이에서 빚어지는 이야기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사람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짐작해본다. 큰아빠는 안전보안요원으로 비행했던 시절을 반추하며 이야기하기를 즐겼으니까. 비록 큰아빠가 재밌는 얘기 하나 해줄까,라는 말로 시작한 이야기는 정말 재미가 없었지만 말이다. 차라리 '재밌는 얘기'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그냥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신다면 그나마 들을만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큰아빠의 달싹거리는 입과 반짝이는 눈을 보면 마음 한구석이 물렁해져 다소곳이 앉게 됐다. "은빈이 너는 알겠지, 장거리에서는 데드헤드가 사실 더 죽을 맛이잖냐~ 데드헤드 알지? 요즘도 데드헤드라고 하나?" 데드헤드라는 단어를 참으로 오랜만에 써본다며 큰아빠는 크게 웃곤 했다.


명절이나 집안 행사로 큰집에서 머물 때면 나는 보통 큰아빠 옆에 붙어 있는다. 내 앞에서 수다쟁이가 된 큰아빠는 분명히 지난번에도 들었던 것 같은 비행 이야기를 다시 한번 야무지게 풀어놓는다. 그럼 나는 분명히 지난번에도 똑같이 했던 것 같은 리액션으로 다부진 방청객 모드가 되어 어머어머를 연발하며 이야기를 듣는다. 그렇게 야무진 수다쟁이 큰아빠와 다부진 방청객 조카가 새벽 2시가 되도록 비행 토크쇼를 이어가면, 보다 못한 큰엄마가 빨리 디비 처자라고 툭하니 한 소리 던지고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큰집 식구인 큰엄마와 사촌 언니, 사촌 오빠 모두 대구 토박이로 경상도 스타일이어서 그런지 큰집 식구들은 다들 애정 표현에 인색하다. 그에 비하면 나는 비교적 상냥한 말씨를 가진 서울 사람이고, 큰아빠에게는 워낙에 어려서부터 애교쟁이 조카로 자리 잡았기에 큰아빠와의 쿵작이 잘 맞는 건지도 모르겠다. 큰엄마나 사촌 언니에게는 경상도 특유의 거친 사투리로 무심하게 말하는 큰아빠도 내게는 “잘 있었쩌?”라고 하는 걸 보면 말이다.

이쯤에서 하나 분명히 알 수 있는 점이 있다. 내가 먼저 큰아빠에게 재밌는 얘기를 좀 더 해달라고 채근하지 않는다면 큰아빠는 수다쟁이가 되지 않을 거라는 점.


“큰아빠, 이 에피소드는 너무 재밌네요."

"역시 우리 큰아빠, 그때 너무 멋있었네.”라고 하지 않는다면, 큰아빠는 내게 대뜸 "비행 잘하고 이쩌?"라고 먼저 묻지도 않을 거라는 점도.


이것은 내가 매일같이 마주하는 승객들과의 만남에서도 똑같이 이루어진다.


승무원이 아닌 친구들과 만나면 친구들은 회사에 대한 불평과 상사 욕을 해대고 나는 근래 기억에 남는 승객이나 그 승객과의 대화를 신나게 떠들어댄다. 그럴 때마다 종종 친구들은 내가 승객과 나눈 대화를 듣고는 믿을 수 없다는 눈치를 내비쳤다. 본인들도 비행기를 여러 번 타봤지만 비행기에서 승무원과 그렇게 길게 대화를 나눠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아무리 오지랖이 넓고 들이대는 성격의 너라도 어떻게 그런 대화까지 나눌 수 있냐며 미심쩍어했다. 심도 있는 대화는 비행기라는 장소에서 승객과 승무원이 가질 수 없는 성질의 것으로 단정하며 말이다.


그럴 만도 했다. 앉아만 있는 승객들이 좁은 기내를 쉬지 않고 돌아다니느라 분주해 보이는 승무원에게 대화를 청할 일은 만무했다. 나도 승객으로 비행기를 종종 타지만 승무원과 한두 마디 이상 이야기를 이어나간 적이 없었으니까. 돌이켜봐도 지금까지 비행하면서 승객이 먼저 내게 이런저런 얘기를 건네며 대화를 시작한 건 아니었다. 기내에서 나는 큰아빠한테 했던 것처럼 승객들을 대했다. 먼저 묻고 궁금해하고 듣고 싶어 한 사람은 나였다.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순간에는 승무원도 안전을 위해 점프 시트라고 불리는 보조좌석에 앉는다. 이 보조좌석 중에는 승무원이 배정받은 구역에 따라 비상구 좌석 승객과 마주 보며 앉는 좌석이 있다. 신입 승무원 시절에는 승객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좌석에 앉아 있는 일이 고역이었다. 이착륙하는 십에서 십오 분간의 짧은 시간이 어색하기만 해서 앞에 앉은 승객과 혹여라도 눈이 마주칠까 시선처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괜히 수첩만 뚫어지게 바라보곤 했다.


그러다 비행 일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서 승객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승객 특성을 인상이나 표정 또는 제스처만으로 파악하게 된 이후에는 승객에게 먼저 자신 있게 말을 건네게 되었다. 비행으로 우연히 만났지만 그 우연이 유쾌한 기억으로 남을 수 있게 하는 일은 승무원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승객과의 즐거운 대화는 승객뿐만 아니라 비행기라는 일터에서 일하는 내게 더 큰 생기를 주기도 했다. 언제부턴가 나는 승객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오늘 비행시간이 참 길죠…. 이따 가벼운 잡지라도 준비해 드릴까요?”

“뉴욕에는 무슨 일로 가시는 거세요?”

“모녀끼리 여행 가시나 보네요.”


대부분 승객들 역시 나와 멀뚱히 마주 보고 앉아있기가 민망했는지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곧잘 반갑게 대답했다. 그러다 이어지는 대화에 평소 궁금했었던 점을 내게 묻기도 했다. 비행기 화장실에서 물 내리면 바람 소리가 크게 나는데 공중에서 배출하느라 그런 건 아닌지 같은 질문, 그럼 똥은 언제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질문 같은 것들... 얘기하다 보면 어색했던 거리감은 사라지고 친근함이 남았다. 친밀감이 있는 대화는 사람을 무장 해제시키는 힘이 있었다.


나는 여기서 대화의 컨텐츠 자체보다 대화를 나누는 대상에 방점을 찍고 싶다. 더 이상 대화를 이어나가기 힘든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화 소재거리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내 말에 까무러치게 웃는 상대를 보며 내가 이렇게까지 재미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나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어떤 날은 건조하다 못해 퍽퍽하게만 흘러가는 대화가 오가는 상대 앞에서 세상에서 제일 흥미 없는 사람이 바로 나인 것만 같은 때도 있다.


똑같은 나인데 앞에 있는 사람의 반응에 따라 전혀 다른 내가 된다. 상대가 나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또는 얼마나 포용할 수 있는지에 따라서 바로 나라는 사람도 결정되는 것이다. 나의 유머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앞에서 나는 유쾌한 존재로 펼쳐질 수 있다. 평소에는 말없이 무게를 잡는 큰아빠가 내 앞에서만큼은 호기로운 수다쟁이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이 사랑을 갈구하고 무한한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이유 중 하나도 자신의 모습을 확장시키고 싶어서가 아닐까. 사회에서 요구하는 격식과 틀에 갖춰진 모습이 아닌 찌질이 같고 괴짜 같은 모습도 내보일 수 있는 상대.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 앞에서 우린 더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으니까.


내 앞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을 제일 가는 달변가로 재치 있는 유재석으로, 때로는 진지한 철학가로 만들어줄 수 있는 나였으면 좋겠다. 그 사람을 더욱 흥미로운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나였으면 한다. 상대가 스스로를 자신 있게 펼쳐 보이고, 내어 보일 수 있는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나이고 싶다. 나의 반응과 태도, 무심코 드러나는 표정이 내 앞에 있는 그 사람을 만들고 있는 것임을 이미 나는 알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보자면 어제 만난 진상 승객, 나만 보면 열을 내는 상사, 따분했던 친구, 불친절했던 점원…. 어쩌면 모두, 내가 만든 그 사람의 일련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소리다.



기내에서 책이라도 읽는 승객이 있으면 너무 반가워요.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말을 걸 타이밍이 생기면 조심스럽게 무슨 책인지 여쭙기도 하고, 책 읽는 거 좋아하시냐며 추천해주실만한 책이 있냐고 묻죠.

지난번에 만난 승객이 『인간실격』을 읽고 있는 거예요('참 부끄러운 생애를 보냈습니다' 문장으로 유명한 소설이죠. 제 프로필 소개에 쓴 '부끄러운 일이 많은 비행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도 이 문장에서 따왔죠!).

반가운 마음에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습니다. 저는 인간실격 한 권만 읽었는데, 승객은 다자이 오사무의 전작을 읽었더라고요. 책 좀 읽는다고 아는 척하려다 밑천이 금방 드러난 거죠.

그런데 승객이 하기할 때 다자이 오사무 작가의 책 순위를 매긴 쪽지를 건네줬어요. 꼭 읽어보라면서요. 시간이 안 된다면 1, 2위로 매긴 책이라도.

아직도 읽진 못했지만, 그날 승객이 준 메모는 간직하고 있어요. 나중에 꼭! 천천히 읽어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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