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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자까 Apr 13. 2020

'멘트 왕'이었던 승무원 후배님

                                                                           

 '답답하다 답답해... 아, 그게 아닌데!'


 입사한 지 일 년도 안 된 후배와 함께인 비행이었다. 후배는 비즈니스 클래스 서비스 교육을 막 수료한 후 처음으로 비즈니스 클래스 승무원 담당을 배정받은 날이었다. 당연히 서툴 수밖에 없었다. 후배는 서비스 패턴을 잘 따라오지 못했고, 서비스 물품을 다룰 때에도 어설프기만 했다. 보고만 있을 수 없던 나는 조곤조곤한 말투로(어쩌면 그래서 더 얄미운) 지적하고 가르쳤다. 후배에게는 그저 가르침을 가장한 잔소리로 들렸으리라.


 그래도 후배는 매번 "네, 알겠습니다 선배님. 정말 몰랐습니다.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씩씩하게 대응했다. 깍듯한 후배 모습에 마음이 누그러지다가도 지적해야 할 부분이 보이면 기어코 열을 내며 참견해야 하는 내가 싫어질 지경이었다. 그래도 비행하면서 배울 실무를 누군가는 가르쳐야 했고, 후배가 비즈니스 클래스를 담당한 첫 비행이니만큼 선배로서 바로잡아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즈니스 클래스 승객은 까다롭고 날카로운 점이 있기에 후배도 초반부터 확실히 알아두어야 앞으로의 비행이 수월할 터였다. 뭐 말이 그렇다는 거고, 그럴듯한 명목을 앞세운 나는 그저 잔소리하는 데 신난 일 잘한다고 자뻑에 빠진 선배였다.


 너무 열의를 가지고 잔소리해서인지 비행을 마칠 즈음 나는 진이 빠질 대로 빠져 있었다. 뭐라고 하는 입장도 한번 해보니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빨리 호텔로 돌아가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호텔에선 비행 스트레스를 날려줄 불닭볶음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행기가 게이트에 도착하고 좌석벨트 착용 사인이 꺼지자 삼백 명 넘는 승객들이 일제히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비즈니스 클래스에서부터 시작해 이코노미 클래스 승객들까지 하나둘씩 나를 스쳐 지나가며 비행기에서 내렸다. 나는 승객들에게 기계적으로 마지막 하기 인사를 읊었다. 생각해보면 매번 같은 멘트로 비행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말을 점점 길게 늘어뜨리며 한 멘트에 승객 서너 명은 거뜬히 지나갈 수 있게 하는 수법이다. 삼백 명 승객에게 삼백 번 인사할 필요 없이 말이다. 꼼수만 늘어버린 나라고 처음부터 이런 건 아니다.


 비행 시작 전에는 의욕이 앞선다. 마음이 담긴 따뜻한 서비스를 해야지, 승객들 더 잘 살펴야지, 동료들과 좋은 팀워크로 즐거운 비행을 만들어야지... 이윽고 승객 탑승 시간에는 불타오르는 의지와 함께 환한 미소로 탑승 인사를 날린다. 내가 지어 보일 수 있는 가장 씩씩한 웃음으로. 그리고 이어지는 비행에서 까다로운 사무장 비위를 맞추느라 얼굴이 굳어가고, 진상 승객 때문에 부들부들 떨다가, 기압차로 몸은 붓는데 타이트한 유니폼을 입어 속이 안 좋고, 부어오르는 발에 발가락이 저려온다. 씩씩하고 환하다는 웃음이 퍼석퍼석 해진다. 게다가 그날 하루에 비행이 적어도 두 번, 많게는 네 번까지 있다면 말할 것도 없다. 승객을 태우고 뜨고 내리기를 반복하다 보면 땅에 도착했는데도 정신머리는 아직 하늘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다.


 승객들이 내릴 때 동료 승무원들을 살펴보면 다들 나사가 하나씩은 빠진 상태다. 한 동료는 잘못 찍힌 선배에게 된통 혼날 각오를 하고 있고, 다른 한 동료는 서비스 도중 벌어진 실수로 회사에 리포트 써야 하는 일을 걱정하고, 또 다른 동료는 시차와 기압차로 얼굴이 맛이 갔거나, 나처럼 그냥 호텔 방에서 맥주랑 불닭볶음면을 먹고 퍼질러 잘 생각뿐인 사람도 있다. 하여간 잔소리 마녀로 유독 피곤했던 그날도 나는 승객들을 얼른 비행기에서 내리게 하고 싶은 마음에 아무 생각 없이 외쳐댔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말을 길게 늘어뜨리는 꼼수를 쓰는데도 목이 멨다. 잠시 목을 가다듬는 데 건너편에서 후배 목소리가 들렸다. 별안간 눈이 번쩍 뜨였다. 후배는 앞다투어 내리는 승객들에게 매번 다른 멘트로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있었다.


 "한국보다 날이 춥습니다. 감기 조심하십시오."

 "눈이 왔으니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감사합니다."

 "행복한 주말 저녁 되십시오. 오늘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내에서 다시 만나 뵙기를 희망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오늘 함께 비행해서 즐거웠습니다. 조심히 돌아가세요.


 나는 승객들에게 인사를 드리는 일도 잊고 얼마간 후배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일은 서툴지만, 승객을 향한 마음과 열정만은 전혀 서툴지 않던 후배였다. 승객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리는 그 순간만큼은, 후배가 우리 중에서 가장 큰 선배로 보였다. 그리고 나는 다음 비행에서 꼭, 

이 멘트 왕 후배를 잊지 않을 작정이다.


 덕분에 지금은 저도 멘트 부자가 되었습니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안녕히 가시라고 반복 인사만 했을 때보다 승객들이 제게 더 크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며 내립니다. 무엇보다 그날 도착지와 날씨, 상황에 따라 매번 다르게 멘트를 치는 제가 흥이 난다는 것입니다. 뭔가 프리스타일 랩을 하는 기분이랄까요. 


https://www.instagram.com/flyingwoop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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