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출근길이다.
직장 앞에서 만난 동료가 나에게 묻는다.
“어제 소개팅했다며? 어땠어?”
아뿔싸, 만고불변의 법칙을 난 또 까먹었다. 댐으로 강을 막을 순 있어도 사람 입은 어느 것으로도 막지 못한다. 분명 나는 주변 두 사람 정도에만 조심스럽게 말했건만, 어느새 나의 소개팅은 공공재가 되었다.
쉴 틈 없이 질문이 쏟아졌다.
누가 해준 거냐?
몇 살이고 뭐 하는 사람이냐?
어디서 만나서 뭐 했느냐?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욕망은 누구에나 큰 법이라지만 이상하게 가정을 꾸리고 안정된 생활을 하는 동료들이 더욱 열을 내며 물어본다.
항상 끝은 같다. 모든 이성은 똑같으니 앞뒤 재지 말고 만나보란다. 아무나 그냥 만나서 빨리 결혼하란다. 그러며 나한테 이상한 눈빛을 보낸다. 적당히 직장 생활하는,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삼십 대 중반에 보내는 눈빛이 순수하지 않다.
참 이상하다. 적당히 나이가 찼는데 만나는 사람이 없다고 하면 이유를 분석한다. 먼저 사회적 조건과 외모와 키 등 드러나는 곳에서 이유를 찾는다. 마땅히 딱 이유를 찾을 수 없다면 드러나지 않는 비밀스러운 이유가 있을 거라고 수군댄다. 아니면 그 사람의 눈이 너무 높아 감히 충분한 상대를 못 찾았다고 단정한다. 각자 다양한 이유와 사정이 있는 것을 자신들의 생각과 기준으로 판단한다.
나에게서는 특별한 이유를 찾지 못했나 보다. 눈을 낮추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나는 절대 눈이 높지 않다. 난 이성을 볼 때 딱 3가지만 보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웃는 모습이다. 나는 쌍꺼풀이 있는 큰 눈, 오뚝한 코, 갸름한 얼굴 등 부분적인 아름다움에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부분이 아름답지 않더라도 웃는 모습이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사람에게 매력을 느낀다. 웃는 얼굴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겠냐마는 웃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것은 더 큰 의미가 있다. 웃음은 기능적인 측면이 강하다. 무엇이든 연습하면 익숙해지고 잘하듯 평소에 잘 웃어야 웃음이 자연스러워진다. 그리고 평소에 잘 웃는다는 것은 많은 일에서 행복을 느끼고 마음껏 표현한다는 의미다. 웃는 모습은 그저 외적인 매력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매력까지 더해지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자주 웃어 자연스러운 ‘웃상’인 이성에게 끌린다.
두 번째는 나를 깨물 수 있는 사람이다. 애완동물도 아니고 깨문다고 하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나는 결코 진지한 사람이 아니다. 장난을 좋아하고 방정 떨어 주변 사람들을 웃기는 것이 좋다. 좋게 말하면 끼가 있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관종이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자꾸 근엄하고 진지해진다. 차분한 직장 분위기의 탓도 있고 믿음직한 사회인이 되려면 발랄한 나의 모습을 감추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무 답답하고 불안하다. 어디 한 군데라도 마음껏 깨방정을 해소할 곳이 있어야 한다. 깨방정을 있는 그대로 쏟아낼 놀이터가 필요하다. 나의 연인이 그런 놀이터였으면 좋겠다. 내가 오두방정을 떨면 같이 웃고 같이 배를 잡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면 좋겠다. 내가 깨물면 똑같이 나를 깨물면서 즐거워할 수 있는 그런 끼를 가진 사람이 나의 이상형이다.
마지막으로 나를 따뜻하게 배웅하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낀다. 예전 인연은 집에 데려다주면 내가 돌아가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배웅했다. 내가 어서 들어가라고 해도 한사코 안 들어가고 손을 흔들어주거나 집에 들어가서 창문으로 바라봐주었다. 나는 정말 행복했다. 배웅은 다른 어떤 행동보다 내가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했다. 돌아오는 길이 아무리 멀어도 행복했다. 혼자 돌아가야 하는 나를 위한 걱정과 고마움이 섞인 눈빛은 지금도 따뜻하게 남아있고 나의 상대가 그런 사람이었으면 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3가지, 이래도 눈이 높은 건가?
누군가 높다고 하면 뭐 인정해버리려고 한다.
그래요, 나 눈 높습니다.
이미지 출처:픽사 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