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취미요? 돌아오는 거요.
새 학기가 되면 어김없이 종이 한 장이 교실을 한 바퀴 돌았다. 새로 만난 선생님에게 나를 알리기 위해 장래희망을 비롯해 여러 가지 정보를 쓰는 종이였다. 그중 내가 제일 쓰기 어려웠던 항목은 취미였다.
그동안 나는 다양한 거짓 취미를 지어냈는데 그 역사를 살펴보면 이렇다.
1. 읽은 책이라곤 해리포터 하나지만 그래도 취미는 독서
2. 모두에게 무난한 취미 음악 감상
3. 자지 않으면 다행인 명상
4. 그나마 양심에 찔리지 않는 그림 그리기
5. 운동은 너무 양심 없지 산책
6. 그때는 영화 티켓 할인이 정말 어마어마했지 영화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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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짓말도 그렇다고 사실도 아닌 애매모호한 취미들을 돌려 막기 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취미 생활이 그 사람을 보여준다면 내 취미는 취미지어내기스트에 가까웠고, 그렇다고 취미가 없다거나 숨 쉬기 같은 걸 쓰자니 시간을 허투루 쓰는 사람처럼 보일까 걱정됐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좀 허투루 쓰면 어떤가 싶기도 하다.
지금의 나는 꽤 진지하게 다양한 취미를 탐험하고 있어서 이제는 취미지어내기스트에서 한 뼘 더 자란 취미방랑가가 됐다. 정말로 다양한 취미를 찾아다니기도 하고, 가지고 있는 취미들 사이를 방랑한다.
의외로 학창 시절에 돌려 막기로 가장 자주 썼던 독서는 진짜 취미가 됐다. 독서모임에 나가기도 하고, 장시간 이동할 일이 생기면 이북리더기를 챙겨 이동 시간에도 책을 읽는다. 나도 내 독서가 해리포터에서 끝나지 않고 진짜 취미가 될 줄 몰랐다.
다른 취미는 돌려 막기 2번 음악 감상이다. LP가 좋아서 턴테이블을 사고 LP를 듣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가수의 LP를 사기도 하고, 우연히 들은 재즈가 좋아서 빌 에반스나 쳇 베이커의 LP를 사서 듣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취미는 돌려 막기 취미 목록 6번으로 시작됐다는 것이다. 홍콩 여행의 기억을 떠올리려 본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를 보고 푹 빠져 턴테이블도 없이 덜컥 LP를 먼저 산 것이 시작이었다. 영화와 LP 취미는 운명 공동체처럼 OST LP를 먼저 샀다가 영화를 보기도 하고, 영화를 봤다가 OST LP를 사기도 한다.
다음 취미는 그림 그리기이다. 한 때 그림을 전공으로 삼고 싶기도 했는데 그렇게 되진 않았지만 취미로는 남았다. 거창한 걸 그리는 건 아니고 그때그때 그리고 싶은 것을 아이패드나 종이에 그린다. 어쩌다 보니 만화도 3편이나 올렸다. (★홍보 > https://brunch.co.kr/@word-world/21 ★ )
이게 끝이 아니다. 의외로 절대 취미가 될 수 없을 것 같고, 여전히 취미라기엔 먼 5번 운동은 여러 가지를 계속 시도하고 있다. 홈트, 요가, 필라테스를 시작으로 PT를 받고, 클라이밍과 리듬 복싱을 했다. 최근 가장 마음에 들었던 운동은 클라이밍이다. 거기다 점심에는 계속 산책을 나가는 중으로 나는 위에 나열한 6가지 중 명상을 제외한 모든 취미를 계속하고 있다.
위에 나열되지 않은 취미 중 관심이 있는 것도 꼭 한 번씩 시도해 보는데 그중 결과물이 남아 있는 것을 꼽자면 글쓰기와 브이로그, 금속공예 등이 있겠다.
간혹 취미 이야기를 하면 내가 많은 것을 하고, 해 봤다는 것에 놀라는 사람이 있고.
또 다른 사람은 그래서 그걸 얼마나 잘하는지에 관심 있다.
이런 사람에겐 미안하지만 하나도 잘하지 않는다.
글쓰기도 내겐 취미 중 하나이다. 매주 올리겠다고 다짐하지만 주제 생각만 일주일 동안 하고 한 글자도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지금 이 글도 사실 뇌보다 손가락이 더 빨리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마구 쓰고 있다는 말이다. 이럴 땐 그냥 오늘은 잘 안 써지는 날이다 하고 일단 쓰는 것에 만족한다. 그다음에 보고, 고치고, 또 보고, 또 고치다 보면 그래도 처음보다 많이 좋아지기도 한다.
내 모든 취미는 이런 식이다. 대체로 잘 못한다. 특히 운동을 할 때는 강사님에게 '제발 저를 포기해 주세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독서를 늘 하는 것도 아니다. 한동안은 책이 도저히 읽고 싶지도, 읽히지도 않아서 사둔 책들에 먼지가 쌓이기도 했다. 음악은 아무리 들어도 조예가 생기지 않는다. 여러 노래를 듣지만 나는 노래와 가수, 제목을 잘 연결하지 못한다. 클래식은 특히 심하다. 그냥 좋아만 한다. 영화도 그렇다 킬링타임용이라는 영화가 며칠 동안 내 일상을 지배해 뇌에서 불쑥불쑥 자동 재생이 되기도 하고, 좋은 영화라고 해서 봤더니 이해를 못 할 때도 허다하다. 아예 영상 자체를 보지 않을 때도 많다.
그래도 애쓰지 않는다.
좋아하려고도 애쓰지 않지만, 잘하려고도 애쓰지 않기로 했다. 내가 취미 생활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것이다. 아끼지만 애쓰지 않는 것. 좋아서 시작했을 수도 있고, 필요해서 혹은 우연히 시작할 수 있지만 접고 싶을 땐 죄책감도 미련도 없이 접을 수 있어야 한다.
취미도 하다 보면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나는 그 순간마다 잘 못하는 내가 너무 괴롭다.
내가 고개를 돌리는 쪽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넘쳤다. 이 사람의 그림도 대단하고, 저 사람의 그림도 대단하고, 세상에 이렇게 대단하고 좋은 그림이 많은데 딱 하나 내 그림만 초라했다. 글쓰기도 다르지 않았다. 모두 대단한 글을 써냈지만 내 글은 무매력이었다. 음악은 또 어땠나. 음치라서 노래도 못하고, 몸치라서 춤도 못 추고.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그 무엇도 잘 못한다.
이렇다 보니 잘하는 사람들이 부러워 배가 아팠다, 많이. 아마 그동안 느꼈던 질투들이 독처럼 몸에 쌓였다면 나는 이미 온몸에 독이 쌓여 망가졌을 테다.
아예 망가지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지금도 질투심은 사라지지 않았고, 한창 질투에 불탈 때는 취미도, 사람도, 나도 미웠다. 그래서 이제 마음을 바꿔 잘하고 싶지만 애쓰지 않기로 했다.
애쓰지 않기로 한 건 최근이다. 주변 사람의 말에서 힌트를 얻었다. 몸을 움직여야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지인은 지금처럼 운동에 관심이 높지 않을 때부터 다양한 운동을 해왔다. 그래서인지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인데, 당시 2주 넘게 운동을 못 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스트레스를 받았을 텐데 괜찮아 보여 물었다.
"2주 동안 운동 못 가서 어떡해요?"
"괜찮아요. 어차피 다시 하게 될 테니까. 나는 운동은 평생 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잠깐 안 하고 있어도 다시 할 거라고 생각하니까 괜찮아요."
그래, 나도 다시 돌아갈 거다. 취미를 묻던 초등학교 때부터 돌려 막기로 써온 취미들이다. 추미가 그리 쉽게 나를 떠나지도, 내가 취미들을 떠나지도 않을 거다. 책을 안 읽고 몇 달을 보내도, LP를 전처럼 자주 듣지 않아도, 그림을 하나도 그리지 않아도, 글이 써지지 않아도 나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정정한다. 이제 내 취미는 돌아가는 것이다.
모든 좋아하는 것들을 그 순간 좋아하고, 떠났다가도 다시 돌아가는 것. 저 멀리 멋진 재능을 뽐내며 뛰어가는 사람들의 등을 보지 않고 슬렁슬렁 걷자. 걷다 다리 아프면 좀 쉬기도 하고, 해찰도 하면서 가자.
애쓰지 않으면 가능하다. 나는 좋아하는 것을 오래 좋아하고 싶다. 한 때 내가 온 힘을 다해 좋아했던 일을 미워하고 싶지 않다. 나는 내 삶에 좋아하는 것들을 섬처럼 둥둥 띄워두고 살고 싶다. 언제든 나를 환영해 줄 섬들에 내킬 때 가자.
애쓰지 않고, 내키는 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