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아니기에 가능했던 것들 늘 시작할 수 있는 우리
몰랐던 세계의 문 앞에서
외국어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외국어라는 세상’이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 문을 열고 들어서니,
예상치 못한 결핍과 낮은 자존감이
오래도록 저를 붙잡았습니다.
10대의 대부분은 언어와의 싸움이었습니다.
새로운 나라에 적응하려 애쓰면서 눈치를 보았고, 반드시 이 집단에 들어가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텼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나는 다르다’는
이질감은 늘 따라붙었습니다.
언어의 한계가 마치 “너는 이 세계와 어울리지 않아”라고 속삭이는 것만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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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 부딪히는 스무 살
20대의 시작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대학 강의실에 앉아 있어도,
이해되지 않는 언어와 문화의 벽은
저를 수십 번이고 좌절시켰습니다.
나 자신을 집어던지듯 도전해야
아주 조금 발을 들일 수 있었을 뿐입니다.
특히 외국인이라는
사실이 언어 때문에 드러날 때면,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어찌할 바를 몰라 주저앉고
싶었던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아직 미성숙했던 시절,
저는 그저 이 세상에 자연스럽게
물들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같아지고 싶다’는
열망이 그 당시의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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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세상의 시험
하지만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려 할 때,
언어는 다시 제 앞을 막아섰습니다.
이번에는 질문이 달랐습니다.
“이 언어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인재인가?”
그 질문은 단순한 소통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의 진로와 삶 전체를
시험하는 벽처럼 다가왔습니다.
이제는 조금 더 성숙해진 만큼,
그 무게는 더 깊고 황망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깨달았습니다.
언어가 트여야만
그다음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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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춘 적 없는 공부
그 순간 저는 다시 수험생처럼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언어 공부를
멈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평생 언어와 함께 살아왔으니까요.
새벽이면 수업을 듣고,
하루의 일을 마친 저녁에는
또 다른 수업으로 모자람을 채웠습니다.
그렇게 일과 공부를 차곡차곡 쌓아 올렸습니다.
힘들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쌓임은 제 안에 단단한 힘으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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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길 위에 선 사람들
그렇게 시간을 견디고 나니,
어느 순간 제 앞에는 또 다른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저와 같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언어로 말이 트여 세상을 트고 싶은 사람들.”
그들과의 만남은 또 다른 배움이 되었고,
제가 겪었던 불안과 외로움은
어느새 공감과 연대의 언어로 바뀌었습니다.
누군가의 두려움을 이해하고,
누군가의 도전을 응원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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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이어지는 줄타기
저는 여전히 불안과 고독,
그리고 즐거움과 두근거림의
줄타기를 하듯 매일을 살아갑니다.
여전히 공부를 하고,
일을 하며, 학생들과 함께 배우고
가르치며 하루를 채웁니다.
언어는 제게 끝없는 여정입니다.
돌아보면 자연스럽게 물음을 던지게 됩니다.
내게 언어란 어떤 의미였을까?
저에게 언어는 단순한 학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저를 증명하는 길이었고,
세상을 여는 열쇠였습니다.
말이 트이니, 세상이 트였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트이니, 비로소 제가 보였습니다.
끝이 아니기에 가능한 것들
돌아보니,
우리는 끝이 날 때까지 끝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깨달음은 단순한 위로를 넘어,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완전히 바꿔 놓았습니다.
중도에 포기했다고 해서 진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잠시 멈추어 서 있다고 해서
길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가능성,
언제든 이어갈 수 있다는 안도,
그것이야말로 언어가
제게 알려준 가장 큰 선물이었습니다.
“끝나지 않았으니, 나는 다시 시도할 수 있다.”
이 단순한 진실이 저를
무너짐에서 일으켜 세웠고,
또 다른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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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선택으로 열리는 문
언어를 배우며 또렷하게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세상의 문은 누군가가 대신
열어주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내가 직접 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두려움 때문에
문 앞에서 오래 머뭇거릴 수도 있고,
그 너머의 풍경을 상상하다
주저앉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을 열겠다는
결심은 오롯이 나의 몫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순간마다,
저는 조금씩 단단해졌습니다.
아무도 대신 걸어줄 수 없는 길 위에서,
저는 저 스스로의
힘으로 문을 열고 발을 내디뎠습니다.
그 작은 걸음들이 쌓여 결국
지금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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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지금도 저는 문 앞에 서 있습니다.
새로운 언어, 새로운 만남,
새로운 도전의 문 앞에서
또다시 심장이 두근거립니다.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두렵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큰 축복입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고,
다시 열 수 있고, 다시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
세상은 늘 제 앞에 열려 있었고,
그 문을 열 수 있는 손잡이는 제 손안에 있었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더 이상 두렵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말이 트이니 세상이 트였고,
세상이 트이니 제가 보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압니다.
세상은 결코 닫히지 않는다는 것을.
끝이 날 때까지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무엇보다, 그 끝과 시작의 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바로 저 자신이라는 것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