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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나물 Apr 22. 2020

코로나19가 사람 성격도 바꿉디다

설거지가 이렇게 개운한 거였어?

안녕하세요, 게으름뱅이입니다.


  자취 9년 차. 와식생활 전문가. 아이폰 건강앱 주말 걸음 수 100 미만. 동선이랄 게 없는 작은 원룸에서도 가장 효율적인 동선을 추구하여 모든 것이 손 닿는 거리에 위치. 청소와 빨래는 최대한 미뤄서 한꺼번에. 전 남자친구 S가 발 디딜 틈 없이 지저분한 내 방을 보고도 괜찮다고 해줬을 때 진정한 사랑을 느낌.


  생각나는 대로 쓰고 보니 내 얼굴에 침을 너무 뱉은 것 같아 과연 이 글을 발행해도 될까 싶다. 하지만 사실이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자취 생활과 부지런하지 못한 성격, 그리고 대학생활 초기의 무기력이 낳은 나의 살림 패턴은 쉽사리 바뀌기 어려웠다. 게다가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아침은 사무실에서 간단하게, 점심은 밖에서, 저녁은 민족주의자가 되어 배달 음식으로 하루를 끝낸 뒤 그 외 시간은 언제나 매트리스 위에서 보냈다.


그 시절(?) 인스타그램에는 침대샷, 천장샷이 많다



뭐야 뭐야, 이거 어떻게 되는 거야


  코로나19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듣게 된 것은 1월 초중순이었다. 일주일 뒤 옆 부서의 중국 출장이 예정되어 있었고, 누군가 중국에 폐렴이 유행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자연스럽게 출장지가 우한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검색해봤던 기억이 난다.


  한 달 뒤, 31번 확진자가 나오면서 분위기는 심각해졌고 모두의 관심사는 동종업계의 재택근무 여부였다. 그러다 모 기업에서 최초로 재택근무를 도입한다는 기사가 나오고, 다른 회사들도 하나둘 재택근무를 시작하면서 우리 회사도 공지가 내려왔다. 카톡방에서는 어느 회사가 언제부터 언제까지 재택을 하는지 홍익인간 정신으로 정리해둔 리스트가 돌아다녔다.


기사에 언급된 기업들과 이 글에 등장하는 회사는 관련이 없습니다. 진짜로.



옛날 아주 먼 옛날, 자발적 집순이가 살고 있었어요.
그녀는 무서운 저주에 걸려 끊임없이 걷게 되고 말았어요.


  첫 사흘 정도까지는 순조로웠다. 통근에 소모되는 시간이 없으니 그 시간만큼 업무를 일찍 시작하고, 또 그만큼 일찍 종료할 수 있었다. 진정 아름다운 워라벨이었다. 다만 육아와 재택을 동시에 해야 하는 몇 동료들이 진심으로 걱정됐다. 한 편으로는 워킹맘들을 최대한 배려해주시는 팀장님 덕분에, 화상회의 때마다 귀여운 아가들을 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


  문제는 나의 생활패턴이었다. 퇴근 후에 집에 도착하면 누워서 유튜브 아니면 넷플릭스로 시간을 보내다가, '오늘은 주말이 아니야. 내일도 일해야지.'라며 스스로를 다독인 뒤 씻고 누워서 다시 유튜브를 틀어놓고 보다가 잠이 드는 일상. 그러니까 그 일상에 '집에 도착하면'만 빠진 셈이다. 재택근무 이전과의 차이는 하루에 두세 시간 더 누워 있는 것 외에 별다를 게 없었다.

  출근을 하면 팀 사람들과 같이 식사도 하고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는데, 혼자 사는 자취생은 일주일 내내 집에만 있으면 정말 단 한마디 말도 하지 않게 된다. 게다가 집에 오면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삶에서 오늘도 내일도 하루 종일 집에 있어야 하는 삶으로 바뀌면서 마음이 점점 답답해졌다. 넓진 않지만 혼자 살기엔 딱 적당하다고 생각했던 자취방이 너무나 좁아 보였다.

 

  그렇게 자발적 집순이는 점점 집순이 성향을 잃어갔다. 주말만 되면 마스크를 끼고 밖으로 미친 듯이 나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돌아다니다 보니 세상에는 생각보다 갈만한 곳과 볼만한 것들이 많았고 심지어 사람들이 밖을 나오지 않으니 거리의 인구밀도는 너무나도 쾌적했다. (이기적인 행동이었음을 알고 여전히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정신 질환에 걸릴 것만 같았다.)

  자취방과 나의 심적 거리는 멀어져만 갔다. 심지어 가끔은 평일에도 저녁이 되면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걸었다.


이보다 확실할 수 없는 증거자료



재택근무가 시작되었습니다.

마피아는 고무장갑을 껴 주세요.


  밖으로 나가는 나만이 진정한 나, 살아있는 나로 느껴졌다. '집에 있는 나'는 홀대했다. 문득 방 안을 둘러보니 물건이 가득한 책상과 침대, 옷더미, 그리고 수많은 택배 상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음이 불편해졌다. '나가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아서 나간 것까지는 오케이. 근데 몸은? 몸 건강은 안 챙기는 거야? 언제까지 이렇게 스스로를 버려둘 거야? 이렇게 계속 살려고?' 벌떡 일어나서 택배 상자들과 재활용 쓰레기를 미친 듯이 정리하기 시작했다. 쌓여있던 물건을 한 곳에 모은 뒤에 버릴 물건은 쓰레기통에, 쓰는 물건은 서랍 제자리에 넣었다. 청소기를 충전하고 세탁기를 돌렸다. 그 날 집 안 여기저기를, 현관문과 1층 쓰레기 배출장소 사이를 몇 번이나 왕복했는지 모르겠다.


  일주일에 하루 이틀 사무실로 출근하는 요즘은 나름대로 적당한 밸런스를 유지하고 있다. 코딱지만 한 원룸이지만 일하는 공간과 식사하는 공간, 그 외의 공간을 확실하게 구분한다. 물론 일할 곳과 식사할 곳을 분리할 공간은 물리적으로 나오지 않기에 책상을 최대한 비워두고 일할 때는 노트북을, 밥 먹을 때는 음식이 담긴 그릇을 올린다.


  밥을 먹을 때도 그냥 먹지 않는다. 자고로 설거지 물량 최소화를 위해 프라이팬에 든 통째로 음식을 먹거나 포장용기에 든 그대로 먹는 것은 자취생의 철칙. 하지만 요즘은 만든 음식을 하나하나 예쁘게 담아서 눈으로 즐긴 뒤 입으로 넣는 '온전히 먹기'를 실천하고 있다. (이런 방법이 우울증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본 것 같기도) 다 먹은 뒤 한 끼 차리는 데 사용한 그릇 딱 그만큼만 바로 설거지를 하고 나면 얼마나 개운한지 모른다.


(왼쪽부터) 간단한 아침 요거트, 점심으로 먹은 돼지고기앞다리살팽이볶음, 직접 구운 아몬드스콘


  최근에는 베이킹도 시작했다. 오븐을 둘 만한 공간은 없어서 자취생의 구원자 에어프라이어의 힘을 빌린다. 답답함(이것도 일종의 포비아였을까)과 외출 폭주가 끝난 뒤 나에게 남은 약간의 부산스러움과 적당한 부지런함을 앞으로 어떻게 더 잘 활용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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