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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성 Jun 06. 2024

읽지 못하는 세대

집에 있는 TV가 제구실을 하지 못한 지 오래다. 심심할 때 리모컨으로 이 채널 저 채널 돌려보는 것 말고는 TV프로그램을 거의 안 보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넷플릭스나 유튜브 영상을 큰 화면으로 보기 위한 장치로서의 역할 정도만 하고 있다. TV의 시청률이 높았던 장면들은 하루만 지나도 기사로 나오거나 SNS에 올라온다. 커다란 이슈를 불러오거나 웬만한 자극을 주지 않는 이상 사람들을 TV앞으로 불러 모으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당신의 문해력’을 본 것도 스마트 폰으로 우연히 접한 짤막한 영상 때문이었다. 3분 정도밖에 되지 않는 짧은 영상이었지만, 이미 종료된 프로그램 모두를 다시 보기로 찾아보게 될 만큼 큰 파급력이 있었다. 직업적 특성상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만날 기회가 많은데,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들과 그동안 이들을 관찰하면서 들었던 의문점의 핵심을 정확하게 짚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략 5~6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관찰하게 된 현상인데, 학교 현장에서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만날 때 내가 하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친구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코로나 시국이 되면서 이 사태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명확한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고 고심하고 있던 차에 이 프로그램을 통해 그 이유가 ‘문해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글을 읽고 의미를 이해하는 능력’이라는 뜻을 가진 문해력. 처음 듣는 말은 아니었지만 자주 쓰지는 않고 있던 단어였다. 하지만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뿐이지 이미 오래전부터 관심이 높아지고 있던 주제였으며, 세계 각국에서 미래의 핵심역량으로 주목하고 있던 능력이었다. 디지털 시대에 영상이 보편화되는 것과 맞물리면서 전 세계가 어린이와 청소년을 포함한 전 연령의 문해력 하락을 경험하고 있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들을 모색하고 있었다.


읽지 못하는 아이들

 

이런 상황 속에서 ‘당신의 문해력’ 프로그램의 1부에서 던지는 질문과 메시지는 매우 시의 적절했다고 본다. 1부는 본 프로그램의 서곡으로, 현재 우리나라가 맞이하고 있는 문해력 저하 현상을 정확하게 짚어주고 앞으로 방송이 어떤 부분을 다룰 것인지 소개한다. 연예인과 전문가를 포함하여 6명의 사회자와 패널이 지루하지 않으면서도 상당히 심도 있게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그랬던 것처럼 1부를 보면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문해력 저하 문제가 어린이, 청소년들만이 아닌 어른들에게도 심각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프로그램 제작사인 EBS가 성인남녀 88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문해력 평가에서 나온 평균점수는 54점 밖에 되지 않았다. 많은 성인들이 일상생활에서 글을 읽고 의미를 이해하는 데 있어 어려움과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디지털 기기와 함께 살아온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그 정도가 더 심하다.

 

전국 중학교 3학년 2,405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에서는 문해력이 적절한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비율이 27%였고, 그중 11%는 초등학생 정도 수준밖에 되지 않는 문해력을 가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산술적인 수치보다 더욱 놀라움을 주었던 것은 교실 풍경이었다. 영어와 역사 수업 시간의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모르는 단어들이 많다 보니 수업을 따라가기가 어렵고 흥미를 쉽게 잃어버리는 친구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경험상 이 장면은 방송을 위해 과장된 모습이 절대 아니었다. 실제 학교 현장에서 방송보다 더 심각한 경우를 많이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걱정스러움을 넘어 두려움까지 느낄 수 있는 심각한 문제제기로 1부가 시작되지만, 이 문제를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과 함께 구체적인 방법들이 제시된다. 이것은 이 방송이 본래 가지고 있던 기획의도이기도 하다. ‘문해력 저하’라는 이 시대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파악하고 ‘소리 내어 글 읽기’라는 설득력 있는 대안을 마련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 방송을 준비하는 데 1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2부에서 5부에 걸쳐 진행된 총 4개의 프로젝트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2부 ‘공부가 쉬워지는 힘, 어휘력’ 편에서는 중학교 남학생 6명과 선생님이 함께 진행한 어휘력 향상 프로젝트의 진행과정과 결과를 보여준다. 3부 ‘학교 속의 문맹자들’ 편에서는 선생님이 문해력 저하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생들과 1:1 지도를 통해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를, 4부 ‘내 아이를 바꾸는 소리의 비밀’ 편에서는 엄마들이 12주간 자녀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시간이 자녀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보여준다. 5부에서는 중학생 4명과 선생님이 한 학기 동안 책을 읽고 토론하는 프로젝트를 소개한다.

 

프로그램의 백미는 이 프로젝트들에 있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할 때 전문가의 의견을 듣거나 다른 기관의 사례(특히 해외)를 가져오는 것이 대부분인데, 이 프로그램에서는 이론적으로 정리된 내용들이 실제로 효과를 발휘하는지 직접 해본다. 흥미로운 점은 각 프로젝트를 수행한 주체가 이론가들이 아닌 실제로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만나는 교사나 엄마와 같이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 사람들이 문해력 향상을 위해 다양한 프로젝트를 직접 수행하고, 각 편의 패널로 등장하여 진행했던 과정을 들려주는 장면들은 프로그램의 유익함과 즐거움을 한껏 더한다.

엄마들이 자녀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프로젝트의 경우 언어 전문가가 아닌 일반 사람들도 꾸준히 소리 내어 글을 읽어줄 때 자녀들의 문해력 향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시청자들의 의식과 행동에 변화를 이끌어 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확신이 든다. 아빠가 함께 책을 읽어주면 상호작용의 수가 많아지면서 자녀들의 문해력 상승에 더욱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대목에서 나도 용기를 내어 책을 읽어주겠다는 다짐을 했기 때문이다. 


디지털시대, 굳이 읽어야 하나요?

 

가장 흥미 있게 봤던 편은 5부다. 지금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스마트 폰이 있었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디지털 기기를 보유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정보를 습득하는 데 있어 영상에 많이 의존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영상을 보는 것이 책을 읽는 것보다 더 방대한 양의 정보를 쉽고 빠르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5부에서는 이에 대한 실험을 진행하는 데, 같은 내용을 받아들일 때 책을 읽는 것과 듣는 것, 영상을 보는 것 중 책을 읽었을 때 정보처리와 상위인지를 담당하는 전전두엽이 가장 활성화되는 결과를 보여준다.

 

즉, 글을 읽었을 때 뇌가 가장 능동적으로 반응을 하며, 이는 디지털 시대에도 읽는 활동을 영상을 보는 것으로 대체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오히려 계속 자극적인 매체에 노출되고 손쉽게 정보를 얻는 행위가 문해력을 낮아지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아울러 문해력은 제때 성장시키지 못하면 그 격차가 시간이 갈수록 커지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읽기 훈련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많은 사람들이 책 읽기의 중요성은 잘 알고 있지만 실천에는 어려움을 겪는다. 그래서 책을 직접 읽지는 못해도 영상으로 지식 습득을 대신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험 결과와 같이 영상시청은 독서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본 프로그램이 현대사회에 꼭 던지고 싶었던 중요한 메시지였다는 생각이 든다. IT산업을 선도했던 빌 게이츠가 자녀들의 스마트 폰과 인터넷 사용을 엄격히 제한하고 독서와 운동을 권장했던 것처럼 말이다.


“행복했어요.”

 

프로젝트에 참여한 한 청소년이 행복했다고 이야기하는 장면이 잊히지가 않는다. 아동, 청소년의 행복지수가 OECD 최하위권인 우리나라에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청소년을 만난 게 너무 반가웠기 때문이다. 문해력 상승은 단순히 아이들의 시험성적만 상승시켜 준 것이 아니었다. 휴대폰 사용 시간을 줄여주었고, 자신감과 자존감을 회복시켜 주었으며, 학습 부진을 딛고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우리나라 청소년 문제의 많은 부분들이 문해력 향상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느낌표! 책을 읽읍시다.’와 같이 책 읽기를 권장하는 TV프로그램들은 더러 있었다. ‘우리말 겨루기’와 같은 프로그램은 일반인들의 어휘력 향상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심지어 뉴스에서도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문해력 실태를 꼬집는 취재와 분석들을 볼 수 있다. ‘당신의 문해력’은 문해력 저하에 대한 현상을 정확하게 분석한 뒤, 의지를 가지고 이 부분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다른 프로그램들과 차이가 있다. 4차례에 걸쳐 진행된 프로젝트를 통해 변화를 보여준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프로그램의 역량과 정성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프로그램이 모든 면에서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진행했던 프로젝트들의 과정을 너무 멀리서 조망했던 아쉬움이 있다. 꽤 오랜 기간 진행했던 프로젝트였음에도 불구하고 교사와 학생, 부모와 자녀 사이에 일어났던 상호작용을 너무 짧고 피상적으로 보여주었다. 프로젝트가 항상 성공적이고 의도된 대로만 진행되지 않았을 텐데 진행 중에 벌어졌던 다양한 시행착오의 모습들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프로그램 메시지의 핵심인 소리를 내어 책을 읽어주는 것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기도 했다. 주 시청자인 부모가 가장 궁금해하는 ‘어떻게?’에 대한 내용이 다소 추상적이었다. 상호작용을 많이 하면서 글자가 아닌 내용을 중심으로 읽어주어야 한다는 지침 정도만 있을 뿐 실제로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행동요령은 제시되지 않았다. 필자 또한 책을 읽어 주는 것에 어려움을 많이 느끼고 있던 터라 꼭 알고 싶었던 부분이지만 이에 대한 정보는 프로그램에서 충분히 제공되지 않았다.

 

하지만 방송 홈페이지가 부족한 부분을 많이 보완해주고 있다. 연중 캠페인으로 ‘매일 소리 내어 읽어주세요. 아이의 미래가 바뀝니다.’를 진행하고 있고, 프로그램이 끝난 지 7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가족들의 참여가 이어지고 있다. 영아부터 초등학교 입학 전 유아를 둔 부모가 소리 내어 책을 읽어주고, 그 모습을 촬영하여 홈페이지와 SNS에 공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엄청난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많은 후기들이 올라와 있다. 이 후기들은 누구나 볼 수 있으며, 소리 내어 책을 읽어주는 다양한 방법들을 참고할 수 있다. 

 

좋은 프로그램은 건강하고 긍정적인 행동을 이끌어낸다. 한때는 TV프로그램 하나로 전 국민이 차량 정지선을 지키던 때도 있었다. 그만큼 TV프로그램의 영향력이 컸었던 시절이었다. 대중매체의 수가 증가하고 TV시청 시간도 줄어든 이때에,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을 넘어 사람들의 자발적인 캠페인 참여까지 이룩해 낸 제작진에게 큰 감사와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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