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식 없는 병실
2016년 1월, 나는 양극성장애(일명 조울증) 1형 진단을 받았다. 그 무렵 내 증상은 이랬다. 과거에 겪은 크고 작은 상처들이 마치 오늘의 생채기처럼 느껴졌고, 그 쓰라림은 타인을 저격하는 SNS 포스팅으로 줄줄이 이어졌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술을 마셨고, 하루에 30분을 자도 피곤하기는 커녕, 알에서 깨어난 것처럼 개운하고 상쾌했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가리지 않고 숨쉬듯이 연락을 돌렸고, 때로는 비난을 퍼붓기도, 때로는 용서를 빌기도 했다.
나만 정상이고, 모두가 비정상 같았다. 나만 착하고, 모두가 나쁜 것 같았다. 그런 내게 병식(病識)이 있었을 리가. 대다수는 나를 피했고, 일부는 나를 걱정했고, 극소수는 내 얘기를 들어줬다. 그중 내 편에 서준 000형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너, 00이 알지? 그 친구가 000대 병원에 있는데... 너랑 얘기 좀 해보고 싶대." 이럴 수가. 내가 그렇게 의지해온 이 형마저, 날 이상한 놈 취급하는 걸까? 의심이 앞섰지만, 누구보다 나를 아끼는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마음을 열었다.
00이는 대학 동아리 친구였다. 실은 얼굴, 이름만 안다 뿐이지, 제대로 대화를 나누어본 적도 없었다. 솔직히 안 내켰다. 내가 왜 이제 와서, 이 친구랑, 이런 얘길 해야 하지? 전공의라면 나를 환자 취급할 게 빤한데. 결국 병원 가란 소리밖에 더 할까? 그런데 막상 말을 해보니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차분하고 온화했다. 그동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좋은 교수님이 계신데, 한번 만나보면 어떻겠냐고, 000형처럼 아주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그렇지 않아도 이 사람, 저 사람 진료를 권하던 차. 000형에 이은 00이의 드라이브로 결국 나는 영업을 당했다. 갔다. 내 두 발로 당당하게. 조증 삽화 시기였기에 더더욱 그랬을 터. 소개 받은 000교수님을 만났고, 속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 이야기를 들어주시긴 했지만, 관심은 나라는 사람이 아닌, 내 증상에만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지금 내 상태에 이유가 있다고 주장했지만, 어떻게 하면 나를 입원시킬까에만 집중하는 듯했다. 교수님은 가족을 소환해 설득시켰고, 전공의를 동원해 회유시켰다. 어떡하지. 점점 입원 쪽으로 기울어간다...
더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아차! 여기 정신과지. 그럼 내가 그 무시무시한 곳으로 가는 건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무대로 빨려들어가는 건가? 미칠 것 같았다. 10여 년 전, 폐쇄병동에 입원을 하셨다, 결국 세상을 떠난 내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살려달라고, 제발 폐쇄병동만은 피하게 해달라고, 친형에게 애원했다. 형이 힘을 써줬다. 개방병동에 입원하는 쪽으로 협의가 됐다.
주섬주섬. 홀로 지내던 오피스텔에서 필요한 것들을 챙겼다. 몇 권의 책과 속옷, 모니터링 헤드셋(굳이?)까지. 나는 간다, 세상이여... 그렇게 도착한 병원. 첫날엔 3인실로 갔다. 무료한 하루를 보내고, 약을 먹고 자려는데, 두 사람이 다투기 시작했다. 쌍욕도 튀어나왔다. 너무너무 거슬렸다. 내가 정신 때문에 여길 왔는데, 정신이 나자빠질 것 같았다. "1인실로 옮겨주세요." 요구는 받아들여졌고, 셋째 날부터 나름 포근한 나만의 방을 쓰게 됐다. 치약도 놓고, 비누도 놓고, 살림하듯 방 정리를 했다.
잠만 제대로 자도(재워도), 초기 조증은 어느 정도 잡힌다. 그 역할을 약이 한다. 내 마음을 털어놓는 것, 누군가 귀 기울여주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그 역할을 상담이 한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최소화하고, 가벼운 운동을 하며 규칙적인 하루를 보내는 게 좋다.
입원 초, 약물 치료에 대한 거부감이 없진 않았지만, 믿어보기로 했다. 또 하나 신경 쓰였던 건, 전공의라는 사람이 정말 시간 단위로 폐쇄병동 입원을 강요했다는 것. 하지만 난 흔들리지 않았다. 혹시라도 약점이 잡힐까, 감빵의 모범수처럼, 병동의 모범환자로 보이려 애썼다.
웃긴 건 간호사 선생님들의 반응이었다. 대체 내가 왜 입원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 내가 그냥 밝은 사람 같다고 했다. 이런... 이 공간, 이 공기가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나 환자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