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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빛빛빛 Apr 12. 2018

가상공간에서의 몸 이야기

앞 장에서 예로 든 사이버펑크 장르의 작품 속에서 사이버 섹스는 신경계를 직접 컨트롤하는 방식으로, 가상 공간에서의 비물리적인 경험을 주로 다루고 있다. 지금까지는 단지 머릿 속 상상만으로(사실은 신경을 건드리는 것이라 상상은 아니다) 이뤄지는 교류방식이 현실의 것을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들이 많았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 햅틱Haptic 기술이 주목을 받기 시작하고 비물리적인 상상력에 ‘촉감’이 입혀지면서 더욱 더 그럴듯한 시나리오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햅틱이란 그리스어로 ‘만지는’ 이라는 뜻의 형용사인 ‘haptesthai’에서 온 용어로, 인간의 오감 중  촉감이라는 채널을 통해 기계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기술이다. 시각과 청각을 통한 상호작용은 컴퓨터로부터 사용자에게 가는 단방향의 정보의 흐름을 갖지만, 촉각을 통한 상호작용은 정보와 더불어 에너지를 양방향으로 주고받기 때문에 복잡하고 민감한 작업들을 감각적으로 수행할수 있는 커다란 장점을 가지고 있다.[1]


초창기에 주로 로보틱스 분야에서 활용되어오던 햅틱 기술은 점차 컴퓨터 그래픽스와 가상 현실 분야로 연구 분야를 확대하고 있다. 휴대폰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비언어적인 감정을 터치 행위와 촉감 패턴 피드백을 이용해 주고 받는 방법들은 이제 실현이 가능한 기술이 되었다. 이렇게 가상 현실 속의 인터랙션이 훨씬 더 구체적이고 감각적이 되면서 이제는 ‘탈육화된 환경’이란 가상 공간의 정의를 새롭게 따져봐야 할 것 같다.

 

SF가 아닌 실제 일어난 이야기 하나를 예로 들어보려 한다.


2016년 10월, 미국 블로그 서비스인 미디엄medium에 VR 게임 QuiVR의 한 유저가 글 하나를 올렸다. 글을 쓴 이는 조던 벨라이머Jordan Belamire라는 여성 작가. 그는 우연한 기회로 가족들과 함께 활을 쏘아 좀비를 쓰러뜨리는 컨셉의 액션 캐주얼 장르인 QuiVR을 플레이하게 된다. 그는 가상현실 게임이라는 새로운 상황에서 엄청난 몰입감을 느꼈고, 신과 가까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놀라운 경험에 흠뻑 빠져들게 되었다.

 

나는 탑 가장자리에서 서서 100 피트는 되는 듯한 높이의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높은 곳에 대한 두려움이 강하게 밀려들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끝에서 한 걸음을 내딛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넘어지지 않았고 공중을 걷고 있었다. 나는 신이었다. 가상 현실이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한껏 신이 난 벨라이머는 그 곳에서 BigBro442라는 유저를 만난다. 그는 BigBro442와 팀을 이루어 좀비를 물리치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그런데 BigBro442가 갑자기 방향을 틀더니 벨라이머의 가슴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벨라이머는 멈추라고 말하며 돌아서서 피하려고 노력했으나 자신을 계속 따라다니며 몸을 더듬고 꼬집는 그의 행동에서 이전 현실 속에서의 성추행 경험이 떠오를만큼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것은 심지어 그의 남편과 시동생이 빤히 보고 있는 눈 덮힌 언덕에서 일어난 일이다.

 

100 걸음의 높이가 설득력있게 느껴졌던것과 동일하게 가상에서 더듬는 것도 진짜처럼 느껴졌다. 물론 실제로 육체적 접촉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내가 실제로는 땅에서 100 피트 떨어져 서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중략) 나는 추락하지 않는 신에서 빅브로442라는 이름의 아바타에게 쫓기는 무력한 여성으로 변했다.


그가 쓴 이 글은 미국 사회에서 큰 이슈가 되었다. 물론 이전에도 온라인 및 게임 커뮤니티에서의 시각적, 언어적 폭력성은 꾸준히 제기되어 왔지만 신체적으로도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고 그것이 현실 세계로 넘어와 피해자의 정신을 뒤흔들 수 있다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큰 공포로 다가왔다.

(포스팅 전문과 관련 보도는 아래 링크에서 볼 수 있다)



실제가 아닌 잠재적 공간, 위험이 없고 안전한 환상의 공간으로 여겨지던 ‘가상’ 공간에도 이제 현실의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 수록 실제의 몸과 가상 공간 속 몸의 경계는 흐릿해질 것이고, 어쩌면 우리가 오늘 사랑을 나눈 곳이 현실이었는지 가상이었는지 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아주 피곤해지거나 지루해질 것이고 결국 늘 그래왔듯 또 다른 해방감을 갈구하며 새로운 세계, 미지의 존재를 만나기 위한 노력을 준비할지도 모르겠다.


다음 글에서는 인간과 인간의 소통이 아닌,

인간과 기계, 그리고 기계와 기계의 소통과 결합에 대해 생각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참고

[1] 햅틱의연구동향과응용, 대한기계학회 기계저널 제47권 제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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