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개봉한 영화 『데몰리션 맨』에는 헬맷을 쓴 두 남녀가 눈을 감고 가상섹스를 즐기는 장면이 나온다. 2032년의 여자 경찰 레이나는 1996년 과거에서 온 스파르탄이 “옛날 방식이 더 나은 것 같다”고 이야기하자, 경악하면서 질문한다.
"구역질 나는군요! 액체 관계 말이죠? 그 방식은 이제 안 써요. 체액 때문에 어떻게 되는 줄 알아요? 체액 교환이 사회 몰락의 원인이라고요! 에이즈 다음에 NOS, NOS 다음에 UBT! 콕도 박사가 처음에 한 일이 액체 전이 불법화예요.”
컴퓨터를 매개로 성적 결합의 욕망은 뉴웨이브 운동이 대두되던 1960년대의 작품들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격변하는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며 전위적인 실험들을 시도하고자 했던 뉴 웨이브 SF는 과학기술적 방법론으로 구축된 세계를 묘사하는 데 가장 큰 무게를 둔 이전의 작품들과는 달리,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을 탐구하며 세계에 대한 인간의 정의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또한 당시 급격히 대두되었던 인권운동과 페미니즘, 동성애, 히피 운동 등의 성혁명과 섹스, 마약 등에 탐닉하던 젊은 세대의 문화가 맞물려 이전 SF에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던 성에 대한 모티브가 발현되기 시작했다.
뉴웨이브 다음 세대, 사이버펑크적 감성을 지닌 젊은 작가들은 이러한 자유를 실현시킬 수 있는 무대로 사이버스페이스를 발견해냈다. 1980년대 정보통신과 컴퓨터를 주축으로 한 하이테크놀로지의 발달과 함께 시작된 사이버펑크 운동은 인간과 컴퓨터의 결합으로 창조되는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전위적인 실험들을 추구했다. 이들이 그린 가상 세계는 유동적이고 개방적인 문화가 형성되는 자리로 카스텔(M. Castells)이 정의한 “흐름의 공간”이며 혼성과 잡종과 변이가 일어나는 공간이다. 철학적 의미에서 가상적이라는 것은 실제적이 아닌 잠재적 힘으로만 존재하는 것으로 그것은 곧 힘과 문제의 영역으로서 실현(actualization)을 통해 해결되는 경향을 갖는다고 한다.[1] 탈현대적인 양상에 대한 새로운 비전이 필요했던 사이버펑크 시대의 젊은 작가들이 실현을 담보를 한 또 다른 세계를 찾아 나섰던 것이다.
가상공간에서의 성적 탐구는 어떤 대상과 상호작용 하느냐에 따라 몇 가지 방식(-인간과 인간, 인간과 기계, 기계와 기계)으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먼저 『데몰리션 맨』처럼 가상 체험 기술을 이용해 인간과 인간이 성적인 관계를 맺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영화 『바바렐라』에서 바바렐라와 딜다노가 손을 맞대고 눈을 감은 채 성관계를 하는 것이나 『론머맨』에서 조브 스미스가 이웃집 여성과 가상현실 장비를 착용하고 육체적 접촉 없이 시각 이미지를 전달하는 성관계를 맺는 것도 같은 방식이다.
이러한 상상들은 공통적으로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섹스가 성병이나 바이러스, 임신의 가능성 등의 위험으로부터 분리되어 쾌락과 유희를 즐길 수 있는 방식으로 진화될 것임을 은유하고 있다. 이른바 세이프safe 섹스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생식에서 자유로운 성관계는 파트너를 선택할 때도 훨씬 자유롭다. 수명 연장으로 인해 이백 살쯤은 거뜬히 넘기는 시대, 인구 과잉으로 산아를 조절해야 하는 일이 발생해도 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클라우디아 스프링거가 ‘가상섹스’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인용해보자.
실상 인간 육체는 대규모의 파멸 가능성에 직면해 있다. 에이즈, 환경 재해, 핵전쟁 등이 개인들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을 멸망시킬 위협을 가하는 것이다. 폐기 처분에 직면한 인간이 불완전하고 연약하며 사멸할 수밖에 없는 육체의 부담 없이 순수한 지성으로 재구성될 미래로 자신들을 투사해 위안을 구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육체를 포기하는 환상이 육체적 쾌락까지 포기하지는 않는다. 대신 역설적으로 그것은 섹슈얼리티를 고양시킴으로써 육체 없는 미래가 예외적으로 강렬한 성적 만족을 제공할 것을 약속한다. 그것은 위험이 없는 고양된 충족의 환상이다.
클라우디아 스프링거, 『사이버 에로스』 중에서
프레데릭 폴Frederik Pohl의 『데이 밀리언Day million』은 결혼식을 마친 두 연인이 각자의 별로 돌아가 아날로그 장치를 통해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는 이 소설에서 오십 광년 떨어진 공간 사이에서 두 사람이 어떻게 소통하는지를 유쾌하게 묘사한다.
데이 밀리언에 사는 성전환 소녀 도라는 수영을 하다가 우연히 처음 본 남자 돈을 만난다. 인공두뇌와 기계 심장을 가진 우주 여행자 돈은 휴가를 보내기 위해 잠시 지구에 들른 것이었다. 도라와 돈은 서로를 보고 첫눈에 반해 결혼을 약속한다. 결혼식 당일, 서로의 신원이 녹음되고 저장되는 기호해독실에 모인 두 사람은 친구들의 축복 속에서 사랑을 맹세한다. 그리고 둘은 정확하게 입력된 아날로그 장치를 교환하고 헤어진다.
도라는 자신의 해저 거주지로 갔고 돈은 자신의 우주선으로 날아갔다. 둘은 그렇게 먼 곳에서 아날로그 장치로 서로를 가진다. 아날로그 장치에는 서로의 버릇과 뉘앙스, 섹스의 쾌감, 뜨거운 키스의 느낌 등이 모두 입력되어 있다. 서로를 원할 때면 장치를 작동시켜 서로를 복원해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프레데릭 폴은 이 단편의 끝에서 28세기의 사랑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들에게 반문한다.
“여러분들은 나를 바보이며 정말 미친 작자라고 말하며 비웃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애프터 셰이브 로션을 바른 채 작고 빨간 차를 타고 나가서 온종일 책상 위에서 서류와 씨름하다가 밤새도록 여자 꽁무니나 따라다니는 여러분들이 한번 말해보세요. 여러분은 털이 부슬부슬한 직립 유인원들이나 불을 처음 보고 놀라 자빠졌던 원시인들이 어떤 사랑을 나누었다고 생각합니까?”
프레데릭 폴, 「아날로그 사랑」, 『사이버섹스』중에서, 원제는 「Day Million」이다.
한편, 시간과 공간이 무한하게 확장된 배경 속에서 벌어지는 미래 사회의 성관계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식을 띌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남성과 여성, 인간과 기계의 역할과 책임이 모호해지면서 섹슈얼리티의 작용 방식 또한 달라지게 됐다.
가상공간이라는 익명성 역시 이러한 자유를 보장해준다. 탈육화된 환경에서 자신의 정보를 드러내지 않고, 혹은 완전히 다른 새로운 자신을 이용해 성적 체험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구체적이지 정의되지 않은 상대를 탐닉하는 일은 무한한 환상을 제공한다.
“욕망은 익명적 정체성의 안락한 안전에 힘입어 전자적 영역 속으로 해방될 수 있다”는 클라우디아 스프링거의 말은 적절해 보인다. 그녀에 의하면 우리는 엄마와 자궁을 의미하는 라틴어 mater에서 기인한 매트릭스 속에 자신의 의식을 놓음으로써, 인간은 안락한 안전으로의 은유적 도피라는 스릴을 느낀다. [2]
조지 앨록 에핑거George Alec Effinger의 소설 『느리게, 느리고 뜨겁게Slow, Slow and Burn』에는 전 국민의 환상을 충족시켜주는 인물인 허니 필라르가 나온다. 그녀는 미래 시대에 남성의 성적인 욕망을 채워주는 인간 모듈의 스타다. ‘뇌파를 뜨겁게 달구는 100대 영화’ 차트에 여덟 개의 타이틀을 올렸고 대부분 남자들의 책장에는 수십 편의 허니 필라르 시리즈가 진열되어 있다. 남자들은 침대에 누워 자신의 정수리에 장치된 접속 플러그에 그녀의 모듈을 다운로드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꿈속에서 이 시대 최고의 여성과 짜릿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사실, 허니 필라르는 그렇게 행복한 여성이 아니다. 그녀의 남편인 키트도 그녀와 사는 게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 재미있는 것은 그녀의 모듈을 사용하는 국민들도 그녀의 남편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듈을 가진다고 하여 그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지만 그녀를 실제적으로 소유하여 파괴될 환상을 인식하고 있다. 그녀의 모든 정보를 아는 것보다 그녀의 잠자리에 대한 지식만을 가지고 환상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법인 것이다.
참고
[1] P. Levy, 2000 『사이버 문화-뉴 테크놀로지와 문화협력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문예출판사. 김남옥 『고도 기술사회에서의 세계와 몸의 변증법』, 한국사회학회 2007에서 재인용.
[2] 클라우디아 스프링거, 『사이버 에로스, Electronic Eros』, 한나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