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프와 홍대의 한 서점에 갔다가 제목에 혹해서 집어든 책. 서점에서 잠깐 훑었는데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이북으로 단숨에 읽었다. 리디셀렉트를 구독하기 시작한 이후로 내 독서 패턴은 대략 이런 식인듯. 문체 때문인지 작가의 통통 튀는 필체 때문인지 가볍게 술술 읽으면서도 여러 생각할 거리를 주어서 좋았다. 요즘에 많이 고민하고 있는 고민들이기도 하고. 인상깊었던 부분들을 발췌해봄.
"인격자, 리더, 세계사의 위인들, 일일드라마의 주인공들이라면, 그런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믿고 ‘난 할 수 있다’며 결의를 다지겠지. 나는 그런 훌륭한 인간이 못 되었으므로 끊임없이 번민했다. 내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내가 옳은 선택을 한 걸까?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마흔이 되어서까지 그런 걸 고민한다는 게 이상했다."
"솔직히 말하면 부모님과 HJ를 설득해서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고 사랑하게 만들 자신이 없었다. 1, 2년으로 될 작업이 아니었다. 양측에 최소한 3년은 전력을 다해야 할 것 같았다. 그 3년간 아마 나는 HJ에게 부당한 비난을 받고, 부모님의 무리한 요구를 웃어넘기며 진이 다 빠지고 말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신자유주의가 어쩌고 시민 불복종이 어쩌고 코스프레를 하지만 시누이에게는 입도 뻥긋하지 못하는 겁쟁이들. 추상적인 적을 상대할 때에만 저항 정신을 열변할 수 있는 비겁자들. 그래서 자꾸 거대한 상상의 적을 만들어내는 음모론자들."
"자식이 위험에 빠지길 바라는 부모는 없다. 그런데 모험에는 언제나 위험이 따른다. 그러므로 자식에게 모험을 권하는 부모도 없다(선량한 부모들이 자식에게 모험을 허락하는 순간은, 자식에게 닥칠 최악의 위험도 자신들이 수습할 수 있을 때이다. 그래서 부자 부모 아래서 자란 젊은이가 더 많은 모험을 누리게 되고, 더 진취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게 된다)."
"그 이유는 아마 정체성 문제에 관한 한, 한국인들이 정신적으로 허약해서라고 생각한다. 자기 삶의 가치에 대해 뚜렷한 믿음이 없기에 정체성을 사회적 지위에서 찾는 것이다. 사회적 지위는 대학 간판이나 자식 결혼식장에 모인 하객 수로 구체화된다. 그래서 다들 거기에 집착한다."
"신세계를 찾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될 수 있을까? 끊임없이 직업을 바꾸고, 분기마다 새 취미에 열정적으로 도전하며, 어딘지 모를 이상향을 찾아 쉴 새 없이 떠돌아다니는 삶이 바람직한 걸까? 그걸 낭만이라고 포장하는 건 시시한 사기 아닐까. 그것은 기실 그 사람의 세계가 그만큼 황량하고 별 볼 일 없음을 폭로할 따름이지 않은가. 어느 정도 날씨가 괜찮고 마실 물과 식량이 있는 평평한 땅을 찾으면 방랑을 멈추는 게 정상이다. 거기에 건물을 짓고 사람을 불러 모아야 한다."
"인간은 열정을 금방 잃고, 섹스의 가능성이 있는 타인을 향해 수시로 한눈을 팔며, 오래도록 한 가지 대상에 충실할 수 없는 존재다. 그것이 해방된 상태의 인간이다. 결혼은 그런 자연스러운 충동을 억압해서 허구의 가치를 만들어낸다. 운명적 사랑, 백년해로라는 개념을. 우리는 운명을 구속함으로써 운명을 만든다. 허구와, 허구가 만들어내는 구속을 받아들일 때 의미 있는 삶이 시작된다."
"나는 이 여행이 인생에 대한 비유와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정의 중반을 넘기고서야 어떻게 하면 시간을 의미 있고 즐겁게 보낼 수 있는지 알게 된다. 다시 한번 처음부터 시작하면 진짜 잘할 수 있는데, 생각하면서."
"우리는 즉물적인 쾌락을 맛볼 때도 실은 무의식중에 비용 대비 편익을 계산한다."
"그 전까지 우리는 부부 간의 사랑이 어떤 바다 같은 거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바다는 가만히 있어도 그 위로 비가 내린다. 땅에 내리는 비도 이러저러한 물 순환의 단계를 거쳐 결국 바다로 돌아온다. 결혼이라는 약속은 사회적으로, 또 개인적으로도 상당한 구속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어지간한 갈등을 무마시키는 힘이 있다. 그럴 때면 사소한 싸움도, 물이 바다로 돌아오는 과정처럼 보인다. ‘칼로 물 베기’ 어쩌고 하는 속담도 그래서 나온 것이리라. 하지만 실제로는, 그 구속력은 물 순환을 일으키는 자연의 힘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약하고 예외가 많다. 우리의 사랑은 바다보다는 호수에 가까웠다. 호수의 수량을 유지하려면 강에서 물을 계속 공급받아야 한다. 노력을 들여 강의 흐름과 유량을 섬세히 관리하지 않으면 어느 날 갑자기 호수의 수위가 쑥 낮아질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