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면대에서 빨랫비누를 한 달에 한 개씩 쓰는 남자
"직장에서 지저분해진 기분까지 박박문질러 지우고 있습니다"
얼마 전 쿠팡으로 빨랫비누를 주문하다가 '내 나이에 빨랫비누 주문하는 남자가 있을까?'라는 생각에 웃음이 났습니다.
저는 한 달에 빨랫비누를 한 개씩 쓰는 결혼생활 18년 차, 사회생활 20년을 앞둔 낡은 직장인입니다. 중년 직장인이 욕실에서 빨랫비누를 쓰는 이유는 매일 밤 욕실 세면대에서 옷을 빨기 때문입니다. 속옷이나 양말이라고 생각하셨다면 오산입니다.
저는 셔츠와 면티, 후드티, 정장바지를 비롯한 면바지, 아우터, 아이들 교복까지 욕실 세면대에서 빨래를 하곤 합니다. 물론 세탁 방법이 특별하거나 고가의 옷 등은 세탁소로 보냅니다. 하지만 고가의 옷은 거의 없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죠.
이런 습관은 사실 대학생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끼는 옷을 세탁기에 자주 돌리니 모양이 쉽게 망가지더라고요. 이때부터 새 옷이나 아끼는 옷은 세면대에서 손으로 빨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시작한 손빨래 습관이 조금씩 진화한 거죠.
거의 매일 빨래를 해대는 가장 큰 이유는 깨끗하게 빨아 입기 위해서입니다. 일주일 내내 셔츠와 넥탁이까지 매고 다니던 신입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때는 엄마가 셔츠를 깨끗하게 빨아서 일주일치를 빳빳하게 다려주셨죠.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세탁기를 능가하는 엄마의 수고가 어머어마하게 들어갔다는 사실을요.
결혼해 출가하고 셔츠 빨래는 세탁기가 맡았죠. 엄마가 해주신 것처럼 깨끗한 셔츠를 기대했지만, 세탁기는 목이나 팔목, 얼룩이 묻은 부분까지 완벽하게 세척하지 못했습니다. (엄마! 그땐 몰랐어요! 정말 감사했습니다) 처음에는 세탁소에서 해결했는데, 매번 몰아서 주말에 맡기다 보니 입을 셔츠가 늘 부족해 셔츠 수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샤워할 때 목이 더러운 셔츠를 칫솔로 살살 비벼가 빨기 시작했어요. 셔츠 목전용 브러시를 구매해 지저분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세탁했습니다. 김치 국물이나 기름 심지어 커피나 코피가 묻어도 제거할 수 있는 얼룩제거용 세정제까지 완비하고 세면대 세탁을 이어갔습니다. 아이들 교복 셔츠나 (당장 입을 게 없어 급할 때는) 바지도 욕실에서 세탁합니다. 다림질까지 풀코스로 대령하고 있죠.
가볍게 입는 (비싸지 않은) 여름용 정장 바지나 면바지, 니트도 세면대에서 간단하게 세탁할 수 있어요. 아끼는 니트가 늘어나거나 줄어든 경험이 있기에 두껍지 않은 니트는 손빨래를 시작했습니다. 니트 계열은 린스나 섬유유연제 등을 이용해 헹구고 수건으로 꾹꾹 눌러 눕혀서 건조하면 원하는 형태를 오래 유지할 수 있어요.
재킷 등 아우터는 부분 세척만 하고 전체 세탁은 세탁소에 맡깁니다. 새로 산 옷, 몇 번 입지 않은 옷에 무언가 묻으면 통째로 빠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런 경우 지저분한 부분에만 얼룩제거용 세정제를 사용해 세탁을 합니다. 새 옷 기분을 오래오래 누릴 수 있거든요.
면티나 폴로티 등의 손빨래는 이제 껌입니다. 요즘에는 일일 일 면티 세탁이 필요하기 때문에 샤워할 때 목부분 위주로 조물조물해 두고 나오기 전 헹궈서 널어놓습니다. 후드티는 때가 잘 타는 손목 부분이나 오염된 부분 위주로 세탁하고 탈수기를 짧게 돌리면 원래 모양을 오래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저는 욕실에서 빨랫비누, 섬유유연제, 얼룩제거용 세정제 등과 매일 만나면서 빨래하는 직장인이 되었습니다. 이 중에서 빨랫비누를 제일 많이 사용하고 있어요.
최근 딸아이가 베란다 보조 세면대에서 손으로 반팔 생활복(교복)을 빨고 있다라고요. 세탁기로 빨았는데 군데군데 지저분해서 다시 빠는 중이라고. 티도 종종 부분 세탁을 하고요. 부전여전입니다. 아이들 교육, 뭐가 됐든 부모의 솔선수범이 답 아닐까요.
손빨래는 이제 제 루틴이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귀찮은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루 동안 직장에서 더러워진 기분까지 박박문질러 지워버린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빨고 있습니다. 또 세탁소 다녀올 동안 기다리는 시간과 비용도 절약하고, 원하는 옷을 제때에 깨끗하게 입을 수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지속할 계획입니다.
낡은 직장인의 깃털 같지만 특별한 빨래 이야기였습니다. 깨끗하고 향기로운 빨래처럼 싱그러운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