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하지 못한 순간에 찾아오는 시련
1. “이거 더 네고 안 된다니?”
애칭 라인에 들어가는 소모품이었다.
난 그 제품의 구매 품의서를 막 올린 참이었다. 회사 관행상 어떤 제품이든 형식적으로라도 네고를 해야 결재가 떨어졌다.
마침 다른 일로 해당 업체와 통화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상사의 질문 한마디에,
“아, 지금 그것 때문에 전화하고 있어요.”
라는 말이 본능처럼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입을 열기 직전, 난 깨달았다.
이미 품의서를 올린 상황에서 네고를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걸.
추가 네고가 안 되냐는 질문이 마치 자신을 질책하는 말처럼 느껴졌고, 순간 얼토당토않은 변명이 떠올라 입 밖으로 나갈 뻔했다.
난 간신히 머릿속을 부여잡고
“더 해보겠습니다”라고 답한 뒤, 품의서를 회수했다.
이전에도 비슷한 순간은 여러 번 있었다.
자신이 한 일이 잘못처럼 드러날 기미가 보일 때, 팩트를 훼손하거나 말을 길게 늘어놓으며 문제를 피하려는 습관.
나도 알고 있다.
실수나 몰라서 저지른 일은 얼마든지 용서받을 수 있다는 걸.
문제는 알고도 숨기려 할 때다.
내가 가장 긴장하는 순간은 늘 같다.
자신의 부족함이 드러날 때다.
2. 현장에 있는 사람들
H기정은 현장 총괄이다.
자동화 라인이 쉰 개 가까이 들어선 2층에서는 하루에도 수십만 개의 부품이 생산된다.
며칠 전, 그가 요청했던 물건을 직접 들고 내려갔다.
없어도 당장 현장이 멈추는 건 아니었지만, 비싸다는 이유로 구매가 계속 미뤄졌던 부품이었다.
물건을 건네자 H기정은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고 있으니 그가 말했다.
“왜, 할 말 있어?”
난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요. 기정님 좋아하시는 모습 보니까 뿌듯해서요.”
H기정은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웃었다.
3. 우리 회사엔 옥상에 식당이 있다.
메인 반찬 하나와 몇 가지 반찬을 뷔페식으로 차린다. 식사 퀄리티는 꽤 괜찮은 편이다.
어느 날은 퇴근 시간이 겹쳐 식당 사장님과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게 됐다.
5층에서 1층까지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잠시 고민하다가,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사장님, 오늘 돈까스 맛있었어요.”
“아이구, 고마워요.”
사장님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난 종종 업무에 회의감을 느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자신이 가장 듣고 싶은 말을, 상대에게 건넨다.
그 말이 누군가의 하루를 조금이라도 특별하게 만들어주길 바라면서.
4. “우리 회사가 무슨 회사인지 아나요?”
면접 시간은 오후 세 시였다.
연차를 내고, 정오부터 회사 근처 카페에서 준비한 답변을 반복해 읊었다.
면접은 순조로웠다.
전공 질문엔 조금 버벅였지만, 면접관들은 크게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반쯤 벗겨진 머리, 얇은 눈, 웃음을 머금은 얼굴.
방 안의 공기가 단번에 바뀌었다. 기운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P사의 회장이었다.
“어, 뭐야 너. 신수 훤하네. 몇 살이야? 경력은?”
잠시 말을 잇더니 덧붙였다.
“노래 하나 해봐.”
난 웃었다. 농담인 줄 알았다.
하지만 노인의 눈빛은 매서웠다.
면접관들을 바라봤지만, 모두 고개를 숙인 채 책상만 보고 있었다.
이 회사에 들어오기 위해 면접을 보는 입장이었다.
이 상황이 일종의 테스트처럼 느껴졌다.
그래, 여기가 이런 회사라면 거기에 맞춰야지.
머릿속을 풀가동했다.
윤도현? 너무 젊다.
노인이 알 만한 노래가 뭐지.
약 2초 뒤, 나는 아버지가 좋아하던 노래를 떠올렸다.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였다.
“궂은 비 내리는 밤,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군가 부르듯 오른손까지 휘저으며 무반주로 불렀다.
기왕 하는 거, 제대로 하는 게 나의 성격이다.
회장은 박수를 치며 웃었다.
“그래! 이게 요새 문화야. 이렇게 꼰대처럼 앉아서 면접 보니 안 되는 거지.”
그리고는 만족스럽게 문을 닫고 나갔다.
답변을 준다던 P사는 끝내 연락이 없었다.
그 면접은 아직도 마음 한켠에 남아 있다.
그날, 홍시를 불렀다면 결과가 조금은 달라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