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기를 잃어가는 구만.
내가 일하는 생산기술부서에서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다.
공정 개선, 설비 관리, 선행 개발, 설비 투자, 공장 건축.
안 되는 것을 되게 만드는 부서가 우리가 있는 곳이다.
사람이 하던 일을 자동화로 바꾸고,
설비가 고장 나면 가장 먼저 뛰어가며,
관리 공차가 0.5mm에서 0.05mm로 바뀌면
업체를 쪼고 닦달해서라도 가능하게 만든다.
고객사의 말도 안 되는 갑질 앞에서도
NO 대신 방법을 찾아보는 부서.
지금 나는 세 가지 프로젝트를 맡고 있다.
플립폰 힌지의 강성을 높이는 설비,
정밀해진 사양을 트레이째 검사하는 검사 설비,
불량을 양품으로 만들기 위한 후공정 개선.
뭐 하나 쉬운 일이 없다.
우리는 늘 안 되는 일부터 시작한다.
내가 만든 지그에 들어가는 제품 사이즈가 바뀌었다는 요청이 있었다.
부서 전체가 참조된 메일에는 도면 파일이 아닌
다른 확장자 파일이 첨부돼 있었다.
파일이 잘못 온 것 같아 다시 보내달라고 했다.
다시 온 도면을 보니,
오히려 제품은 작아져 있었고
지그는 바꿀 필요조차 없었다.
도면을 안 본 거냐고 묻자
겸연쩍은 웃음만 짓는다.
교정기를 낀 채 벌어지는 입이 유난히 거슬린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나는 왜 열심히 하고 있는 걸까.
평소에도 욕을 먹고 다니는 K사원에게
굳이 망신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이런 식이면 저희 팀에 시간 손실이 커요.”
정중하게 말했지만
연신 반복되는 그의 사과에는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루를 하루로 끝내고 싶은 사람과
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그날 이후
나는 그의 전화를 한번에 받지 않는다.
인사도 예전처럼 하지 않게 되었다.
L수석은 국내 최대 대기업의 고객이다.
하청을 쥐어짜 성과를 외치는
요괴 같은 늙은이다.
비상식적인 요구가 반복돼
왜 그러는 거냐고 물은 적이 있다.
내가 일을 안 하려고 이러는 걸로 보이냐고.
그는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입장이라며
조금 당황한 목소리로 말한다.
빈정대는 말투에
주먹을 꽂고 싶은 날이 일주일에 다섯 번쯤 될 즈음,
C이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건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멘탈이 털린 내게 그날 밤 그는 술을 사주며 말했다.
모든 짐을 혼자 짊어지려 하지 말라고.
그럼 자신은 왜 있겠냐고.
사업성 없는 개발에 매달리고,
치고 올라오는 후임들에게 밀려
히스테리를 부리는 L수석이 가엾지만
한편으로 그가 존경스러웠다.
그는 적어도 자기 일에는 진심이 느껴지니까.
K과장은 나를 좋아한다.
“이제 넌 나만큼 해.”
빈말 못 하는 사람의 말이라
그 말이 날 무겁게 위로한다.
그는 내가 자신의 짐을 덜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회사에서 짙은 굳은살 같은 K과장은
내가 입사하고 약간 야들해졌다는 소문이 있다.
그에겐 매번 술을 사달라고 조르고 있다.
점심시간,
구직 사이트를 뒤적이며
이력서를 고치는 게
요즘의 소소한 취미다.
나는 무슨 일을 하고 싶은 걸까.
그저 힘들어서 도망치고 싶은 걸까.
다들 어떻게 버티고 있을까.
그래서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이 좋다.
남의 인생이 궁금하다.
L수석은 나를 밟고,
K사원은 나를 실망시키고,
K과장은 나에게 기대한다.
첫 프로젝트가 끝나면
나는 또 다른 사람이 된다.
다음 프로젝트에서는
다른 업체 앞에서
전혀 다른 얼굴로 서 있다.
지나간 모든 것들이
나를 다시 만든다.
괜찮은 걸까.
축복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불행이라면,
지금의 나는 불행한 걸까.
술잔을 기울이며 생각한다.
조금만,
조금만 더 바보가 되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