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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차 Aug 12. 2020

육아인이 되다

육아 십년

  첫 출산일을 가끔 떠올린다. 10월 29일 15시 무렵. 양수가 터져 병원으로 달려온 지 아홉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출산은 막바지에 다다르는 중이었다. 양수가 모자란다거나 태아의 맥박 수가 떨어진다는 말을 어렴풋이 들으며 여기서 포기한다면 어떤 일이 생길지 생각했다. 아기를 낳다가 그만둘 수도 있나? 즉 그만두고 싶었던 것이다. 전날 일곱 시에 저녁을 먹었으니 20시간 가까이 공복이 이어지고 있었다. 가진통을 거치지 못하고 유도제로 끌어내진 진통은 처음부터 몸을 강하게 후려쳤다. 내가 그려온 출산은 이런 게 아니었다. 좀 더 준비되어 있고, 좀 더 여유롭고... 가벼운 진통을 느끼면 앞으로 밀려올 길고 긴 진통과의 싸움에 대비해 우선 삼겹살 파티를 할 생각이었다. 매주 있던 곤혹의 순간, 몸무게 체크도 끝일 테니 실컷 먹어도 되겠지. 그런 후에는 출산 가방을 확인하고 샤워한다. 아기를 낳으면 한동안 목욕을 못 한다고 하니 따뜻한 물로 오래오래 씻어야지. 마지막으로 집안을 정리한 후 진통 간격이 10분이 되길 기다렸다가 천천히 병원으로 향하는 것이 내가 쭉 그려왔던 그림이었다.


실제로 일어난 일

  출산예정일 아침. 축축한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깼다. 다행히 하혈은 아니었지만 분비물이라고 하기엔 양이 많았다. 화장실에서 나와 제일 먼저 한 일은 맘X홀릭을 검색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남편은 왜 자기를 먼저 깨우지 않았느냐고 원망했지만 임신 10개월을 거치며 임출육 문제에 관해서는 맘X홀릭을 의지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나름 정확하다는 것을 나는 체득하고 있었다. 10분간의 꼼꼼한 검색을 거쳐 양수가 터졌다는 결론을 내린 후 남편을 깨웠다. 그리고 나와 같은 증상을 가진 글에 달린 세 번째 댓글의 충고를 전했다. “지금 바로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아.”

  새벽 도로를 달리며 남편은 말했다. “내가 늘 시뮬레이션을 해왔거든. 갑자기 진통이 왔다고 전화 오면 회사에서 집까지 어떻게 최단 거리로 달려올지. 그런데 집에서, 이렇게 텅 빈 도로를 타고 병원에 갈 줄이야!”

  하잘 것 없는 얘기였지만 아무튼 그에게도 뭔가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바로 출산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삼겹살을 못 먹었다는 아쉬움이었다. 그때 삼겹살은 나에게 슈퍼 순산의 상징이었던 것 같다. 결국 허기와 피로에 지쳐 다 때려치우면 어떨까 싶어졌으니까 일리 있는 생각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지금 그만하면 어떻게 될까. 아기는 계속 배 속에 있게 되는 걸까. 그러는 게 낫지 않을까. 난 아직 아이 키울 마음의 준비도 안 됐는데.

  줄 지어 떠오르는 질문에 답을 준 사람은 의사 선생님이었다.

  “산모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힘주실게요. 이번에 안 나오면 수술해야 해요. 아기 심박 수가 너무 떨어졌어요.”

  의사 선생님의 말투는 긴박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일상다반사 대하듯 침착했던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식이었든 멍 세계를 부유하던 내 정신을 현실로 돌려놓기 충분했다. 그렇다. 아기는 더 이상 배 안에 머무르면 안 됐다. 나는 간호사의 신호에 맞추어 그야말로 마지막 힘을 주었다. 아기가 겨우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신생아는 생각보다 작았다. 드라마에서 봐온 것보다 작았고, 불러 있던 배를 생각해도 작았다. 이 애가 내 배 안에서 그렇게 큰 태동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거짓말 같았다. 거짓말 같은 게 하나 더 있었다. 아기가 태어났는데도 여전히 배가 아프다는 것이었다. 아기 얼굴 보면 아픈 것도 싹 사라진댔는데! 맘X홀릭의 권위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십 년 후

  그때의 작은 회색 소시지 같던 아기가 작년에 열 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이제는 “나갔다 올게.” “어디 가는데?” “밖에.”의 대화 구사가 가능한 훌륭한 예비 사춘기 소년이다. 아직 집에 있을 땐 수미쌍관으로 엄마를 찾지만(“엄마, 오늘 저녁은 뭐야, 엄마?”) 방문을 걸어 잠글 날도 멀지 않았겠지. 그 날이 안 기다려진다고는 말 못 하겠다.

   이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나서 두 번의 출산을 더 했다. 그러니까 세 아이의 엄마가 된 셈이다. 지난 십 년을 돌아보면 무엇보다도 아이를 키우는 사람으로 살았다. 어쩌면 인생의 가장 중요할 수도 있는 한 시기를 나보다 타인을 위해 보냈다. 특별히 대단한 희생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내 밥보다 남의 밥 만드는 데 더 시간을 썼다 정도의 의미이지만 아무튼. 늘 보람차고 뿌듯하게 보내지는 못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그저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며 휘갈겨 쓰고, 구겨버린 채 마음 한 구석에 던져버린 날이 더 많았다. 다들 쓴다는 육아일기도 한 장 기록하지 않았다.


  요즘 들어 그 구겨진 나날들을 펴보고 싶다는 마음이 자꾸 생긴다. 구체적인 사건과 날짜가 다 지워지는 동안에도 못내 남아 있는 감정의 요동에 지금은 어설프나마 이름을 달아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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