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탁

부탁이 어려운 어른으로 산다는 것

by Workingmom B

내 나이 서른즈음 결혼 준비를 할 때였다. 집에 들여놓을 세간은 많고 회사일은 많은데, 연차는 적었고 돈도 시간도 없었다. 내 인생 최대의 이벤트를 앞두고도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도와달라는 말을 못했다. 정확하게 이야기 하자면 내가 부탁할 수 있는 사람 리스트에 엄마가 없기도 했다. 사실 부탁할 수 있는 편한 사람 리스트에 이름 올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부탁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다 멀리 살았다. 그 당시 직장 때문에 울산에 살았던 나는 서울에 사는 친구들과 언니, 시골에서 지내는 가족들과 마치 화성-금성에 사는 사람처럼 지냈다. 나의 마음의 거리가 그랬다.


내 결혼 이벤트는 나에게만 큰 행사는 아니었다. 우리집 삼남매 중 첫 결혼이었고 엄마에게도 일륜지대사였다. 그럼에도 아무 도움 구하지 않는 내게 그녀는 '섭섭하다'는 말을 했다. 양가에 손 벌리지 않고 둘이서 하는 결혼이 편안할만도 한데 '섭섭병'에 걸린 엄마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요즘 애들 답지 않게 양가에 손 안 벌리고 하는 결혼을 주변에 입이 마르도록 자랑하고 다니시면서도 내게는 '섭섭하다'는 말로 나를 섭섭하게 하셨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딸의 결혼에 큰 도움을 못주는 경제적 형편이 마음이 아렸던 그녀가 내심 세간을 고를 때나 가구를 집에 들일 때 와서 도와달라는 부탁을 기다렸을 수 있겠다, 생각이 들었다. 그 편이 그녀의 마음의 짐을 더는 일이라면 나도 기꺼이 했을텐데, 그때의 나는 가구를 잠깐 들이기 위해 왕복 4시간을 오가라고 엄마에게 말할 줄 몰랐다. 엄마가 왕복 4시간을 오가셔도 엄마와 식사도 편히 할 수 있는 시간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게 더 마음에 걸려 회사에 남은 연차를 쪼개가며 집으로 새로운 가전제품과 가구를 들였다.


이미 그때부터 건방지게도 엄마는 내가 도움을 줄 수있는 사람이지 도움 받을 수 있다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둘째였지만 언니보다 먼저 일을 시작해 집의 경제적 어려움을 먼저 알았다. 혹시나 대학원 공부를 하게 될까 싶어 열심히 모은 돈을 털어 집에 드렸다. 그 돈은 알뜰하게 우리집에서 키우는 소들의 사료값으로 들어갔다. 경제 활동을 시작하면서 '케어받는 삶'에서 '케어를 하는 삶'으로 바뀌었고, 엄마도 나의 케어의 대상으로 착각하며 어른인 척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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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대학생이 되고 부푼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왔다. 혼자서 작은 고시원 방을 구했다. 처음 구했던 그 방은 너무 좁아 도저히 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른 고시텔을 구해 혼자 택시를 잡아 짐을 실어 이사를 했다. 그 날 따라 눈이 펑펑 내렸다. 용달차를 부르기에는 작고 택시에 싣기엔 많은 짐을 보고 택시 기사 아저씨는 퍽이나 난감해했다. 실로 택시를 탈 거리도 아닌 거리였고, 짐을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듯 구겨넣고는 택시 앞자리에 탔다. 아저씨는 나를 힐끗 거리며 물었다.

"어른 없어?"

대답을 못했다. 나를 도와줄 어른은 없었다. 펑펑 내리는 차창밖을 보면서 생각했다.

'아, 이렇게 어른이 되는구나. 혼자서 내 일을 감당하는 거, 이게 어른이구나. 이제 나는 이렇게 혼자서 다 해내는 사람으로 커야 하는구나.'

20대에 대학선배들에게 잘못 배운 술버릇처럼 어른을 잘못 배웠다. 그저 부탁을 민폐로 착각한 어른으로 자랐다는 것, 그게 삶을 얼마나 고단하게 만드는 일인지 몰랐다.


혼자 이사를 했다고 말하니 친구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나를 부르지 그랬어. 참 너는 곁을 안 준다.'고 했던 그 친구의 눈에 서렸던 서운함과 원망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도움을 받는 일이 조금 더 편했다면 너랑 나는 좀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을까.


***


아이를 낳고 회사를 다니는 일은 내가 나를 갈아넣는다고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저 내가 열심으로 채울 수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아이는 물주면 자라는 콩나물이 아니었고, 아이를 케어할 수 있는 절대적 시간을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시어머니께 아이를 봐달라는 '부탁'을 어렵게 했다. 30년 넘게 따로 살았던 사람들이 같이 사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인데, 부탁을 민폐로 착각한 사람에게 매일같이 부탁하는 삶까지 더해지니 4년은 어려운 시간이었다. 그 가운데서 시어머니와 나는 애증을 기초로 하는 신뢰를 쌓았고 서로의 삶을 가장 이해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사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