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orkingmom B Apr 27. 2023

직장인의 삶

K-직장인이 뭐가 어때서?

 회사가 부산에서 분당으로 이전하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육아휴직을 썼다. 출산휴가 3개월만 썼던 내게 육아휴직은 달콤한 휴식임이 분명했다. 남들은 일하는데 적응이 되서 출근할 시간이 되면 눈이 떠진다던데 휴직 첫 날부터 아이와 함께 나란히 늦잠을 잤다. 일은 적응하는데 몇년이 걸리더니 휴직은 적응하는데 채 하루가 걸리지 않은 셈이다.


 나름 육아휴직 동안의 버킷리스트가 있었다. 물론 to do list에 가까운 버킷리스트였지만 목록을 하나씩 지워나갔다. 해야하는 밀렸던 집안일과 집안 정리가 끝나고 필요한 운전 연수를 조금 받았다. 그리고 서투르지만 해보고 싶었던 방송 댄스, 예전에 잠깐 해봤던 베이킹에 도전했다.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도 만나고 나니 대략 2개월이 지났는데 그때부터 조금씩 집안에 주저앉기 시작했다. 보고 싶었던 드라마를 본다는 핑계로 집 밖에 나가지도 않고 바닥과 한 몸 되어 한없이 늘어졌다. 누워 있는 나를 계속 두자니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주관식으로 주어진 하루라는 시간을 어떻게 꾸려 나가는 게 좋을지 생각해보게 됐다. 하루의 일정이 객관식이라면 선택이 조금은 편했을까? 내가 프리랜서라면 어땠을까? 가정주부였다면 어땠을까? 내 직업이 무엇이든 이다지도 게으른 인간의 하루라면 어느 것을 해도 엉망일 것이다, 라는 결론을 내렸다. 


 게으른 나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다. 몸을 움직이기 싫을수록 몸 쓰는 일로 스스로를 깨울 수밖에 없다. 운동이라는 걸 하려고 오랜만에 필라테스 센터를 찾았다. 한 3년 정도 합을 맞춘 선생님이 운동에 앞서 마사지를 해주셨다. 오래 같이 하다보니 둘의 수다에는 아이 이야기부터 다른 회원들 이야기까지 하게 된다. 1:1 필라테스라 그런지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회원들의 이야기를 할 때가 많은데 다른 세상 이야기일 때가 많다.

 "돈 있는 집 분들은 자식들 공부 시키는 것도 중요한데, 좋아하는 걸로 먹고 살게 해주는게 낫겠다 생각하시더라구요."

 "아, 그쵸."

 "화요일에 오시는 돈 좀 있는 회원님 있으신데, 그 분은 자녀들 테니스 시키시더라구요. 자녀분이 테니스를 잘했나봐요. 강사하면 수입도 괜찮고 시간도 자유로운 편이고."

 "아, 그래요? 저는 잘 몰라서......"

 "직장인들 뻔하잖아요. 회사에 매이게 되고 일정한 시간에 출퇴근 하고 상사 스트레스도 있구요."

 "그렇긴 한데. 그렇다고 모든 직장인이 불행하진 않아요. 만족하고 사는 직장인도 많아요. 저도 제 생활이 나름 괜찮으 거 같아요."

 내가 말하고서도 깜짝 놀랐다. 늘 직장인이라서 불행하다고 투덜거리지 않았던가. 회사는 나의 능력을 사는 곳이 아니고 내 시간을 사는 곳이라고 격렬하게 비난했던 나였는데 갑자기 웬 행복한 사람 코스프레지. 나만큼 놀란 선생님이 이야기를 수습한다.

 "아니, 직장인이라고 다 행복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돈 있는 집 자녀분들은 선택의 폭이 넓다고 해야 될까요? 저희보다는 여유롭죠. 하하하"


 그리고 나니 불현듯 떠올랐다. 내가 직장이란 곳에 신세를 지고 있었던 몇 번의 경험이.

 뜨거운 연애가 차갑게 식었을 때 아침이면 갈 곳이 있고 집중할 것이 있다는 것이 감사하지 않았던가. 날 필요없다고 하는 연인 대신에 날 필요로 하는 자리에서 일을 하는 것이 나쁘지 않았던 그 때를 선명하게 기억한다. 지난밤 울다가도 회사에 가서는 나로서 열심히 일을 하며 시련의 아픔을 조금씩 잊어가던 그때를 말이다. 

 그리고 다니는 회사 이름만 대도 나에 대한 태도가 호의적으로 변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내 회사가 나의 표면적 가치를 대신 해줘서 괜찮을 대우를 받았던 때도 있지 않았던가.

 급하게 목돈이 필요했을 때 꽤 큰 성과금이 든든했던 그때도 잊을 수 없다.


 나의 몸에는 K-직장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어느 정도는 정해진 루틴을 가진 삶이 나쁘지 않은 삶이라고 생각하는데 12년이 넘는 세월이 걸리다니. 

 눈을 뜨면 내가 앉을 자리가 있는 나의 직장을 오늘만큼은 사랑해 보려고 한다. 늘 밥 먹듯 숨 쉬듯 하던 회사에 대한 불평도 오늘은 좀 자제하려고 한다. 아침에 눈 뜨면 나의 자리가 있고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즐겁게 일하는 나의 모습에 감사하다.

 내일 아침이면 다시 힘들게 눈을 뜨고 잠자리에서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겠지만 오늘만큼은 충만한 마음으로 나의 직장인의 삶을 사랑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직장인의 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