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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rkingmom B Apr 05. 2023

직장인의 쉼

축복받은 날, 직장인의 휴가에 대해

 "팀장님, 내일 휴가 좀 쓰겠습니다."

 "갑자기? 왜?"

 돌아오는 물음에 벙어리가 되고 만다. 그냥 쉬고 싶을 뿐인데. 격렬하게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요, 라고 말할 용기는 없고 어줍잖은 변명을 지어낸다.

 "친한 친구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셔서요."

 대체 몇명의 친구 부모님을 돌아가시게 했던가. 이러다가 친구 부모님들을 다 죽이고 말 것 같다. 회사에 중요한 일도 없는데, 내가 할 일을 다 못해내는 것도 아닌데 대체 무엇이 나를 회사에 묶어놓는 것인가. 내 휴가에 태클을 걸지마! (이거 보고 웃으신 분은 분명 트로트 러버!)


 휴가를 쓴다고 욕을 먹었거나 말거나 새로운 아침은 온다. 휴가날 아침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쓰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아침이 온 줄 알면서도 일어나지 않는다. 윗집의 분주한 발걸음 소리를 자장가 삼아 굳이 더 잠들려고 노력한다. 잠에 들면 자면 되고 잠에 들지 않아도 좋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는 여유는 그저 달콤하다. 한 두어시간 지나 너무 게으름을 피우면 안될 것 같아서 운동이나 해볼까 하며 동네 한바퀴를 돌아본다. 감지 않은 머리를 감추려고 비니를 눌러 쓰고 가장 편안한 운동화를 꺼내 신는다. 어느새 테이크 아웃 커피가 내 손에 들려있다.


 쉼을 위해 일을 하느냐, 일을 위해 쉬느냐.

 마치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와 같은 오래된 논쟁이 아닐 수 없다. 개인적으로 쉼을 위해 일을 하는 나로서는 일만큼 쉬는 것도 중요하다. 일 중독에 가까웠던 내가 이렇게 될 수 있었던 큰 계기가 있었다.


 철없던 10대 시절 내 꿈은 커리어 우먼이 되는 거였다. 어떤 일을 하는지는 상관 없었고 남들 보기에 꽤 그럴싸해 보이는 일이면 좋겠다 생각했다. 지인들과 대화 중에 걸려오는 업무 전화에  '잠시만!'하며 평일과 휴일 구분없이 일하는 모습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이 어리석음은 20대 취업 후에도 이어졌는데 평일과 휴일을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휴가 때면 해외여행을 가기도 했는데 거기서도 일을 놓지 못했다. 예를 들면 신랑과 연애할 때 코타키나발루로 여행을 갔었는데 신랑은 그곳을 가장 로맨틱한 일몰지로 기억하지만 나는 그 곳에서도 고객사 전화를 받느라 정신없었던 기억만 있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고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 이렇게 일하면 당연히 병이 난다. 일한지 7년 정도 되니 정신이 고장났고 정신건강의학과의 문을 두드렸다. 선생님께서 질문하셨다.

 "어떤 일로 오셨을까요?"

 "제가 회사일로 번아웃이 온 거 같아요. 회사에서 맡은 일이 생각보다 버거워지고 일의 능률도 떨어지는 것 같구요. 제가 제가 아닌 거 같아요. 으헝~!"

 주책스럽게 갑자기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B씨는 어떤 분이시죠?"

 "저는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비효율적인 걸 싫어하는 사람이예요. 스스로 일에 대한 효율이 떨어진다고 느끼니까 절망적입니다."

 선생님은 잠깐 쉬시다가 조용이 입을 떼셨다.

 "B씨는 B씨 자신입니다. B씨는 회사에 다니지 않아도 B씨구요."

 선생님 말씀이 너무 맞았다. 일하는 B가 커져서 일하는 B 말고 다른 B는 존재하지 않았다. 정 힘들면 회사는 그만두면 되는 거였다. 난 왜 그걸 몰랐을까? 약 따위는 필요없었다. 선생님의 말씀 한마디로로 바로 깨달음을 얻고 다시 병원을 찾지 않아도 괜찮았다.


 일하는 B보다 소중한 B가 많았다. 엄마 아빠의 딸인 B, 누나 동생인 B, 친구인 B, 쉬는 B, 노는 B, 여행하는 B 그리고 글 쓰는 B.

 그 이후 나의 휴가는 신성불가침 영역으로 아무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시간이다. 일하는 내가 빛날 수 있도록 나를 가꿀 수 있는 시간. 그래서 가끔은 아이 때문도, 볼일이 있어서도 아니고 오직 나만을 위해 휴가를 낸다.

 "팀장님 저를 위해 휴가 좀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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