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플전자의 김 부장님은 회의 때마다 ‘이봐 잠깐만, 나 때는 말이야’라는 말과 함께 일장연설을 늘어놓으시는 분이다. 대개는 대리 시절 새벽 동이 틀 때까지 회사에 남아 일을 하는 게 일상이었다던가, 15년 전에 은퇴하신 모 사장님은 화가 나면 재떨이를 던지곤 했다던가 하는 식의 화려한 무용담(?)이 녹아있는 스토리다.
김 부장님은 회사의 자라나는 새싹들을 감화시키고 성장을 위한 자극을 주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부하 직원들로부터 칭찬 세례라도 받고 싶은 것일까? 어찌 됐든 직원들은 반복되는 레퍼토리에 질려버린 표정을 애써 숨기고 있다.
김 부장님처럼 시도 때도 없이 ‘나 때는 말이야’를 외치며 젊은 이들에게 훈계를 일삼는 이들을 풍자하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바로 TV 광고까지 등장하며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은 ‘라떼는 말이야(Latte is horse)’다.
수천 년 전 쓰인 함무라비 법전에도 '요즘 젊은것들은 버릇이 없다'라는 말이 있다고 하니, 라떼 스토리는 인류의 오래된 떡밥(?)인 듯하다. 그럼 도대체 왜 지금까지 직장 상사, 군대 선임병들은 하급자들에게 ‘라떼는 말이야’라는 말을 끊임없이 사용하는 것일까?
이는‘체리피킹 오류(Cherry picking fallacy)’로 설명할 수 있다. 용어의 배경부터 설명해보자. 한 농부는 본인이 재배한 체리를 최상품이라고 홍보한다. 소비자들이 보기에도 바구니에 담긴 체리들이 잘 영글어 싱싱해 보이기 때문에 이 농장에서 수확하는 체리의 상태가 양호할 것이라고 판단하게 된다. 단, 그것이 현실과 다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체리를 수확하는 과정에서 농부는 잘 익고 상태가 좋은 것들만 추려서 시장에 내놓기 때문에 저급의 체리들은 애초에 제시되지 않는 것이다. 체리피킹 오류는 이와 같이 의도적으로 선별적인 사례나 유리한 증거만을 제시하는 것을 의미하며, 증거 은닉의 오류 또는 불완전한 증거의 오류라고도 불린다.
대다수 직장인들의 심리 기저에는 잘한 일은 좀 드러내고 못 한 일은 숨기고 싶은 마음이 있다. ‘라떼는 말이야’를 외치는 김 부장님도 자신의 고단 했던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후배들에게 인정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김 부장님의 라떼 스토리에서 ‘옛 시절’의 장점은 없을까? 대학시절 굳이 학점에 목매지 않고, 심지어 특급 선발 투수의 방어율과 비슷한 졸업 학점을 가지고도 대기업에 입사할 수 있었던 장점 같은 것 말이다.
저성장 기조로 인해 구직난이 문제가 되는 요즘 현실과는 다르게, 과거 고속 경제 성장기에는 회사의 인력난이 심해 구직자들이 오히려 ‘갑’인 시절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면접을 불참했는데도 합격 통보를 받았다는 전설적인 일화도 전해져 내려온다. 그뿐인가, 사실상 제로 금리인 현재와 달리 예금만 해도 10% 이상의 고이율을 받을 수 있었던 때, 강남의 아파트도 열심히 벌고 저축하면 살 수 있던 때도 김 부장님이 강조하는 옛 시절의 이야기다.
참고로 1979년에 준공된 대치동 은마 아파트의 34평형 분양 가격은 2천3백만 원이었는데, 절반이 미분양되어 건설사에서 더 가격을 더 낮추어 팔 정도였다고 한다. 2021년인 현재, 한국을 여행하는 외국인들이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고 오해할 정도로 낡아버린 은마 아파트는 무려 100배 이상이 올라 20억이 넘는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게다가 김 부장님이 젊은 직원이었던 시절에는 삼플전자가 매년 급성장을 해서 연말이면 두둑한 보너스가 통장에 꽂혀 사무실 분위기가 훈훈해지지 않았던가? 회사 내 새로운 조직이 계속 생겨나니 관리자 직급에 사람이 부족해져 한 번에 두 단계 승진을 하는 이들도 있었고, 해외 근무 차출도 지금보다 치열하지 않았고 말이다. 하지만 김 부장님에게 이런 이야기는 본인의 노고를 인정받고 직원들의 노력을 독려하는 일에 방해가 되는 ‘덜 싱싱한 체리’ 일뿐이다. 구태여 제시하여 성공 스토리를 희석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김 부장님이 모르는 것이 한 가지 있다. 이처럼 선별적으로 정보를 공개하는 체리 피킹 오류는 한두 번은 통할 수도 있지만 반복되었을 때 상대를 기만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장기적으로 조직원들을 이끄는 바람직한 리더십은특정 정보를 숨기고 업적을 부각하는 라떼 스토리보다는, 진솔한 성찰에서 비롯된 소통, 공감, 격려의 자세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앞으로는 ‘사실 나 때는 이런저런 장점도 많았는데 요즘은 세상이 각박해져서 젊은 직원들이 많이 힘들겠어요’와 같은 따뜻한 리더십이 점점 더 늘어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