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박한 순간에 우리의 마음가짐에 대하여
나에겐 절대적으로 믿는 신이 있다
내가 쓰려는 이야기는 종교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인생을 살아가며 두어번은 겪을 어떤 절박한 순간에 우리의 마음가짐에 대한 것이다.
나는 과학을 믿는 업계에서 20년 가까이 일해왔다. 하지만 나는 검증이 불가능하면 가설 이른바 “썰”을 진실이라고 말하는 과학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맹신하진 않는다. 눈에 보이는 증상을 없애주는 치료제에 고마워하지만, 그 순간 아픈 두통은 없애줄 수 있겠지만 그것이 궁긍적인 치료책이자 해결책이 아니란 것을 안다.
엄마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2022년의 연말. 신나게 친정에 돌아가 놀 생각에 부풀었던 나의 연말 계획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불과 몇주전만 해도 암 환자라고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정도로 활기차게 지내던 엄마가, 갑자기 보행 장애가 온 것마냥 휘청휘청 걷는다. 시야가 가끔 이상하게 보인다고 한다. 아마도 암이 조금씩 넓게 전이되어 가는 중인가보다.
현실을 보니 절망감에 휩싸인다. 누구보다 똑똑하고 빠릿빠릿했던 우리 엄마. 여행을 좋아하고 새로운 장소도 용감하게 돌아다니는 경험을 좋아했던 우리 엄마가 그립다.
추운 겨울 손녀가 노는 것을 보겠다고 오랫만에 놀이터에 산책을 나왔다. 본인보다 6살이나 많은 늙은 남편의 부축을 받으며 지팡이에 의지해 어눌하게 휘청거리며 걷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니, 울컥한다. 이런 상황에 긍정의 힘? 시크릿? 시니컬한 웃음만 나온다.
암덩이를 여럿 품고도 작년 겨울 그랬던 것처럼… 엄마가 다시 건강히 환하게 웃으며 손녀와 함께 그네를 탈 수 있을까. 상황이 점점 나빠질 수밖에 없는 보통의 상황에, 이 상황이 개선 되리라고 믿는 내 믿음은 허황되기만 한 것일까. 현실 부정, 태평한 마음집어치우라고, 정신 차리라고 누군가 내 뒤통수를 한 대 갈겨줄 것만 같다.
내 믿음 없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순간이다. 나름 30년 신앙인인데. 그 뜨거운 신앙심과 믿음은 어디갔는지. 무력해진다.
상 그지 깽깽이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믿으면 온 우주가 도울 거라는 믿음보다 좀더 어려운 생명의 영역이니까, 네 믿음이 작은 건 아니라고 위안을 삼아볼까.
6년 전 딸아이가 태어나던 어느 금요일도 그랬다. 무력하고 믿음 없는 연약한 나의 영혼을 마주했다. 1.2kg 의 작은 몸으로 태어나 기적적으로 건강히 살아준 내 딸과 첫 만남은 그랬다. 그 때도 나는 믿음이 없었다.
2021년 2월, 엄마의 암투병이 다시 시작됬다. 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냉철하게 봤을 때, 나는 2022년 겨울, 2023년 1월 1일 지금의 오늘, 엄마가 우리 곁에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지금 엄마는 완벽하진 않지만 우리 옆에 있으니 의학적인 확률을 이겨낸 건 분명하다. 숫자를 표현하면 이상하지만 90%의 엄마가 내 옆에 숨쉬고 가끔 휘청거리는 와중에도 요리를 하고 손녀의 밥상을 차려주고 있다.
그런데 다가올 연말의 내 모습이 예측이 안된다. 배경 공간, 인물, 상황 아무것도 예측이 안되는 것은 두려움을 준다.
엄마가 이상하다며 두려움에 가득차 한시도 엄마 옆을 떠나지 않는 늙은 아빠에게… 신앙깊은 불혹의 딸은 믿음을 가지라고 다 잘 될 거라고 말하지 못했다. 믿음 없는 내가 싫다. 끝날 때까지 끝난게 아니라고, 지금까지도 그랬듯이 내일은 오늘보다 나아질 것이라고 헛소리라도 말을 못꺼내는 믿음 없는 내가 무기력하다.
인생을 살면서 이런 무기력한 순간이 많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행여나 그런 순간이 온다고 할지라도, 결과가 어떠할지라도 믿음 없는 나를 마주하지 않고 싶다. 중요한 것은 꺽이지 않는 마음이다. 호기롭게, 담대하게, 마음의 근심과 온갖 현실적이고 부정적인 시나리오는 다 지우고, 온 우주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기적이 찾아오게 하고 싶다.
더 많은 믿음이 필요한 순간이다.
믿음을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