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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효이재 Jul 13. 2024

인간이해 7_협력하는 인간과 조직

인간과 조직의 진보, 진화를 위한 협력 전략

Gravity - Steven Price


생(生)이라는 측면에서 우리 인간을 포함해 살아 숨쉬는 존재를 바라보면, 각 존재는 어쩔 수 없이 생존과 성공이라는 투쟁에 내몰립니다. 그 모든 존재를 ‘우리’라 표현하면, 우리는 늘 승자가 되고 싶어합니다. 이 목표를 위한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경쟁하는 다른 존재보다 좀 더 앞서는 것입니다. 좀 더 강해지는 것입니다. 비슷하지만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경쟁하는 다른 존재를 좀 더 뒤쳐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좀 더 약해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존재의 성공은 어쩌면 얼마나 ‘이기적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분명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것을 감수하고 도움을 베풀려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자신의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 앞에서도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내던지는 사람도 분명 존재합니다. 혼잡한 지하철 역을 혼자 가로지를 때 우리는 철저히 혼자입니다. 간단한 인사말을 마주치는 사람에게 건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고 불편합니다. 그러나 지하철 역에서 누군가가 갑자기 쓰러졌을 때 우리는 그를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를 걱정하게 되고 사람들은 즉시 경계를 풀고 반사적으로 도움을 베풀고자 합니다. 모두 한번 정도는 그런 직접적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인간의 본성이 ‘이타적’인 것이라 주장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인간에게 직관적으로 ‘이타적이고자 하는 마음’ 이 부분적으로 라도 있는 것은 분명하다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문제는 진화론의 창시자 찰스 다윈에게도 골치 아픈 문제였습니다. 그는 여전히 인간사회에 이타성이 존재함을 인정하면서도 그런 현상은 점점 줄어들 것이고 또 생존에 불리할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보다 온정적이고 인자한 부모 혹은 자신의 동무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신실한 부모들의 자손들이 이기적이고 기만적인 부모의 자손들보다 그 수가 더 많아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지극히 의심스럽다. 많은 원시인들이 그랬듯이 동무를 배신하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자는 자신의 고귀한 품성을 전수할 수 있는 자손을 종종 남기지 못하게 될 것이다. 전쟁에서 맨 앞에 나서기를 언제나 자처하는 그리고 다른 이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거는 가장 용감한 자들은 평균적으로 봐서는 다른 이들에 비해 많은 수가 사라져 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다윈의 예측은 엇나갔습니다. 이타주의는 많은 경우 승리했습니다.진화론에 기초한 자연과학자들은 인간의 이타성 이슈에 대해 196~70년대에 걸쳐 매우 파격적인 이론을 발표합니다. 흔히 우리가 ‘이기적 유전자’로 이해하고 있는 ‘포괄 적합도’ 이론입니다. 포괄적합도_inclusive fitness 이론은 진화생물학자 윌리엄 D. 해밀턴_William D. Hamilton이 주창한 개념으로 인간 및 일부 동물세계 내 이타주의의 존재를 유전자의 생존 및 번식을 위한 관점에서 해석했습니다. 요약하자면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유전자의 생존과 번식을 위한 도구로써 인간의 이타적인 행위는 결국 자신의 유전자를 더 널리 퍼뜨리기 위한 이기적 유전자의 움직임에 따른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그의 주장은 진사회성 곤충[1] 연구로 ‘사회생물학’을 정립하고 훗날 ‘통섭’이라는 강력한 화두를 학문계에 던진 에드워드 윌슨_Edward Osborne Wilson의 75년 저작에서 소개되면서 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바로 1년 뒤인 76년,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_Richard Dawkins『이기적 유전자』를 통해 더욱 강력하게 퍼졌습니다. 포괄적합도 이론에서 이타성은 곧 혈연 선택입니다. 가까운 친족이 나와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까운 친척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려도 여전히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릴 수 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 법칙에 따르면 협력은 ‘근친도(얼마나 혈연적/유전자적으로 가까운지)’가 비용-이득의 비율보다 클 때 가능하며, 얼마나 협력할 것인지는 유전적 근친도 크기의 함수로 예측될 수 있습니다.


 일련의 이론은 처음 발표되었을 때 엄청난 사회적 논란을 낳았습니다. 에드워드 윌슨의 75년작 『사회 생물학』은 동료들로부터 ‘현존 사태, 즉 계급, 인종, 성에 따른 특정 집단의 기득권에 대한 유전적 정당화’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회과학자들을 비롯 당대 사회는 인간의 사회 행동, 사실상 인간 본성이 생물학적 기반을 지니고 있다는 발상을 혐오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밀턴의 가설은 70년대를 지나 학계에서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 졌고, 어느덧 혈연 선택은 진화생물학계의 ‘정설’로 수용되었습니다.


포괄적합도 이론은 원시 사회의 조직, 나아가 현대 사회에서도 발견되는 혈연주의의 뿌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큰 성취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 기업, 나아가 미래를 대비해야 하는 관점에서는 매우 당혹스러울 수 있습니다. 포괄적합도 이론이 갖는 근친적 이타주의의 특징인 맹목성은 때때로 외려 기업, 조직의 미래에 대한 준비를 어렵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한 예로 기업의 오너 2세가 회사 안팎에서 폭력적 언행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기업의 성장과 생존에 위협이 되는 행동을 한다 하더라도 위험을 무릅쓰고 오너 일가와 가신그룹이 ‘협력하고 희생하며’ 2세의 일선 복귀를 돕는 행위를 포괄적합도 이론은 잘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분명 우리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태도 혹은 권하는 조직과 기업의 성장 방향성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실증적으로도 근친도와는 전혀 관계없는 다양성 높고 이질적이기까지 한 구성원이 한 조직에 모여서(물리적인 경계마저 넘어서) 서로 협력해 창발적인 혁신을 만들어 내고 기업에 헌신하는 양태를 설명하기엔 역부족입니다. 


어쩌면 다행인 것은 90년대부터 ‘포괄적합도’, ‘이기적 유전자’로 인간 집단의 모든 이타주의를 설명하려 했던 움직임은 또다른 과학 이론과 증거들로 인해 많이 둔 해지고 무디어졌다는 점입니다. 진화생물학계 내부에서 첨예한 반증이 이어지고 나아가 다른 과학적 학문과의 통섭이 새롭게 밝혀낸 사실은 ‘혈연주의’는 이타주의를 설명하는 지극히 부분적인 요인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포괄적합도 이론을 비판하고 넘어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본래 포괄적합도 이론을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장본인인 에드워드 윌슨이었습니다. 에드워드 윌슨은 1990년대에 들어 포괄적합도 이론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깨닫고 회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연구를 거듭할수록 실제 ‘포괄적합도 이론’으로 발견할 수 있는 실질적 증거가 미약함을 느꼈습니다. 많은 연구들은 ‘통상적으로 사회성 곤충의 서식지에 속한 구성원은 자신이 동료와 지니는 근친도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한마디로 사촌과 형제를 식별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혈연 선택이 작동할 수 있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에드워드 윌슨은 하버드 대학의 수학자이자 이론 생물학자인 마틴 노왁Martin A. Nowak과 함께 이 문제에 대해 재검증에 나섰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철회했습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포괄적합도 이론’은 오히려 매우 특수한 조건, 상황에서 한정적으로 작동하는 협력 메커니즘일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2012년 『지구의 정복자』에서 관련 주장을 내세웠을 때 이번에는 또다른 차원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수십년 동안 하나의 패러다임 화된 ‘이기적 유전자’ 를 깨뜨리는 목소리에 대해 그는 또 한번 진화생물학계 주류의 ‘반역자’ 혹은 ‘배신자’로 공격받았습니다. 리처드 도킨스는 그의 책과 새로운 이론을 “있는 힘껏” 내팽개치라고 혹평했습니다.


에드워드 윌슨은 진사회성 곤충의 연구에서 더 이상 혈연 선택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곤충이 공동의 협력적인 삶을 꾸리도록 만든 생태적인 요소들과 유전적 요소 양자 모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나아가 그는 인간의 삶을 진사회성 곤충의 세계와 동일시 했던 태도에서 벗어나 ‘인간만의 사회적 행동’의 기원에 대해서도 좀 더 열린 태도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원시적인 사회성 곤충에서는 유충과 성체, 보모와 먹이 조달자 같은 각 집단 내의 사회 조직화 범주들이 갖춘 협소한 본능들을 토대로 한 분업이 진화한 반면, 최초의 인류는 집단 구성원이 다른 모든 구성원들에 관한 상세한 지식을 활용하면서 본능에 기반을 둔 다양한 행동을 하는 쪽으로 진화했다. 사적이고 내밀한 상호 지식을 토대로 집단을 구축한 것이 인류만의 독특한 성취였다’


 그는 혈연관계에 따른 유전체의 유사성은 집단 형성의 불가피한 결과였지만 혈연 선택이 그 유사성의 원인이었던 것이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혈연선택 개념과 포괄 적합도 이론은 그 자체로 ‘아름답지만’ 현실과는 잘 맞지 않는 ‘허깨비 같은 속성’이고, 이는 심지어 진사회성 곤충을 비롯한 다른 동물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매우 제한적으로 적용됨이 확인되었다고 비판합니다.


 그가 말한 인간 협력, 이타주의의 기원은 결국 “자연 선택이 사회적 상호 작용을 선호했다”는 개념으로 가장 잘 설명됩니다. 의사소통하고, 알아보고, 평가하고, 유대를 맺고, 협력하고, 경쟁하는 타고난 성향도, 자신의 특별한 집단에 소속됨으로써 깊고 따스한 기쁨을 느끼는 성향도 결국 그렇게 나온 것입니다.


일련의 통찰은 자연과학적 접근과 인문학적 접근-도덕, 윤리와 같은-이 맞닿을 수 있는 통섭의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어쩌면 이제 시작 단계일 뿐이지만 우리는 이를 통해 ‘이타적 인간’의 현재와 미래를 준비하는 데 있어 과거보다는 조금 더 생산적이고 현실적인 도움을 받을지도 모릅니다.에드워드 윌슨과 마틴 노왁, 그리고 그와 궤를 같이하는 ‘열린 과학적 태도’를 지닌 자연과학자들이 밝힌 ‘인간 협력의 메커니즘’은 무엇일까? 마틴 노왁이 저서 『초협력자supercooperators』에서 밝힌 내용을 바탕으로 그 핵심을 요약하고 우리의 생각을 조금 보태어 소개하고자 합니다.[2]


1. 반복(직접 상호성):


직접 상호성은 단순하게 표현하면 ‘주고 받는 원칙(principle of give-and-take’ 입니다. 내가 너의 등을 긁어주면, 나는 네가 보답으로 나의 등을 긁어 줄 것으로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직접 상호성이 작동하는 원리는 ‘반복’입니다. 이번의 친절을 다음번의 친절로 되갚을 기회가 존재할 수 있도록 양측이 반복해서 접촉해야만 합니다. 둘은 같은 동네에 살 수도 있고 아마도 함께 일할 수도 있습니다. 반복이 없으면 속임수나 기만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반복한다면 궁극적으로 속이는 것은 더 큰 피해를 낳을 수 있습니다. 직접 상호성에 대한 동물적 사례는 박쥐가 대표적입니다. 서식처의 한 구성원이 밤 사냥 동안 벅잇감을 찾지 못했을 때, 박쥐들은 자신이 먹은 피를 토해내 아무것도 먹지못한 박쥐에게 나누어 줍니다.

 어떤 것이 직접 상호성의 진짜 사례인지를 구분해 내는 한가지 방법은 이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데 필요한 특징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직접 상호성을 통한 협력의 진화는 플레이어(행위자)들이 자신의 현재 파트너를 인지하고 그 파트너가 과거에 자신에게 했던 일들을 기억할 것을 요구합니다. 플레이어들은 상대편이 그들에게 했던 바를 기억할 수 있는 기억력과 이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할지를 생각하는 ‘지능’이 필요합니다. 즉 직접 상호성은 발달된 인지능력을 요구합니다. 때문에 우리 인간, 그리고 인간에 근접한 종들에게서 뚜렷하게 발현되는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18세기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인간 본성에 관한 소고 A Treatise of Human Nature』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어떤 친절도 베풀 의무를 지지 않은 다른 이들을 돕게 된다. 내가 다음에 또 이 같은 친절을 베풀 것이라 기대하면서 그가 내 친절을 돌려주리라는 것을 나는 알기 때문이다.[3]


 직접 상호성은 엄밀한 의미에서 철저한 ‘눈에는 눈, 이에는 이(‘협력하면 협력하고 상대가 배신하면 응징하는’ 전략입니다. 하지만 연구과정에서 현실에서 정확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전략(이를 마틴 노왁은 팃 포 탯, TFT라 이름 붙였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사는 늘 그렇듯 ‘복잡계’이고 사소한 실수가 그런 관계에 변화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실수, 뜻하지 않은 상황이라는 변수를 넣은 시뮬레이션에서 가장 유리한 전략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TFT가 아닌 ‘GTFT’, 즉 너그러운(Generous) 팃포탯 전략이었다. 즉, 현실이라는 변수를 감안한 자연선택 시뮬레이션은 ‘협력에 대해서는 협력으로 응대하되, 배신에 대해서는 세 번에 한 번골로 협력이라는 용서로 응대하는 것’을 최적의 전략으로 도출했습니다. 이 수리적 통찰은 조직 심리학자 애덤 그랜트의 ‘Give and Take’이론과도 연계되는 측면이 있습니다.[4]


 애덤 그랜트는 기업, 병원 등의 조직 연구를 통해 조직 내 가장 높은 생산성을 차지하는 사람도 가장 낮은 생산성을 차지 하는 사람도 ‘이타주의자Giver’ 임을 발견했는데, 가장 낮은 생산성을 기록한 이타주의자의 특성은 ‘이기주의자Taker’에 의해 착취당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관련 연구를 통해 기버가 대체로 이타주의적인 행동을 적극적으로 하되, 대신 테이커를 만났을 때는 선택적으로 매처(팃포탯 전략을 구사하는 구성원)가 구사하는 전략을 의식적으로 쓸 것을 권고하고, 조직이 테이커를 분별해 제거함으로써 개인의 생산성 및 조직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2. 평판(간접 상호성):


직접 상호성이 ‘서로 주고받는 것’이라면 간접 상호성은 그 직접적인 관계가 무너지는 상호성입니다.


“베풀어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성서 누가복음에 언급되는 이야기는 얼핏 직접 상호성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나의 호의에 대해 누가 보답하고 베풀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직접상호성이 ‘내가 당신의 등을 긁어주면 당신도 내 등을 긁어주겠지’라면 간접 상호성은 ‘내가 등을 긁어주면, 굳이 당신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누군가 내 등을 긁어주겠지’와 같은 의식입니다. 직접 상호성이 다른 이들에 대한 자기 자신의 경험에 기반을 두는 것이라면 간접 상호성은 다른 사람들의 경험 또한 고려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회의 사람들이 이 간접 상호성에 기반을 둔 경제적 교환에 의지하게 되면 이 사회는 보다 거대하고 복잡하며 상호 연결된 사회로 쉽게 진화할 수 있습니다.(뒤에서 별도로 다루겠지만 간접 상호성은 ‘조직 신뢰’의 핵심 기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를 이해하려면 ‘평판’의 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소문, 잡담, 수다 등과 같은 언어와, 의사소통에 대한 인간 욕구가 결합한 특성에 힘입어 다른 이들의 평판을 측정할 수 있습니다. 누가 좋은지 누가 나쁜지를 짐작하고 누구와 거래할지를 판단하게 해 줍니다. 유명인의 선행 혹은 루머 등 특별한 이야기가 번창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평판의 힘 덕분에 우리는 별다른 의심 없이 일면식 없는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고, 또 호의를 받습니다. 이 말은 간접상호성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평판’을 얻기 가능한 환경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평판의 힘 덕분에 발달한 간접 상호성의 영향력 아래에서 우리 사회는 그 어떤 때보다 거대하게 확장될 뿐 아니라 복잡해 질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나의 이타적인 행동을 평가하기 위해서 그리고 내 평판이 널리 퍼져나가기 위해서는 언어 이상의 것이 필요합니다.


 정보를 수용하고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고도의 지능이 있어야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의도를 이해하고 평가하려면 인간은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공감’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의 욕망, 동기, 의도, 맥락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마음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간접상호성은 도덕의 탄생과도 연결됩니다. 앞에서 언급한 누가복음은 모든 문화와 종교를 초월해 찾아볼 수 있는 도덕적 황금률입니다. 간접상호성은 우리의 뇌, 기억을 담아 두는 능력, 언어, 도덕 원칙의 발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합니다.


3. 공간 선택:


 혈연보다 공간입니다. 생명이 있는 곳에 떼, 무리, 군락과 같은 조직이 있습니다.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특유의 집단을 형성합니다. 마을, 도시가 그렇고 기업이 그렇습니다. 모든 진화 과정의 핵심에는 번식하는 개체들의 집단이 있으며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학자들의 작업은 이러한 집단 구조가 진화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왔습니다.


 공간 구조 혹은 사회적 네트워크가 의미하는 바는 어떤 특정한 개체들이 ‘공간’ 안에서 특정한 다른 개체들과 좀 더 자주 상호 작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틴 노왁은 공간과 진화의 관계를 분석하기 위한 컴퓨터 시뮬레이션에서 인위적으로 협력자와 배신자가 무작위적인 분포로 잘 섞인 공간에서는 협력이 재대로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파라미터를 조정해 협력자와 배신자가 어느정도 군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을 때 공간 내 플레이어들은 매우 복잡한 패턴을 생성하며 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마틴 노왁은 이 시뮬레이션을 통해서 관계 안에서 서로 돕는 협력적 네트워크가 뭉칠 때, 즉 조직화될 때 이기적 행위를 하는 사람 혹은 집단 보다 더 우월해 질 수 있음을 밝혔습니다. 그는 협력자와 배신자가 잘 섞인 집단 상태(무작위적 분포)에서 협력자와 배신자가 뭉쳐 있는 이질적인 집단 상태(척도 없는 네트워크, 이는 우리가 앞서 논한 ‘복잡계’ 세계의 속성과도 일치합니다.)로 넘어오게 되면 진화의 궤적은 극적으로 바뀌고 이때 협력은 ‘직접 상호성, 간접 상호성’과 같은 복잡한 전략이 없어도 번성할 수 있습니다. 


 공간 선택은 과거에는 지리적으로 강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예컨대 수렵-채집 기반 사회에서 플레이어들의 활동은 길, 강, 그리고 산에 의해 제한되었습니다. 그러나 기술의 발달은 공간 선택을 ‘월드와이드웹(WWW)’을 구심점으로 거대한 네트워크로 확장시켰습니다. 네트워크에서도 어김없이 공간 선택의 특징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현실세계에서 네트워크는 ‘척도 없는 네트워크’[5], 즉 새로운 네트워크 개체 ‘노드’는 이미 많은 연결선을 지닌 허브 역할을 하는 노드와 연결될 가능성이 높고 ‘멱 법칙’을 따릅니다. (이 역시 복잡계의 속성에서 정리한 바 있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6단계만 거치면 사실상 세계 그 누구와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6단계 법칙은 네트워크 과학에서 ‘세계가 그만큼 좁다’는 은유로 활용되는 개념입니다.) 과학자들이 밝혀낸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는 우리가 속한 네트워크에 영향을 받는데 중요한 것은 ‘이타적, 협력적 행동’까지도 영향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하버드 의과대학 니콜라스 크리스태키스Nicholas Christakis와 캘리포니아 대학 제임스 파울러James Fowler가 진행한 실험에 따르면 이타적이고 협력적인 행동은 3단계를 거쳐 전파됩니다. 크리스태키스에 따르면 “사람들이 평균적으로는 서로 6단계만큼 떨어져 있을지 모르지만,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능력은 3단계까지만 뻗어나가는 듯하다. 이는 사회 네트워크 구조와 그것의 실질적인 기능 범위 차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네트워크 과학은 협력과 네트워크 구조 사이에 단순한 연관성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발견했습니다. 전체적으로 개체가 보다 적은 수의 이웃을 갖게 될수록 게임은 협력자에게 유리하게 변한다는 것입니다. 잘 섞인 집단 상태에서의 게임은 언제나 배신자가 협력자를 누르지만 척도 없는(섞여 있긴 하나 일부 뭉친 곳도 있고, 질서와 무질서가 반복되는..) 네트워크에서 협력자 집단이 소수로 무리지어 여기저기 존재할 경우 생존과 성장 가능성은 높아지고, 그 과정에서 배신자마저 협력자로 바뀌기도 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4. 다수준 선택:


 많은 경우 우리의 이타심은 ‘직관적’입니다. 직관적이라는 말은 우리의 무의식에 각인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길을 가다가 누군가가 갑자기 쓰러질 때 우리는 반사적으로 그에게 관심을 기울입니다. 때로는 반사적으로 타인을 구하기 위해 내 목숨을 걸 만큼 강한 힘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본능이 있습니다. 집단에 대한 공감이 개체가 지닌 이기심을 압도하고 보다 큰 선을 위해 행동할 수 있도록 하는 메커니즘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진화와 자연선택이라는 맥락에서 이런 일은 왜 생기는 것일까요? 에드워드 윌슨과 마틴 노왁은 이를 해석하기 위해 ‘다수준 선택_multilevel selection’ 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수학적으로 증명하였습니다. (이는 포괄 적합도 이론- 에드워드 윌슨의 과거 입장이기도 했던-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근거이기도 했습니다.) 다수준 선택 메커니즘은 특정한 환경에서 자연 선택이 어떻게 개체 단위가 아니라 집단의 수준에서 작용할 수 있는지를 반영합니다. 이 개념에 따르면 배신자들은 집단 내에서는 승자가 될 수 있지만(몇번 개별적으로 승리할 수는 있지만) 집단이라는 수준에서 보면 협력자 집단이 배신자 집단을 이깁니다.


 협력이 항상 협력적인 개체를 이롭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무임승차가나 테이커가 개인차원에서 착취할 수도 있지만), 협력이 집단적으로 등장한 조직은 완전히 이기적 행위만으로 이루어진 집단에 비해 강합니다. 집단 선택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집단 간의 경쟁과 일정 수준의 집단 고착성이 필요합니다. 서로 다른 집단들은 이타적인 개체들의 비율이 달라서 서로 다른 적합도를 가집니다. 예컨대 한 집단의 80%가 이타적이라면 오직 20%의 이타적인 개체를 지닌 집단보다 더 강합니다. 다수준 선택의 강점은 이것이 DNA나 유전자 수준에서 뿐 아니라 문화적 의미로도 확장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조직간의 경쟁을 분석 할 때 다수준 선택이론은 유전적 요소 뿐 아니라 문화적 요소도 후천적으로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다수준(집단) 선택은 하나의 조건이 성립하기만 하면 협력의 진화를 허용합니다. 수학적으로 비용과 편익의 비율이 전체 집단의 숫자와 개별 집단 크기의 비율에 1을 더한 것보다 커야 합니다. 이를 쉽게 해석하면 다수준 선택의 메커니즘은 ‘많은 소집단이 존재할 때 잘 작동하고 몇 개의 거대 집단이 존재할 때는 잘 작동하지 못합니다.”



 ‘직,간접상호성’과 ‘공간선택 및 네트워크 진화’, 그리고 ‘집단 선택’에 대한 통찰은 우리가 기업, 조직의 형태와 구조를 어떤 식으로 구성할지에 대한, 혹은 왜 새로운 문화적 패러다임 앞에서 유연한 ‘도시적 기업’들이 ‘협력과 신뢰’를 강조하며 ‘뭉쳐있되 작은 규모로’ ‘따로 떨어져 느슨하게’ 연결하는 전략을 취하는지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습니다. 일련의 맥락에서 진화생물학이 도출한 협력을 통한 생존과 성장의 전략은 이렇습니다.




첫째,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협력을 직관화 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라. 


 그 환경은 공간 선택과 다수준 선택 이론에 따라 ‘협력자들이 소규모 집단’으로 여기 저기 많이 뭉쳐 있을 수 있도록 하고 그들 간을 느슨하게(허브 노드를 통해) 연결하는 것입니다. 


둘째, 그 안에서 ‘의식적으로’ 직접 상호성과 간접 상호성이 발현될 수 있도록 하라.


 다수준 선택 혹은 공간 선택을 통해 직관적으로 번성한 협력에 직접 상호성과 간접 상호성의 ‘의식적인 노력’이 더해지면 조직은 좀 더 건강한 ‘협력 문화’를 구축할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진화생물학의 통찰은 그 오랫동안 종교, 철학이 도출한 ‘황금률’과 동일한 결론을 내놓습니다. 사랑, 희망, 자비가 가장 거대한 문제들을 푸는 데 필요한 핵심 요소라는 것입니다. 자연의 경쟁적인 속성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기는 전략은 ‘자비로운’ 속성을 갖는 것입니다.


 "희망을 가지고 자비롭게 대하고 용서하라. 새로운 존재를 만나면 협력의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그와 협력의 기초를 세울 수 있기를 희망하라." 


 용서는 누군가 나를 배신했더라도 협력에 근거해 관계를 재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것입니다. 자비는 다른 사람과의 상호 작용에 있어 대체로 근시안적인 관점을 취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누가 나보다 잘하고 있는지 누가 나보다 파이의 더 큰 몫을 가져갔는지 한탄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대신 나는 동일한 심지어 내가 다소 작은 몫을 누리더라도 전반적으로 생산적이고 도움이 되는 상호 작용을 택할 것입니다. 이럴 때 나눌 파이가 훨씬 커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타적인 인간’에 대해 우리가 생각해 볼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것은 아직 우리 인류가 풀지 못한 문제입니다. 어쩌면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생각해 봐야할 딜레마는 우리의 ‘이타성’과 ‘협력’은 보는 관점에 따라 ‘이기심’과 ‘악덕’으로 얼마든지 치환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 대전, 무차별 민족 학살, 집단 범죄와 조직적 은폐는 진화가 이야기하는 인간의 ‘협력’, ‘이타주의’ 메커니즘의, 어두운 단면입니다. 그 세계에서 협력은 동료를 도와 ‘내 양심을 희생해’ 유무형적 폭력을 ‘함께’ 행사하는 것이고 폭력에 저항하거나 진실을 알리려 한 사람들, 혹은 아무것도 모르는 선량한 사람들은 배신자가 됩니다.


 진화 생물학의 패러다임을 두번이나 불러 일으킨 에드워드 윌슨 역시 그런 견지에서는 항상 ‘배신자’의 위치에 속합니다. 협력이 있는 그곳에는 또 언제나 착취가 있습니다. 어떤 협력은 때때로 맹목적인데 누군가는 그것을 철저히 악용하려 합니다. 마틴 노왁의 시뮬레이션에서 협력과 배신은 늘 진동합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협력은 왔다 가고 찼다가 기운다’


 다음과 같은 두 측면에서 우리에게는 단순히 과학적 관점에서 ‘협력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대비하는 것 이상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속한 조직 내에 초점을 맞춘 ‘제한된 이타성’을 넘어서서 ‘보편적 올바름’에 대해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그것은 우리 개인에게도, 나아가 기업/조직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덕목입니다. 이는 어쩌면 진화생물학적, 과학적 통찰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도전적 과제인지도 모릅니다.


과학이 밝혀준 사실은 많은 동물이 유용함과 해로움의 가치에 의존해 결정을 내리지만, 오직 인간만이 복잡한 계층 구조 결정 트리를 이용해 실시간으로 상황의 의미를 역동적으로 평가하고 그 순간에 개인의 안녕과 관련된 조치를 취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인간만이 미래, 심지어 선택 가능한 일련의 미래를 상상하고 계획합니다. 오직 인간만이 의식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양날의 검입니다. 우리가 앞서 제시한 협력의 딜레마는 인간 사회를 역동적으로 진화시켜 온 동시에 서서히 인류가 공동의 위험을 느끼고 고민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변화가 더디게 일어났지만 최근 시기는 매우 급격하고 과격한 변화가 있어 났습니다. 기후, 환경 변화도 그 중 하나입니다. 우리의 좁은, 때로는 맹목적인 협력, 이타심이 양날의 검 한쪽이라면 우리에게는 아직 다른 날이 남았습니다.


 우리는 협력과 이타성의 범주를 ‘의식적’으로 넓히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앞서 정리한 협력의 법칙을 지혜롭게 활용하되 그 ‘협력’에 대한 경계와 질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각자의 자리에서 고민해야 합니다. 오직 ‘자신을 의식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인간 만이 인류의 선을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이기심을 극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깨달음을 바탕으로 조금 더 ‘보편적 올바름’에 다가선 노력을 제안하고 기울일 수 있습니다.


 ‘보편적 올바름’ 혹은 ‘좋음’이란 여전히 모호하고 논쟁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설명하기 힘들어도 우리는 빌게이츠, 엘 고어의 은퇴 이후의 삶 – 기후 변화에 대한 전지구적 대응을 위한 연구에 투자하고 노력하는 – 에 박수를 보냅니다. 가렛 하딘_Garrett Hardin은 ‘공유지의 비극(Tragegy of the Commons)’[6] 문제를 푸는 열쇠는 과학 기술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도덕성의 근본적인 확대”가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문제의 해결은 오직 윤리와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에 달려 있습니다. 기술은 그 다음입니다. 요컨대 우리는 궁극적으로 협소한 시야를 넘어 지구적 규모로 서로 협력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먼 길을 돌아 우리는 다시 ‘도덕적 인간: 가치판단이라는 숙제’에서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로 돌아왔습니다.


 "보편적 올바름이란 존재하는가?" 라는 문제 말입니다. 앞에서 우리가 논의한 바는 ‘우리가 속한 부족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협력하므로, 궁극적으로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보편적 합의에 이르기 어렵다’ 입니다. 환경이라는 문제를 놓고 이뤄지는 ‘매우 느리지만 그래도 유의미한 다각적인 전지구적 협력’은 그나마 운이 좋은 편에 속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타적 행동의 동기에 대해 에드워드 윌슨을 비롯한 열린 과학자들이 내놓은 새로운 해석은 이타적 욕구가 개체의 근원적이고 원초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유전적 신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회적/문화적 맥락을 거치며 자동화될 수 있는 도구라는 것이다.


 이에 동조하는 도덕심리학자들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인간의 욕구를 도구적 욕구_instrumental desire와 궁극적 욕구_ultimate desire로 구분합니다. 궁극적 욕구는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물을 마시는 것과 같은 기초적 욕구를 말합니다. 도구적 욕구는 궁극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필요한 부차적 욕구를 가리킵니다. 예컨대 배고픔을 해결해주는 대상인 부모에게 다가가는 행동은 도구적 욕구입니다. 궁극적 욕구는 상대적으로 그 종류가 한정되어 있지만 도구저 욕구는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다양합니다. 또 도구적 욕구에는 궁극적 욕구에 가까운 것도 있고 궁극적 욕구로부터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는 욕구도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특정한 도구적 욕구가 궁극적인 욕구와 이어지는 경험을 자주 갖는다면, 그 도구적 욕구는 궁극적 욕구와 매우 유사해지면 그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직관적으로 기능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자동화된 도구적 욕구를 ‘교육된 직관_educated intuition’ 이라 부른다. 이에 따르면 도덕적 판단과 행동들 역시 초기에는 많은 추론과정을 거쳐 도구적 욕구로 발전했지만 반복적인 학습을 거치면서 이러한 도구적 욕구들이 점차 직관적이고 정서적인 욕구로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대부분의 도덕적 판단과 행동, 의사결정이 논리적인 과정보다는 정서적인 과정을 거쳐 직관적으로 표출된다는 다른 여타의 자연과학적 통찰과도 일맥상통하는 동시에 우리가 ‘도덕에 대한 어떤 교육, 학습’을 제시할 것인가에 대한 열려 있는 과제도 안깁니다. (보편적 올바름에 대해 우리가 합의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작게나마 있다면, 인류는 이것을 반복적으로 제시하고 학습시킴으로써 ‘직관화’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이 열린 지점에 대해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여전히 많지 않다. 다만 우리는 우리 조직, 기업, 도시 혹은 국가, 나아가 인류가 이 문제(보편적 올바름이 무엇인지에 대한 도덕적 논쟁)에 대하는 ‘올바른 태도’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실험심리학자이자 도덕철학자 조슈아 그린Joshua Greene 하버드 대학 교수는 저서 『옳고 그름Moral Tribes』의 말미에 이 문제를 놓고 우리에게 필요한 6가지 규칙을 제안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인용하면서도 우리의 의견과 맥락을 조금 더 보탠 제안과 설명을 하려 합니다. 보편적 올바름에 끝까지 도달할 순 없더라도 태도를 ‘내재화’ 함으로써 여전히 불완전하지만 좀 더 나은 ‘확장된 협력’, ‘좋은 열망의 다각화’가 이뤄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  도덕적 이슈 앞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내재된 시스템 1, 2중 어떤 것을 쓸 것인지 ‘의식해야 한다.’


우리의 도덕적 직관은 수백만 년에 걸친 생물학적 진화와 수천년에 걸친 문화적 진화, 그리고 수십년에 걸친 개인적 경험에 의해 각인된 ‘코끼리’입니다.(도덕적 인간 편의 ‘꼬끼리’와 ‘기수’의 비유 참고) 그런데 때로는 도덕적 직관이 문제해결에 유리한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도덕적 뇌는 공감, 사랑, 우정, 감사, 명예심, 수치심, 죄책감, 충성심, 겸손, 경외감 등의 감정을 가지고 때때로 우리 자신의 이익보다 다른 사람의 이익을 앞세우도록 합니다. 마찬가지로 분노와 혐오의 감정은 우리에 비해 ‘나’를 지나치게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피하거나 처벌하도록 몰아 댑니다. 이는 우리 안에 내재된 ‘자동설정’ 모드, 즉 시스템 1입니다.


 일련의 모드는 방금 이야기했듯 ‘나’대 ‘우리’의 문제에서는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가능한 거짓말 하거나 훔치지 마라. 경쟁자를 중상모략 하지 말라. 술마시고 운전하지 마라"와 같은 것은 설령 시스템 2에서 정당화가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시스템 1을 신뢰해도 어느정도 괜찮습니다.


 단, 시스템 1이 그대로 작동했을 때 문제가 되는 도덕적 이슈가 있습니다. 조슈아 그린은 이를 ‘상식적 도덕의 비극’ 혹은 ‘우리 대 그들의 문제’라 부른다. 우리는 ‘그들’보다 우리를 소중히 여기는 부족주의적 직관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다른 도덕적 직관을 뛰어넘는 최상위 우선순위를 갖는 직관일 수도 있습니다. 또 여러 부족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협력합니다. 그리고 부족들은 서로 다른 고유명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련의 특성과 차이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공정한지에 대해 저마다 편향된 지각을 하게 됩니다. 일련의 도덕적 이슈에 대해서는 우리는 의식적으로 시스템 1을 멈추고 수동모드로 옮겨야 생각해야 합니다. 인지과학자들은 우리가 인식의 불일치를 인식하는 훈련, 그리고 그것을 인식했을 때 시스템 1을 멈추고 의식적으로 시스템 2를 사용하는 훈련이 뇌과학적으로 가능하고 또 유용하다고 주장합니다. 도덕적 맥락을 분별하고, 갈등이 생기면 수동모드로 전환하려 훈련하고 노력합시다.


둘. 우리에게 필요한 소통의 최소한의 자세는 ‘논증’하는 것이다. 논증의 여지를 닫아버리는 닫힌 태도를 삼가자.

 

 예컨대 권리와 의무의 수사적 남용은 생산적 소통을 막습니다. 미리 결론을 전제하지 않은 채 누구에게 어떤 권리가 있는지 또 어떤 권리가 다른 권리보다 더 중요한지를 알아낼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권리와 의무를 사랑하는 까닭은 그것이 우리의 주관적인 느낌을 마치 도덕적 실체인 것처럼 제시할 수 있게 해주는 편리한 합리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권리를 방패로 삼아 우리가 이미 이룩한 도덕적 진보를 방어할 수 있습니다. 합리적 논증이 쓸모 없는 상황에서는 권리를 수사적인 무기로 삼을 수 있지만 이를 함부로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권리’를 주장할 때는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 역시 시스템 2를 의식적으로 써서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단순히 합리적인 근거나 대화의 도구 없이 권리를 호소하는 것은 논증을 펼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대화가 끝났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런 견지에서 우리는 지구 종말론과 같은 묵시론적인 닫힌 주장 역시 이 범주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종말론적 환경주의는 극단적 행위 – 기술 개발의 과격한 멈춤과 같은 - 가 아닌 이상 모든 협력적이고 생산적인 논의 가치가 있는 대안적 노력 마저도 ‘악마’로 만들어 버립니다. 종말론적 환경주의는 지금 당장 지구가 멸망할 것처럼 인류가 이룬 거의 모든 것들을 – 도시와 도시적 기업을 포함한 – 적대시 하지만 도시의 승리와 그로인한 풍요는 역으로 많은 재앙과 재난을 막았습니다. 통계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 한스 로슬링Hans Rosling은 『팩트풀니스Factfulness』에서 세계는 점점 나빠지기만 한다는 거대 오해에 대해 통계적 수치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환경과 관련해 오존층 파괴 물질은 1970년에 비해 2016년 약 98% 감소했고, 매연입자 이산화황의 1인당 배출량은 1970년 대비 2010년 약 63% 감소했으며, 재난으로 인한 사망자수는 1930년대와 비교해 2010년대 약 93% 감소했습니다.[6]


 MIT의 기후학자 케리 이매뉴얼_Kerry Emanuel은 우리가 실용주의적 관점을 바탕으로 ‘경제발전’과 ‘지구의 평균기온 상승 억제’를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에 따르면 부유한 국가일수록 재난에 대한 예방 노력 및 회복 탄력성이 뛰어납니다. 때문에 아직 경제적으로 발전하지 못한 국가, 사람들을 좀 더 풍요롭게 만들어 회복 탄력성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동시에 지구가 돌이킬 수 없는 강력한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위험은 지구의 평균기온이 높아질수록 커지므로 우리는 전지구적 협력을 통해 온실가스 배출 총량을 줄이고, 평균 기온 상승을 최대한 억제하는 것을 목표 삼아야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양쪽의 극단 보다 중간 어딘가에서 절충안을 마련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경제 성장을 추구해 많은 이들을 가난에서 건져내는 일, 기후 변화에 맞서는 일, 이 두가지는 양자택일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도덕의 올바른 태도는 ‘극단’이 가진 ‘맹목성’을 경계하고 배제하는 것입니다.


 칼 포퍼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저서에서 과학적 탐구에서 중요한 것은 반증 가능성_falsifiability이라 주장했습니다. 이는 모든 주장은 반박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으로, 이러한 태도가 있어야만 진정한 논증과 진보가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포퍼는 “과학의 발전은 우리가 우리의 이론을 오류 가능하게 만들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주장과 논의는 언제나 [틀릴 가능성]을 남겨 두어야 합니다. 언제나 수정 가능하고, 새로운 증거와 논거에 의해 바뀔 수 있다는 점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논증의 여지를 닫아버리는 닫힌 태도는 진정한 소통과 대화를 방해하는. 생존과 성장의 [적]일 수 있습니다.


셋.  사실과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추고, 이를 문화화 하자.


올바름의 이슈에 대해 어떤 제안이 좋은지 나쁜지를 알려면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고 효과가 어떠할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 중의 대다수는 환경 규제부터 의료보험 제도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잘 이해하지도 못하는 여러 정책들에 대해 서슴없이 판단을 내립니다.


 공적인 올바름에 대한 이야기는 훨씬 더 능동적이고 꼼꼼하게 전개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정책 혹은 방향을 우리가 선호하는지 또는 반대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알아야 할 뿐 아니라 일련의 행위가 어떻게 우리 세계에서 상호작용하며 작동하는지를 알기 위해 스스로도 노력해야 합니다. 또 상대방에게도 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사실과 상호작용에 관심을 갖고 학습하는 ‘태도’를 문화화해야 합니다.


 더불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론적으로든 실제적으로든 모르겠을 때는 우리의 무지를 겸허히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아는지], 그리고 [무엇을 모르는지]에 대해 늘 의식하고, 일단 내 뜻을 관철시켜 [이기기 위함]보다 시행착오를 전체로 진짜 [사실, 상호작용]이 어떻게 되는 것인지를 탐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넷. 편향된 공정성을 경계하자.


 우리가 공정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가 아닙니다. 이 사실을 의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방법을 무의식적으로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편향된 공정성도 일종의 공정성이기 때문에 이것이 한번 편향되면 편향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특히 그것이 우리 자신의 공정성일 때는 더욱 어렵습니다.


 우리는 개인으로서도 또 부족의 충성스런 일원으로서도 그렇게 행동하곤 합니다. 때로는 개인적 희생을 감수함으로써 우리 부족에게 편향된 이기주의를 촉진하곤 합니다.(그것이 내가 속한 내집단에는 이타주의일 수 있어도 그 내집단을 벗어난 다른 개인, 집단에는 철저히 이기주의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용인되는 정의가 아닐 수 있음을 의식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다섯. 공통의 통화를 사용하자.(열린, 과학적 태도 갖추기)


설명하긴 힘들지만 동시에 모두가 인정하는 바는 우리 인류는 때로는 논쟁적인 ‘권리’, ‘정의’ 문제보다 더 근본적인 두가지에 의해 함께 얽혀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우리는 모두 행복하길 원합니다.(그것의 실현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 누구도 스스로 불행하길 원치는 않습니다. 둘째, 우리가 모두 그것이 유전적인 것이든, 사회문화적인 것이든 최소한의 황금률(직, 간접 상호성의 격연이기도 한)을 이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조슈아 그린은 이 두가지를 결합함으로써 우리가 원칙에 기초한 타협을 위한 체계인 공동 통화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이를 바탕으로 ‘부족적 본능들이 제기하는 반론’을 넘어 무엇이든 최선의 결과를 낳는 것을 하기로, 무엇이든 우리를 전체적으로 가장 행복하게 만드는 것을 하기로 합의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더 나은 결과를 낳을지 알아 내기 위해서는 가치의 공동 통화와 함께 사실의 공동 통화도 필요합니다. 세상에는 지식의 여러 원천들이 존재하지만 사실과 지식의 측면에서 신뢰받는 것은 과학이며 엄밀히 말하면 ‘과학적 태도’입니다. 우리는 관찰 가능한 증거를 바탕으로 서로 배우고자 하는 열린 태도를 통해 ‘더 나은’ 무언 가에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여섯. 삶의 지경territory을 넓히자.


 이 글을 쓰는 우리를 포함한 우리는 대부분 당장의 현실과 우리 삶 안에 갇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제안을 하면서도 한없이 부끄럽다.) 그 안에서 우리는 대부분 불만족합니다. 때로는 그 불만족이 성취와 성장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그 몰입은 때때로 중독이 되거나 끝없는 갈증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런 와중에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지경을 넓히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삶의 지경을 넓힌 다는 의미는 갇혀 있는 내 주변 세계를 벗어나 이질적인 세계 혹은 더 큰 세계에 대해 작은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 노력은 빌게이츠나 제프 베이조스 처럼 경제적 자유를 누리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적 관점이 아닌 절대적 관점에서 풍요로운 세계를 살고 있는 우리는 작은 희생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삶을 극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족적 삶을 위해 설계된 동물이므로 저 먼 곳의 낯선 사람들에게 느끼는 관심이나 공감은 미약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의 가장 ‘사치스러운 사치’가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는 것 또는 교육이나 의료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더 밝은 미래를 선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단연코 유전자와 혹은 사회/문화적 설계를 초월한 성인이 될 수 없을테지만 최소한 매우 부분적이고 파편적이지만 내 삶의 영역 바깥의 세계를 위하고자 하는 진실한 노력이 완전한 자기합리화보다(‘어차피 내 부분적인 노력은 도움이 안돼’와 같은) 낫다는 의식을 바탕으로 이에 대한 우리의 뿌리깊은 게으름을 변화시키기 위해, 삶의 지경을 넓히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타주의에 대한 과학적 탐구는 유전자를 지나 결국 다시 ‘인간의 태도’로 열린 결말을 맞습니다. 우리는 유전자의 한계를 벗어나 집단, 공간, 상호성의 과학을 토대로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진화를 꾀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내재된 ‘새로운 유전자’는 우리가 공동으로 추구하기로 합의한 조직의 ‘원칙, 가치’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원칙과 가치를 조금 더 다듬고 발전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나아가 그 원칙과 가치에 진실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 기업, 기업 내 조직에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실험 – 원칙 중심의 자유와 책임 문화 – 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함의를 갖습니다. 우리는 우리 개인의 삶을 위해, 그리고 우리가 속한 집단 세계를 위해, 나아가 우리가 속한 세계를 벗어난 좀 더 광범위한 공동의 세계를 위한 ‘공동의 통화’, 원칙/가치를 수립하고 그것을 의식하는 데 다시금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이 책의 전반에서 암묵적으로 전하고 있지만, 그 역할을 의외로 ‘기업 조직’이 좀 더 잘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많은 회의론, 선한의도와는 다른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구글의 ‘Don’t be evil’이라는, 공동체에 암묵적으로 내재화된 ‘통화’가 기업의 생존과 성장을 건강히 하는 강력한 기제가 됨과 동시에 기업과 기업, 기업과 국가와 같은 좀 더 확장된 범주에서 인류 공동의 문제에서 ‘악마evil’가 무엇이고 ‘옳음’이 무엇인지 공동의 통화를 마련할 수 있는 생산적인 논의의 장을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마틴 노왁은 이 과정에서 특히 우리가 간접 상호성 전략 중 하나인 ‘평판’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을 권고하는데 간접상호성이야말로 지구상의 생물 종 중 유일하게 인간만이 취할 수 있는 전략입니다. 그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어떤 사람이, 회사가 국가가 소중한 자원을 허비하는가를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세부적인 내용이 필요합니다.


 최근 부각되고 있는 ESG (Environmental, Social and Governance) 등과 같이 비재무적 요인에 대한 범기업적 협의 및 상호 규약의 움직임은 그 실체에 대한 긍, 부정을 떠나 바람직한 시도이고 필요한 것은 그것을 좀 더 잘하기 위한 평판 전략을 각 기업, 국가가 머리를 맞대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우리는 마을에서 도시, 국가, 기업, 그리고 전 세계를 가로지르는 것에 이르기까지 간접 상호성을 확장해 왔습니다. 이제 지구 네트워크의 높은 연결성 때문에 조직의 ‘평판’은 몇 분만에 지구 전체를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높은 연결성에 따른 새로운 기회는 분명히 위험을 낳습니다. 지구화는 동일화를 낳고 이는 우리를 격변에 보다 취약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금융위기 처럼 미국, 유럽, 아시아 주식에 분산 투자하는 것은 더 이상 예전보다 안전한 방법이 아닐 것입니다. 어느 한곳이 공격받으면 모두 함께 곤두박칠 칠 위험이 크게 되었습니다. COVID 사태로 보았듯 바이러스의 발생은 순식간에 전세계적으로 퍼져 나갑니다.


 우리는 협력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상황들에 대비해 협력이 오랫동안 유지되고 나아가 내향적이고 편협하고 경쟁적이 되는 부족주의적 협력보다는 더 확장된 의미의 협력이 될 수 있도록 배워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보다 광범위하고 사회에 고르게 협력을 함양하려 할 때 혈연주의는 비생산 적입니다. 나아가 문화적 맥락에서 그와 유사한 닫힌 성격의 집단주의, 전체주의, 근본주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개인적 차원이든 집단 차원이든 내적으로 열린 태도를 갖추고 배우고 의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딘이 남긴 유산 – 공유지의 비극의 해법 – 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좀 더 오래 공존하고 우리 다음 세대에게 좀 더 나은, 아니 최소한 더 나빠지지 않는 환경과 사회를 전해 주길 바란다면 우리는 의식적으로 ‘도덕성의 근본적인 확대’를 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다시 반복할 가치가 있는 과학과 마주하게 됩니다. 진화의 과학은 우리가 좀 더 ‘관대하고, 희망적이고, 용서하는 태도’를 취해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신경과학자 조지프 르두_Joseph LeDoux 뉴욕대학교 교수는 인간만이 가진 특유의 ‘의식적인 마음’은 그간 인류가 만든 절망의 뿌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미래에 대한 유일한 희망일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우리는 종으로서 존속해야만 개체로서도 존속할 수 있다. 생물학적 진화가 우리를 구원 해주길 기다릴 수 없다. 진화는 너무 느린 과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지적, 문화적 진화와 같은 조금 더 빠른 변화 방안을 모색해야 하며, 이는 다시 우리의 자기주지적[7]인 뇌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달려 있다. 결국, 우리가 믿고 기댈 수 있는 것은 결국 우리의 의식 밖에 없다.”
          



references

[1] 진사회성eusociality: 진사회성이란 간단히 말해 ‘진정한’ 사회적 조건을 의미한다. 정의상 진사회성 집단의 구성원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서로 협력해 새끼를 돌본다. 또 그들은 일부 구성원이 적어도 자신의 번식 기회 중 일부를 양도해 다른 구성원의 ‘번식 성공률’을 높이는 방식으로 분업도 한다. 진사회성 수준의 고도로 발달한 사회적 행동을 갖춘 종은 생태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사회성은 지난 4억년 동안 육지에서 진화하 수십만 가지 동물 계통 중 겨우 20번 정도밖에 출현하지 않은 매우 희귀한 특성이다.

[2] 마틴 노왁Martin A. Nowak, 로저 하이필드Roger Highfield, 『초협력자supercooperators』사이언스북스, 2012

[3] 데이비드 흄David Hume(이준호 옮김), 인간본성에 관한 논고(A Treatise of Human Nature), 살림, 2005

[4] 애덤 그랜트Adam Grant(윤태준 옮김), 기브앤테이크Give and Take, 생각연구소, 2013

[5] 척도 없는 네트워크(Scale-Free Network): 네트워크의 노드 연결 분포가 멱법칙(power law)을 따르는 특징을 가진다. 즉, 네트워크 분포가 무작위적으로 고르지 않고 특정한 군데군데 뭉침과 흩어져 있는 것들이 반복되는 특징이 있다. 예컨대 대부분의 노드는 몇 개의 연결만을 가지지만, 소수의 노드는 매우 많은 연결을 갖는다. 이러한 네트워크는 자기 조직화(Self-organization) 과정을 통해 형성되며, 사회적 네트워크, 인터넷, 생물학적 네트워크 등에서 흔히 발견된다.

[6] 공유지의 비극: 가렛 하딘Garrett Hardin이 1968년 《사이언스》에 게재한 동명의 논문에서 제시한 개념이다. 논문에서 하딘은 목축에 종사하는 주인들이 어떻게 공공의 소유로 남겨진 목초지가 과잉 이용되도록 방치하는지를 묘사했다. 소유주들은 이러한 남용 때문에 공유지의 풀이 소멸하여 결국 자신을 포함한 모두에게 해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방치한다. 이들은 자신이 가축을 목초지에 풀지 않아도 다른 이들이 와서 사용할 것이기 때문에 결국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 채 목초지가 버려질 것이라 예상한다. 때문에 자신의 동물을 기어이 그곳에 풀어놓게 된다. 전체 공동체에 돌아가는 과잉 이용에 따른 비용에도 불구하고 공공 지대에 소들을 풀어 가축 소유주가 일정한 이득을 얻을 수 있다면 이 비극이 생겨난다. “저 공공 목초지에 내 소를 한 마리 더 풀까? 나한테 돌아오는 이득은 뭐지? 모두에게 돌아가는 손해는? 내가 소를 더 푼다 해도 누구도 모를거야. 다른 사람들이 풀어 놓은 소들이 내가 푼 소들보다 훨씬 더 많잖아.” 공유지의 비극에서 문제의 근원은 ‘남용’에 있다. 이는 우리 환경 문제에서도 심지어는 인테넷이라는 디지털 목초지에서도 발견된다. 인터넷 공짜 서비스 / 제품의 취지는 ‘모두를 이롭게 한다’이지만 동시에 이 공간은 배신자와 사기꾼에 취약하다. 공짜의 대가로 인한 ‘광고/마케팅’에 노출되는 순간 더 그렇다.

[7] 한스 로슬링Hans Rosling, 올라 로슬링Ola Rosling, 안나 로슬링Anna Rosling / 이창신 옮김, 『팩트풀니스 Factfullness』, 김영사, 2019

[8] 조지프 르두Joseph LeDoux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유기체와 달리 독자적으로 작동하는 구성요소를 하나 가지고 있는데 바로 뇌의 신경 네트워크다. 그것은 원한다면 신체 나머지 부분의 생존 임무와 목적을 약화시키고 배제하도록 결정할 수 있다. 이것이 곧 인간의 의식, 특히 자기주지적이고(자기 자신에 대한 심적 모델을 형성하는 자기인식 능력) 반성적인 자기인식의 바탕을 이루는 네트워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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