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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어 Sep 17. 2023

내 불꽃은 하늘 보기나 걷기일지도 몰라, 나 잘 걷잖아

  엄마는 요즘 피아노를 친다. 그럴듯한 곡 하나 연주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피아노를 친다. 핸드폰에 '심플리 피아노'라는 앱을 깔아서 하루에 30분 정도 뚱당 거리신다. 방에서 엄마의 피아노 소리를 듣고 있자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배경음악은 그렇게 화려할 수가 없는데 막상 엄마가 연주하는 음은 미레도레 미미미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엄마는 눈가의 미간을 찌푸리고 한껏 집중한 모습으로 피아노를 치신다. 이렇게 30분 정도치고 나면 소화도 잘되고 기분도 좋다면서 엄청나게 신나 하고 뿌듯해하신다. 나는 피아노를 치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웃고, 엄마는 그런 나를 보며 머쓱하다는 듯이 웃는다.


  아빠는 낚시에 푹 빠지셨다. 회사 일로 몇 년간 힘들어하셨던 아빠는 그 한을 낚시에 다 푸시는 듯하다. 평일에도 하루 걸러서 퇴근하고 밤낚시를 하러 가시고, 어떨 때는 휴가도 내가며 낚시하러 다니신다. 주말에는 말할 것도 없다. 언젠가부터 토요일에 눈을 뜨면 엄마아빠가 보이지 않는다. 아침 일찍 낚시를 가셨기 때문이다. 밤, 낮 할 것 없이 낚시하러 다니는 아빠 덕분에 엄마도 낚시꾼이 되셨다. 아빠는 눈이 아주 나빠서 낚싯줄이 꼬이거나 끊기면 다시 푸시지 못하기 때문에 조수인 엄마가 꼭 필요하다. 낚시가 잘 되는 날에는 카톡의 가족 대화방이 시끄럽게 울린다.

"얘들아~!~! 이거 봐라~~~ 고등어 잡았다~~~"
세상 해맑게 웃으며 고등어를 들고 있는 아빠와 엄마의 격양된 목소리. 나와 동생은 같이 맞장구를 쳐준다.
"우와~~~ 고기 짱 크다~!!~"라고 보내거나 기뻐 춤추는 이모티콘 몇 개를 보내면서.

  휴학하고 집에 돌아와서 한동안 앞으로 어떻게 살까 라는 고민에 푹 빠져있었다. 처음으로 나의 인생길에서 고속도로가 아닌 옆길로 빠졌기 때문이다. 언제나 남들 하는 건 다 하면서 살던 내가 남들 다 가는 길이 아니라 '나만의 길'을 가보자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글도 열심히 쓰고, 유튜브도 해야지. 휴학하는 동안 무언가 대단한 걸 이뤄내서 사람들에게 보여줘야지. 나는 이만큼 할 수 있는 사람이야. 나는 이만큼 대단한 사람이야. 하지만 내 현실은 그저 휴학한 스물두 살 청년일 뿐이다. 처음으로 어딘가에 속해있지 않자 나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새로 구한 알바는 힘들지 않지만 매일 반복되는 일과가 지겹게 느껴지기도 했다. 내 꿈은 저기 멀리 빛나는데, 현실의 나는 그냥 이렇게 아르바이트나 하고 있구나. 나도 결국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게 없구나.


  그러다가 저 문장을 만났다. 저 대사는 '소울'이라는 애니메이션의 주인공 22번이 하는 말이다.
"내 불꽃은 하늘 보기나 걷기일지도 몰라. 나 잘 걷잖아."
  소울의 또 다른 주인공 '조 가드너'는 재즈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 오랜 꿈이다. 현실은 학교의 음악 선생님이지만 언제나 재즈 피아니스트가 되어 무대에 서는 자신을 꿈꾸고 또 꿈꾼다. 그러다 마침내 우연한 기회로 유명한 재즈밴드의 피아니스트가 되어 무대에 서게 되고, 실력을 인정받아 그 밴드의 정식 멤버가 된다. 드디어 꿈을 이룬 것이다. 그럼 조 가드너는 어땠을까? 날아갈 듯 행복하지 않았을까? 음악에 한 것 심취에 피아노를 연주하고, 멤버들의 인정을 받고, 많은 관객들의 박수를 받는다. 그런데 그다음은? 그다음은 뭐지? 꿈을 이룬 다음에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 걸까? 조 가드너는 알 수 없는 공허함에 빠진다. 꿈을 이루고 나면 새로운 인생이 펼쳐질 줄 알았으나 여전한 자신의 인생을 보며 혼란스러워한다. 지하철 안의 사람들은 여전히 지루해 보이고, 세상의 박수는 잠시 뿐이다.

  그때 22번의 말을 떠올린다. 자신의 특기는 하늘 보기나 걷기라고 말하는 22번. 해가 지는 하늘을 보며 감탄하고, 떨어지는 낙엽에 신비로워하며, 피자를 먹으며 행복해하던 22번. 사실 우리가 꿈을 이루던, 이루지 않던 우리의 일상은 계속된다. 우리가 특별한 사람이든, 아니든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세상은 우리가 꿈을 갖지 않고, 무언가에 열정을 쏟지 않으면 큰일 날듯이 말한다. 행복은 꿈을 이뤘을 때만 주어지는 게 아닌데 말이다. 일상 속에서 놓치고 있는 행복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왜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에만 집중하게 되는 걸까.

  나는 요즘 산책하며 즐기는 여유가 너무 좋다. 당신들이 추천해 준 노래를 들으며 당신들의 마음을 어렴풋이 나마 짐작해 보는 일이 좋다. 알바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엄마, 아빠와 함께 먹는 저녁이 맛있다. 엄마는 식사는 언제나 즐겁고 맛있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나는 머리를 가득 채우던 고민을 멈추고, 내 눈앞의 맛있는 밥에 집중한다. 수혁이와 언제나처럼 수다를 떠는 게 좋다.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친구에게 연락해 같이 가자고 말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행복이 얼마나 많은가.

  오늘도 엄마는 피아노를 치고, 아빠는 낚시를 간다. 나는 또 노트북을 펴서 글을 쓴다. 언제나처럼 그렇게 산다. 대단한 작가가 될 수도 있고 그러지 못할 수도 있다. 사실 그러지 못할 확률이 더 높다. 그런데 그럼 뭐 어떤가. 산책할 정도의 여유가 있고, 친구들에게 맛있는 밥 한 끼 사줄 수 있고, 당신들이랑 웃고 떠들 수 있다면 그게 행복한 인생 아닐까. 나는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꾸준히 쓸 테니. 당신들이 내 글을 읽으며 함께 웃고 울어준다면 그것만큼 기쁠 일이 없을 것이다. 나는 앞서가기보다 당신들의 뒤에서, 옆에서 천천히 걷고 싶다. 당신들이 산책하는 법을 잊었을 때, 노을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지 오래되었을 때 조심스레 다가가서 알려주고 싶다. 그렇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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