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곳 없는 이의 몸과 마음은 언제나 부산스럽기 마련이다. 갈 곳을 구하기 위해 이리저리 발 바쁘게 움직여도 모자랄 판에 S는 누워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이렇게 몸이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는 마음이 작동한다. 부산스러운 마음은 당장 오늘 하루를 생각하기보다는 먼 미래를 자꾸 데리고 온다. 그 먼 미래의 S는 보통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누워만 있거나 엉엉 울고 있거나 주변에 남은이 하나 없이 혼자 있거나…. 하는 등의 극단적으로 망한 상태이다. 이렇게 있다가는 정말 그 미래가 코 앞으로 닥쳐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 S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무것도 아닌 미래를 막기 위해 S는 자리에 앉는다. 앉아서 노트북을 켠다. 노트북에는 이미 지원했거나 앞으로 지원할 회사의 목록들이 주르륵 나와 있다. 전시회사, 엽서회사, 메거진 회사, 옷 회사…. 회사의 종류는 가지각색이다. 이 중에서 하나를 골라 회사의 입사 지원서 창을 킨다.
OO 기업의 직원 채용에 관심을 가진 동기는 무엇인가요?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 모니터를 응시하다가 다음 질문을 본다. 본인이 생각하는 OO은 어떤 브랜드인가요? OO에서 본인의 미래를 그려본다면 어떤 모습인가요? S는 이전보다는 눈을 조금 더 뜬 상태로 모니터를 응시한다. 하지만 여전히 알 수 없다. 지원동기도 이 브랜드가 어떤 브랜드인지도 이곳에서 그리는 나의 미래도 아무것도 알 수 없어서 창을 닫고 J에게 온 카톡을 읽는다. J는 지금 몹시 화가 나 있다. 이전 직장의 상사가 J가 어리고 착하다는 걸 이용해서 그녀를 곤란에 빠트렸기 때문이다. 상사의 만행으로 인해 J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철없고 생각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J는 억울함과 화를 참지 못하고 S에게 전화로, 카톡으로 자신의 고통을 토로한다. S는 화가 난 J를 위로하는 법을 알고 있다. 그 이야기가 얼마나 길든 다 들은 다음에, 딱 한 마디 하면 된다. 아 그냥 다 죽어라!!! 그러면 J는 ㅋㅋㅋ를 아주 여러 개 보내며 통쾌해한다.
그렇게 J와 한참 욕지거리를 하고 있는데 한 편의 메일이 도착한다. *이훤 시인님이 보낸 '덤'이라는 시가 도착했다는 알람이 수많은 욕 위로 울린다. S는 순간 욕을 멈추고 메일로 들어가 시를 확인한다.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어린이야, 십수 년 지나 너를 다시 만나게 되었구나
살던 집으로부터 나는 멀리 왔다
글쓴이가 어린 글쓴이에게 건네는 말이구나. 얼마나 멀리 왔을까? 나도 꽤 멀리 갔는데. 라고 생각하며 나머지 시를 읽어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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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에는 너도
횡단보도를 걷다 갑자기 슬프게 된다
볕 좋고 버스가 도로를 오가고 새가 하늘을 가로지르는데
살아 있다는 사실에 숨이 부친다
믿을 수 없이 쾌청한 날도 가끔 있다
S의 마음에는 순간 횡단보도를 걷다 갑자기 슬프게 된 날들이 떠오른다. 하늘은 맑고 집은 깨끗하고 눈앞에는 갓 익은 계란후라이가 있는데도 왈칵 터져 나오던 눈물을 막을 수 없던 날들이 생각난다. 그리고 자신만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에 조금 안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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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완주가 어려워서 무어든 잘 시작하지 않게 되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웬만하면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조심스런 친구가 되었다
어린이야
건널목에서는 부러 씩씩해지지 않아도 된다
너의 슬픔을 들켜도 된다
어린이야
너의 슬픔을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돕지 못한 친구의 마음을 집에 가져오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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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끝까지 다 읽고 나자, S는 조금 울고 싶은 마음이 된다. 하지만 울지는 않는다. 울고 싶은 마음으로 울고 싶은 마음을 지닌 친구들을 떠올린다. 완주가 어려워서 무어든 잘 시작하지 않는, 기다리는,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조심스러운, 건널목에서 부러 씩씩한 척하는, 슬픔을 설명하기 위해 애쓰는, 돕지 못해서 아파하는 표정이 떠오른다. S는 울고 싶은 마음을 지닌 친구들에게 이 시를 보낸다. 아무런 설명 없이 안부도 묻지 않고 그냥 시만 보낸다. 나 너의 마음 알아. 나도 그래. 하는 교만한 말은 하지 않는다. 친구들의 수만큼 우는 표정도 이유도 다양해서 무어라 덧붙일 말을 찾지 못한다.
S는 다시 부산스러운 몸과 마음을 다잡고 다음 회사의 지원 공고를 읽는다. 현재 OO 매거진의 아쉬운 점 및 개선 방향성을 작성해 주세요. OO 매거진의 방향성 및 입사 후 전개하고 싶은 콘텐츠 시리즈를 기획해 제안해 주세요. 아아- 욕도 하고 시도 읽고 울고 싶은 마음과 그 마음을 알아줄 친구들에게 연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S는 저 질문들에 대한 답을 모른다. 사실 모르는 게 아니라 알고 싶지도 않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S의 머릿속을 스친다. S가 정말 알고 싶은 건 저런 게 아니다. S는 메거진이 어디가 아쉬운지 어디를 더 개선할 수 있을지 보다 J의 화나고 슬픈 마음을 더 빠르게 진화할 방법을 알고 싶다. J가 분노에서 벗어나 자신의 둥글고 따듯한 마음을 잘 돌볼 수 있도록 돕고 싶다. H가 완주를 두려워하지 않고 일단 출발선에 설 수 있도록 부추기는 말을 찾고 싶다. 얘네들이 언제 가장 외로운지 언제 가장 울고 싶은지 그러다가도 괜찮아지는 때가 오는지 아무것도 아닌 스스로를 잘 견디고 사는지 견디지 못할 때는 어떻게 하는지 같은 것들을 자꾸 묻고 싶다. 제일 알고 싶다.
S는 결국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로 노트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런 것만 알고 싶어해서는 정말 아무것도 못 하고 누워만 있는 때가 금방 올 텐데…. 라고 생각하며 샤워를 한다. 뜨거운 물로 온몸을 씻는다. 샴푸 거품을 내며 지원동기를 생각하다가 지원동기는 이내 쓰고 싶은 글의 한 문장이 된다. 한 문장은 금방 다음 문장을 불러오고 그러다 보면 어느덧 한 문단을 쓰고 있다. 지원동기는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급박한 생계도 오래된 습관을 이기지는 못한다. 물론 이 습관이 S를 가난하게 할지 풍족하게 할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샤워를 끝내고 머리를 말리는 동안 전화가 온다. 이 시간에 전화 올 사람은 몇 명 없다. 일찍 잠에 든 애인이 잠에서 깼나 보구나. 하며 S는 아직 축축한 머리를 뒤로하고 전화를 받는다. 잠에서 막 깬 애인의 목소리는 너무나 취약하다. 웅얼웅얼한 발음으로 무어라 말하지만, S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 하지만 그냥 응응 그랬구나 하며 자신이 여기 있음을 알린다. 그것만으로 충분함을 S는 안다.
*이훤 시인님의 전자우편 서비스 <네 안의 어린이에게> 중 한 편의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