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하루와 반복되는 다짐과 반복되는 노래와 반복되는 실패 가운데에서 이미 경험한 또 다른 반복을 떠올린다. 수능이 막 끝난 2021년 겨울방학의 나는 완전한 하루가 시작되기 전에 두 번쯤 잠에서 깬다. 한번은 이른 새벽이고, 한번은 아침이다. 삼촌과 숙모가 집을 나서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잠에 든다. 다시 눈을 뜨면 빠르면 12시, 늦으면 오후 1, 2시이다. 2층 침대에서 조심조심 내려와 바로 앞 방에서 자는 유를 깨운다. 유는 절대 한 번에 일어나지 않는다. 일단 깨우고 난 후에 거실에 혼자 앉아 멍을 좀 때린다. 그때 이런 일기를 쓴 것 같기도 하다.
'유는 너무 늦게 일어난다. 나는 하고 싶은 게 많은데 유가 일어나기까지 기다리다 보면 하루가 너무 금방 지나간다.'
유가 일어나면 우리의 게으른 하루가 시작된다. 간단하게 아침과 점심 사이의 식사를 챙겨 먹는다. 유가 해준 토스트를 먹을 때도 있고 배달 음식을 시켜 먹을 때도 있다. 손이 큰 유는 토스트도 큼지막하게 해준다. 식빵 사이에 계란후라이를 넣고 케첩과 머스터드를 듬뿍 뿌린다. 그리고 우유에 바나나를 갈아 넣은 수제 바나나 우유도 내준다. 바나나 우유가 담겨있는 컵은 꼭 밥그릇에 손잡이만 붙은 모양새다. 그만큼 컸다는 말이다. 토스트와 우유가 올려진 식탁 위로 한낮의 따듯한 햇볕이 내리쬔다. 햇살이 아주 밝으면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도 눈에 보인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든든한 식사를 마치고 나면 우리는 예쁘게 꾸미고 나가거나, 하루 종일 집에서 넷플릭스를 시청한다. 집에 있기로 한 날에는 당시 유행했던 스위트 홈을 튼다. 스위트홈은 어느 날 사람들이 괴물로 변하고 그 괴물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스릴러 드라마이다. 나와 유는 둘 다 쫄보이기에 혼자서는 볼 엄두도 내지 않았을 드라마지만 둘이 함께 있는 지금 스위트홈을 몰아보기로 한다. 그렇게 몇 날 며칠 동안 하루 종일 집에서 스위트홈을 본다. 눈을 뜨고, 아침과 점심 사이의 식사를 하고 스위트홈을 보다 보면 삼촌과 숙모가 집으로 돌아온다. 저녁을 먹고 2층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스위트홈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이진욱이야 무조건. 너무 섹시해. "
유는 이진욱파고 나는 송강파다.
"헐~ 야 송강이지! 이진욱 너무 아저씨임."
이런 하루가 방학 내내 반복되었다. 느지막이 시작되었던 아침과 늦게 시작해도 딱히 급한 것 없었던 하루와 늦게 잠들어도 피곤하지 않은 밤이었다. 나는 유의 집에 갈 때마다 이 이야기를 꺼낸다. 우리 스위트홈 여기서 다 몰아봤었잖아. 그때 진짜 행복했는데. 그럼 유는 항상 똑같은 말로 대답한다. 그러니까. 진짜 걱정도 없고 할 일도 없고 이때가 제일 행복했어. 우리는 이 이야기를 반복한다. 다른 이야기로 시작되었다가 이 이야기로 끝이 나기도 하고 이 이야기로 시작되었다가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기도 한다. 좋은 이야기는 반복해서 꺼내도 질리지 않는다.
반복되어도 좋은 이야기는 주로 반복되는 슬픔 앞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다. 매일 새로운 기쁨을 맞이했다면 나와 유는 저 이야기를 이만큼이나 자주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반복하지 않아도 충분하므로. 충분히 하루를 보낼 수 있으므로. 하지만 반복되는 슬픔 탓에 저 날의 게으른 이야기는 반복해서 등장한다. 나와 유는 종종 자신의 실패와 게으름을 서로에게 고백한다. 우리를 슬프게 만드는 일은 너무나 많다. 매일 하나씩 생겨난다. 더 현명하지 못해서, 더 부지런하지 못해서, 더 완벽한 하루이지 못해서, 기대만큼 좋은 하루를 보내지 못해서, 더 좋은 사람이지 못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나서.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이젠 그만 슬퍼하자는 의미로 꺼낸다. 저 때 진짜 좋았었는데. 그때 본 함박눈이 최고였어. 그치. 다음에 또 보자.
눈을 뜨고 감는 셀 수 없이 많은 순간 우리는 계속해서 슬픔과 기쁨을 반복한다. 끈질기게도 반복한다. 비슷한 하루와 생경한 슬픔과 익숙한 기쁨. 익숙한 슬픔과 생경한 기쁨. 그 무엇이라도. 그 모든 반복에서 힘을 본다.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것에는 끈질기고도 단단한 힘이 있다. 유와 내가 반복되는 슬픔 앞에서 지지 않았으면 한다. 새롭거나 새롭지 않은 하루를 지치지 않고 끈질기게 반복했으면 한다. 언젠가의 슬픔을 위해 오늘은 게으른 하루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