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신을 낮춰서 말할 때 '제가'가 아니라 '저가'라고 말하는 애를 안다. 얘는 나와 동갑이라서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출 일이 잘 없지만 종종 무언가 예를 들어 나에게 설명해 줄 때 꼭 저가 라고 말한다. "흠 예진아, 선배한테 카톡 보낼 건데, 저가 휴학 동안 어떤 걸 미리 해주면 좋을까요? 이렇게 보내면 될까?" 이런 식이다. 처음에는 그냥 넘어갔고, 몇 번 듣고 나서는 저가가 아니라 '제가'가 알맞은 표현이라고 알려주었고 이제는 그냥 그대로 둔다. 몇 번 말했지만 잘 고쳐지지 않았고 이제는 저가라고 말하는 얘를 보며 여전하다는 어떤 안도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번 주에는 얘를 알고 지낸 뒤 처음으로 얘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자신을 '저가'라고 말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건 너무 의외의 순간이었는데 양다솔 작가님의 강연에서 작가님이 자신을 저가라고 칭하는 것이다. "아 저가 감기에 걸려서 강의 중간중간 기침을 할 수도 있다는 점~ 미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거의 다 나았고요. 물론 폐렴이나 결핵 아니니까 걱정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약간의 위트가 섞여 있는 멘트였는데 나는 저 멘트에서 '저가'에 꽂히고 말아 강연 내내 그 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얘 말고도 저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니.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이라니. 작가님에게는 아무도 저가가 아니라 제가가 맞는 표현이라고 알려주지 않았을까? 아니면 알려줬지만 매번 까먹고 그냥 저가 라고 하는 걸까? 혹은 항상 제가 라고 하는데 이번에만 저가 라고 말한 걸까? 고기를 좋아하고 책은 전혀 읽지 않는 애와 채식주의자이며 글을 쓰는 작가님 사이에 '저가'라는 연결고리가 있다는 게 반가워서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아 저가.....라고 말하는 모습을 상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장면은 조금 웃기다.
저가라고 말하는 애와는 아주 많은 날을 함께 보냈다. 아주 즐거웠던 날, 아주 불편했던 날, 시간이 가는 게 아까웠던 날, 빨리 지나가기를 바랐던 날, 불안했던 날, 충만했던 날, 울었던 날, 웃었던 날. 이 많은 날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날은 역시 감과 똥과 독도가 가득했던 날이다. 다음 날은 둘 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움직여야 하는 일정이 있었기에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그럴수록 우리의 대화는 더 길어진다. 헤어지는 게 아쉬워 어떤 이야기이든 들려준다. 얘와 나는 끝내지 못하고 언젠가 서로에게 들려주었을지도 모를 어린 시절 이야기를 시작한다. 저가 라고 말하는 애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함께 시골에서 살았는데 그래서 핸드폰도 컴퓨터도 없었다고 한다.
"우리 마을에는 소나 돼지들 똥 모아둔 곳이 따로 있었거든. 그래서 맨날 할아버지가 나랑 형한테 포댓자루 같은 곳에 똥 퍼오라고 했었어. 그러면 나랑 형은 막~~가서 똥 퍼서 들고 오고."
나는 저 막~~이 너무 웃겨서 막~~ 웃는다. 초등학생인 애와 얘의 형이 함께 똥을 푸는 모습을 상상한다. 웃기고 안쓰럽다. 그런데 얘는 똥을 푸면서 자신이 안쓰럽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아서 그냥 웃기게만 생각하기로 한다. 무엇보다 이 이야기를 하는 얘의 표정이 너무 싱글벙글하다. 그럼 나는 같이 싱글벙글해진다.
"그리고 어렸을 때 놀이공원 가서 산 활 장난감이 있었거든? 형이랑 건조대로 화살을 만들어서 그거 쏘면서 놀았어. 우리 옆집에 감나무가 있었는데 하루는 그 감이 다 익기도 전에 나랑 형이 활로 싹 다 맞춰 버려서 땅으로 다 떨어진 거야…!! 그래서 그 집 할머니한테 엄청 혼났었어ㅎㅎㅎㅎㅎㅎ"
자기 집 감나무도 아니고 이웃집 감나무의 감을 다 떨어트린 애는 뭐가 좋다고 또 막 웃는다. 나는 이미 아는 이야기 같기도 하고 처음 듣는 이야기 같기도 한 얘의 어린 시절을 들으며 같이 웃는다. 그리고 나의 이야기도 들려준다. 아빠 배 위에서 놀았던 일. 아빠의 티셔츠를 보고 속도가 뭐냐고 물어봤던 일. 그래서 아빠는 속도에 대해 한참 설명해 주었던 일. 그 설명을 다 들은 내가 그런데 왜 속도가 우리 땅이냐고 다시 반문했던 일. 그리고 아빠가 입은 티셔츠는 독도는 우리 땅 티셔츠였다는 것도. 이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가족끼리 모이면 꺼내보곤 한다. 속도와 독도도 구분하지 못했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내 옆에 앉아있는 애에게 해준다. 얘는 이 이야기는 처음이라며 너무 귀엽다고 말한다. 나는 얘와 나 사이에 아직도 모르는 이야기가 있다는 게 좋은 건지 아니면 그냥 귀엽다는 말이 좋은 건지 모르겠는 채로 집으로 향한다.
이날 이후로 나는 감을 보면 자꾸 얘가 생각난다. 얘가 맞춰서 다 익지도 못하고 땅으로 떨어진 감을 떠올린다. 화가 난 할머니의 표정과 웃고 있을지 울고 있을지 모를 얘의 표정도. 그러고 나면 코에서 구수한 똥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무언가를 아주 오래 상상하다 보면 오감도 같이 동원되곤 한다. 나는 얘가 되어서 감을 맞췄을 때의 기쁨과 포댓자루 가득한 똥의 냄새를 함께 느낀다. 사랑은 확장되는 일이라는데 추억까지도 확장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얘도 독도를 보면 나를 떠올릴지 궁금하다. 내가 느꼈던 아빠 배 위의 따듯함과 집안의 공기와 막 웃던 아빠의 표정을 느꼈으면 좋겠다. 그러면 독도를 볼 때마다 얘도 웃음이 나올 테니 말이다.
나를 오늘에서 내일로 이어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다 여기까지 왔다. 눈을 감고 다시 뜨게 하는 힘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거슬러 가다 보면 이런 이야기들이 있다. 너무 작고 사소해서 거슬러 가지 않으면 모를 이야기들이. 앞만 보고 달릴 때는 보이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나에게서 너에게로 확장되는 일은 나를 오늘에서 내일로 확장해 주는 일이기도 하다. 언젠가 너무도 다른 얘와 양다솔 작가님이 만나는 날을 상상한다. 나와 닮아가는 얘와 내가 닮고 싶은 양다솔. 이들은 만나면 어떤 대화를 나눌까. 그런 날이 온다면, 우리가 그만큼이나 커지는 날이 온다면 나는 너무 기뻐서 나도 모르게 나를 '저가'라고 칭할 것이다. 저가 정말 좋아하는 이야기가 있는데요........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이들에게 들려 줄 것이다.
*배경사진은 소수빈 - 사랑하자의 커버입니다 :) 가사도 너무 좋으니까 꼭 들어보셔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