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영화 두 편 <틱, 틱.. 붐!>과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를 보고
음악은 분명하고 올곧습니다. 음악 자신만의 믿음과 열정을 밀어붙이고 다른 것들을 압도하고 말죠. 작은 노랫소리에도 우리는 진정성과 감동을 느끼고 길거리 기타 소리에 급하게 걸어가던 누군가의 발걸음 속도가 늦춰지는 것처럼요. 그 안에는 격동의 시기와 개인의 혼란, 잊지 못하는 사랑, 어리석은 대화, 분노와 후회, 어떤 것들이든 들어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해석과 정황에 따라 저마다의 스토리로 음악을 받아들이지 않나요.
영화를 이루는 것 중 음악은 영향력이 큰 분야이죠. 뮤지컬 영화 두 작품을 준비했습니다. <틱, 틱... 붐!>과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는 멜로디의 선율에 목소리와 춤과 연기가 혼합돼 이야기의 주인공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소개합니다. 영화 속 음악과 음악 속 뮤지컬, 그들이 이야기하는 음악에 느꼈던 감동의 순간을 기록했습니다. 음악이 좋은 것임을 알기 때문에 인생과 음악의 주인공들은 계속 얘기될 거라고 믿어요.
<틱, 틱... 붐!> 2021. 조너선 라슨 / 감독 린 마누엘 미란다
경쾌하고 기분 좋은 멜로디, 슬픈 상황에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존의 목소리로 채우는 노래들은 듣는 누구나 얼굴에 미소를 띠울만큼 긍정적인 힘을 가졌다. 8년 동안 열심히 써온 뮤지컬을 마무리하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에서 겪는 일들은 항상 그를 긍정적으로만 살게 하지는 않지만, 그가 걸어온 35년의 생애와 이를 담은 영화는 눈부신 희망을 느끼게 해준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아쉽게도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하진 못했지만 그의 성공을 알리는 존의 첫 번째 뮤지컬 '슈퍼비아' 때문일 것이다. 슈퍼비아를 만들기 위한 그의 노력과 의지는 청춘들과 청춘을 보냈던 이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약간은 예민하고 맘껏 술에 취하는 파티를 좋아하며 자칭 뮤지컬의 미래라고 소개하는 이 힘찬 청년의 꿈을 응원하고 싶어지는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긴 기다림과 노력의 시간이 맞이하는 노력의 결실은 그저 8년이란 긴 시간을 보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다. 가장 힘겹고 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발견하는 것이 얼마나 아프고도 아름다운 일인지.(개인적으로 별로 안좋아하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나의 젊음, 20대를 바치면서 끝날 것 같지 않았던 환희와 절망의 곡선을 지나는 것은 실현의 과정 중 하나로도 평가되지만 많은 이들이 결국 포기하게끔 하는 요인으로도 가능하다.
조용하고 시린 파문들이 뒤섞여 중요한 순간에 파도가 덮쳐와도 아직 견딜 수 있다고, 그 자리에 계속 서있겠다고 다짐하는 이 중에 하나가 존이 아니었을까. 존의 가장 아픈 순간이 그의 열정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건 아이러니하고 가차 없는 삶의 교훈처럼 들린다. 하지만 어떤 순간이든 계속 그 순간들을 살아가는 당사자인 존에게는 내 선택으로 만든 나의 삶이라고, 당연하다는 듯 자부하지 않을까. 열정이라는 단어가 품은 많은 이들의 아픔과 노여움, 연속된 실패와 그럼에도 다시 한번을 부르짖는 지금의 조너선 라슨들에게 감동과 위로를, 이 모든 것들을 진실함과 경쾌함을 잇는 줄다리기에서 피워낸 영화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2021. 스티븐 손드하임 /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2021년, 스티븐 손드하임의 별세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는 레너드 번스타인, 제롬 로빈스, 아서 로렌츠 그리고 틱틱붐 영화의 주인공 존이 그렇게 존경해 마지않던 미국 뮤지컬계 또 한 명의 전설인 스티븐 손드하임이 뭉쳐 탄생시킨 뮤지컬입니다. 그리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손을 만나, 20세기에서 21세기를 거쳐 극장에서 뮤지컬 영화라는 장르로 다시 찾아왔습니다.
1957년 뉴욕 어퍼 웨스트사이드, 머물러있던 백인 미국인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가고 그 자리에 푸에르토리코인들이 새롭게 정착해가는 지역. 그곳의 어떤 이들은 새로운 나라에서 자신을 증명하고 틀에 자신을 끼워 맞추기 위해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어떤 이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빼앗겼다는 생각에 그들에게 목적 없는 억눌린 울분을 토해내기도 한다. 혼란스러운 변화를 겪는 10대 아이들의 다툼 속에서 치유되지 못한 상처들과 그 상처가 낳는 차별이 반복되어가는 와중에 전쟁 속에서 싹피어나는 사랑처럼 마리아와 토니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시작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제트파와 샤크파 무리의 대치 장면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영화는 단체와 다수가 주는 사운드의 충만함, 내실 있는 스크린의 쾌감을 지니고 있다. 소년과 남자 어딘가에 위치한 백인 비행청소년 무리와 푸에르토리코인 이민자 무리들 간의 갈등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더욱 심화되지만 이들은 영화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과 함께 이들의 스크린을 빈틈없이 채우는 춤 동작과 노랫소리는 관객의 오감을 사로잡기 충분하다. 이 부분은 뮤지컬의 장점 요소가 스크린에서 빛을 발한 부분이지만, 이야기의 개연성 측면에서 아쉬운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
토니와 마리아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첫 번째는 토니는 제트파, 마리아는 샤크파로 분리되는 앙숙 간의 로미오와 줄리엣적인 배경 때문이고 두 번째는 토니가 마리아의 오빠를 살해하는 윤리적 문제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이유는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 밖에 없는 비극적 운명속에서도 사랑을 꿈꾸는 젊은이들을 더 극적으로 만드는 긍정적 효과를 불러냈을지 몰라도 두 번째 이유는 관객에게 '왜? 어째서?' 따위의 의문을 불러낸다. 공감을 얻지 못한 마리아와 토니의 결단은 관객들을 순식간에 영화 밖으로 빠져나오게 만든다. 영화에만 몰두하고 있던 관객과 영화 사이의 교감이 어긋나고 현실이 방해하며 들어오는 것이다.
위험하고 혼란스러운 소용돌이 속의 시대를 사는 인물들에게 사랑은 모든 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비약적 소재로 읽히곤 한다. 뮤지컬과 영화가 만난, 새롭고 다채로운, 무궁한 가능성을 뽐낼 수 있는 장르. 매력은 많다. 하지만 그만큼 원래의 영화와 비교했을 때 뮤지컬 영화의 스토리 텔링 방식은(혹은 전통은) 차별점과 한계점으로 작용될 수 있는 양날의 검이다.
그럼에도 돋보이는 캐릭터들이 있다. 바로 푸에르토리코인 여성이자 마리아의 오빠 베르나르도의 연인 아니타. 아니타는 미국에서의 꿈과 실현시키고자 하는 야심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이민자와 여성으로서의 한계에 절실히 부딪치는 캐릭터이다. 그의 넘버인 'America'는 캐릭터의 당차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영화 후반부에서 연인인 베르나르도의 죽음과 그에 따른 마리아와의 갈등을 겪고 백인 경관들의 위협적인 행동에도 순순히 입 다물고 있는 것을 선택하는 그의 모습에는 현재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는 이민자이자 여성이 당하는 부당한 처사에 대한 묵묵한 폭로가 담겨있다. 제트파에게 강간을 당할 위험에 처해있을 때에는 관람을 넘어 두려움과 불쾌감마저 스크린을 넘어 전해온다.
영화가 막을 내리고 진한 아쉬움이 밀려오다가도 <웨스트사이드 스토리>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되는 이유는 아니타 같은 인물에게서 느껴지는 공감 때문이다. 마리아와 토니에 대한 애절한 사랑에서 느끼는 공감이 아니라 아니타, 리프, 발렌티나가 저마다의 몸부림으로들 살아갔던 인생에서 느끼는 공감이다. 손가락질 당하는 마을이지만 그곳에서 동료들을 발견하고 안락함을 느끼는 비행청소년과 미국인과 결혼해서 오랫동안 머물렀음에도 떨쳐낼 수 없는 이방인이라고 생각되는 마음 한구석. 비슷한 삶을 산 가족이나 친구같은 주변인도 아니고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큰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인데도 그들이 어떤 식으로 살아왔을지가 머릿 속으로 그려진다. 낯선 이들에게서 유달리 익숙해 보이는 것들을, 이질적인 곳에서 보편적인 것들을 발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유사함으로도 그들에게 마음이 기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Ps. 웨사스가 개봉하고 며칠 안돼서 작성했으니 벌써 두 달 전에 쓴 글이겠네요. 이제 겨울도 가고 봄이 찾아오는 날씨가 되었습니다. 다들 환절기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