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나의 경계를 허무는 일

탱크와 장갑차, 그리고 방호벽.

by World traveler Nina

늦잠을 자버렸다. 고양이 세수를 하고 나서 이를 닦는 둥 마는 둥 하고, 등교를 위해 엄마를 따라 검정 엘란트라에 올랐다. 평소에는 12번 버스를 타고 집에서 학교까지 등교하지만 늦게 일어난 오늘은 선택권이 없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4.7km의 거리였고, 차로는 10분, 버스를 타면 기다리는 시간 포함 30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물론 변수는 어디에나 있었다.


집에서 학교로 향하는 길목에는 방호벽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방호벽은 탱크가 겨우 하나 지나갈 정도로 좁은 곳이다. 평상시에는 자동차가 다니는 통로로 이용되지만, 유사시 적 대전차의 육로 진입을 막기 위해 벽의 밑 부분을 폭약으로 부수어 상단의 콘크리트 등을 떨어뜨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 방호벽이 군인들에게는 유용할지 몰라도 일반 시민에게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소형차도 양방향으로 조심조심하며 겨우 지나갈 수 있으며 중대형 차량과 마주할 때면 차가 지나갈 때까지 다른 방향 차량은 무작정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탱크나 장갑차 부대가 등장하면 모든 차는 행렬이 끝날 때까지 망부석처럼 지켜봐야 했다.


문제는 시간이 없을 때였다. 여유로울 때는 상관없지만, 오늘처럼 늦은 날에는 기다려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1분 1초를 다투는 내게 탱크 부대의 출현은 곧 ‘지각’‘사랑의 매’를 의미했으므로.


“하……. 오늘 망했다, 엄마. 지각하겠네.

이놈의 탱크는 왜 하필 지금 지나가서 날 힘들게 하는 거야! 오늘은 대체 몇 대를 맞으려나?”


아쉬운 소리가 절로 쏟아졌다. 그렇다. 내가 북한 접경 지역 사람인 것을 또 잊었다.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등하교 때는 물론 친구들과 서울에 놀러 갈 때도 탱크와 군인들은 우리 앞을 막아서기 일쑤였다. 파주에서 서울로 향하는 버스를 탈 때면 봉일천과 벽제 중간쯤 위치한 검문소를 들르는데, 무섭게 생긴 군인 아저씨가 버스에 올라타 북에서 내려온 듯한 수상한 사람이 있는지 눈동자를 부지런히 움직인 뒤, 군복을 입고 있는 사람의 신분을 확인했다. 이곳에서는 당연한 일이었고, 그저 펼쳐지는 일상이었다. 동네 뒷산에는 지뢰를 조심하라는 팻말과 민간인 출입 통제 지역이라는 표시가 공존했다.


함부로 발 디딜 수 없는 경계 가까이 산다는 것이 그때는 별로 이상하지 않았다.


북한 관련 이슈가 터질 때마다 우리는 이렇게 말했다. “또 시작이야? 그만 좀 하라고 해, 좀!” 내게 북한의 도발은 군인들의 군사 훈련 증가탱크로 인한 도로의 정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두려움은 없었다. 이렇게 수많은 군인과 탱크가 셀 수 없이 도로를 메우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만큼 내게 그들은 가까웠으며, 마음속 휴전선은 흐릿했다.


임진강변 생태 탐방로를 걷다가 만난 파란하늘과 철조망


어느덧 20년의 세월이 흘러, 나를 괴롭혔던 대전차 방호벽을 이제는 찾아보기 어렵다. 군부대가 많은 파주, 의정부 등지에 설치되었던 이 벽은 길이 없어져 무용지물이 되거나 오히려 사고를 유발하는 원인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아닌 경우 2005년을 기점으로 철거가 진행되었으며, 일부 구조물들은 주변 상황에 맞게 재정비하게 되었다고 한다.


견고했던 방호벽은 세월이 지나면서 허물어졌지만 사람 사이의 마음의 벽은 되려 높아졌다.


우리는 전쟁으로 생이별했지만, 한국은 북한을 이제는 한민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전쟁 이후 발생한 정치적인 반공주의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고, 정치적 압력으로 인한 미디어의 횡포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을 여과 없이 그대로 믿어버린 우리 모두의 잘못일 수도 있다. 이것을 어느 한쪽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부터라도 남북 관계에 대한 무지함을 자각하고 알아가려는 노력은 한없이 멀기만 했던 그들과 나의 보이지 않는 경계를 허물어가는 초석이 될 수 있다.


이런 마음을 담아 중앙도서관에서 주관하는 파주 DMZ 판문점 JSA 여행학교에 입학했다. 파주의 과거와 현재를 알고 미래를 알아가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수업을 거듭할수록 나의 무지함을 깨닫고 시나브로 진정한 파주시민이 되어 가고 있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시지만 나에게는 미 종군 기자로 활동하면서 분단 이후 남한의 모습을 미국과 세계에 알린 근사한 이모할아버지가 있었다. 종군 기자까지는 못하겠지만 앞으로는 여행을 좋아하는 나에게 ‘파주 여행지기(Travel buddy Nina in Paju)’라는 애칭을 붙여 국내외 다양한 사람에게 마음의 경계를 허물 수 있도록 내 고장을 알리는 가치 있는 역할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도라 전망대 안에서 저 멀리 보이는 인공기와 북한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