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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보렴 Apr 08. 2022

가지고 있는 걸 썩히는 일은 돈을 버리는 일이다.

썩은 왕고구마와 사과를 버리면서 쓰는 반성문


마음가는대로 에세이



작년에 어머님께서 농사지으신 고구마를 한 박스 보내주셨다.

그리고 황금사과를 비롯해 맛있다는 사과도 한 박스 보내주셨다.

플라스틱 완충제에 하나씩 둘러쌓여있는 고가의 사과였다.

(내 돈주고는 잘 안 사먹는...)


받았을 때 감사한 마음으로 반짝 먹고, 겨우내 베란다에서 견디던 녀석들을 잊고 지냈다.

먹어야지 먹어야지..했는데 손이 잘 가지 않았다.


오늘에서야 조금 여유가 생겨 들춰보니, 고구마는 썩었고 사과는 쭈글쭈글해졌다.

봄이 오니 기온이 올라가서 빠르게 부패한 것 같다.

정말 사람 팔뚝만한 것도 있었는데, 그건 크다고 아끼다가 똥 됐다.ㅜㅜ



곰팡이 핀 고구마는 차마... 비닐에 담았다. 사과의 썩은 부분도....




일을 시작하면서 집에서 요리를 하고 살림을 챙기는게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는 게 1차적인 핑계다.

하지만 평소 쌓아두고 다시 들춰보지 않는 생활습관에 그 원인이 있다는 걸 잘 안다.


냉동실에는 쟁여놓고 먹지 않는 생선, 콩류, 떡... 심지어 갈비도 아직 있다.

생필품 서랍에는 유통기한 지났을 치약, 화장품, 일회용품들이 쌓여있다.







어제 결혼 4주년을 맞이하여, 신랑과 용돈 및 생활비 인상 건(?)에 대해 이야기했다.(관련없음 무엇?ㅎㅎ)

물가도 오르고 일하면서 반찬도 사먹고 외식도 잦아져서 기존의 금액으로는 부족하다!는 게 내 주장이었다.

신랑도 가만히 듣더니 수락했다.

추가적으로 내가 종일 출근하는 날 밖에서 먹을 때도 있어서 그 식비도 50%지원해주기로 했다.


그런데 오늘 이 고구마들과 사과들을 보니까.. 생활비를 늘리는 게 해답이 아닌 것 같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활용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이미 가진 것들이 많은데 그건 처박아두고 새로운 것에 눈을 돌린다.

물론 에너지를 다른 관심사에 많이 쓰느라, 가지고 있는 걸 살피는 게 잘 되지 않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다.


내가 진짜 늘려야할 것은 생활비가 아니라, 가진 것을 활용하는 능력이다.







비슷한 케이스가 두 가지 떠오른다.

먼저는 감사일기를 쓰면서, 내가 이미 받은 축복이 많고, 이미 가지고 있는 게 많은데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다음으로는 코리님의 생산성 강의를 들으면서이다.

그가 강조했던 게 "어떻게 활용할 지 고민하라."였다.


나는 평생 메모를 수두룩 빽빽하게 했던 서(기)보렴이다.

일기장, 메모장, 휴대폰 메모장, SNS메모, 사진, 동영상 등등.

쓰는 것과 기록으로 남겨두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뭐든 기록하고 뭐든 저장했다.


그리고 배우는 것도 좋아해서 학교도 여러번 도전하고, 자격증, 여느 좋다는 강의도 많이 들었다.

이미 공부해둔 것들이 있음에도 나는 여전히 새로운 걸 배우고 싶었다.

가진 것을 활용하지 못하고 자꾸 남의 떡이 크게 보여서 무지성으로 좇았던 것 같기도 하다.


정작 중요한, <활용>은 잘 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를 띵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감사일기를 쓴 지도 오래고, 생산성 강의를 들은 게 작년 초다.

하지만 여전히 내 모습에는 큰 변화가 없다는 데에서 큰 절망감을 느낀다.

(공부한 자격증 가지고 취업했다는 것 하나 잘 했다!)







활용 방안을 고민해본다. 구체적인 환경설정과 함께.


1) 우선 생활비와 용돈은 올리지 않기로 한다.(인상안 결렬!)

약간 다른 얘기지만, 이 결정에는 오늘 아침에 읽었던 투자서 한 줄에서도 귀감을 얻었다.

현재의 지출을 조금만 늘려도, 복리로 생각하면 엄청나므로!

(복리의 마술은 불어나는 데에도 적용되지만, 줄어드는 데에도 적용된다는 놀라운 사실 ㅎㄷㄷ)


투자의 네 기둥(윌리엄 번스타인)



2) 주말마다 냉장고 털기(를 매번 결심하지만 잘 될지 모르겠..ㅜ)를 해서, 최대한 자원을 <활용>한다.

(살아남은(?) 고구마는 점심에 먹으려고 삶았고,

사과는 쭈글해졌어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애플시나몬 청을 왕창 담아 나눠주기로 한다.)


3) 월 1회 물건을 살펴보고 안 쓸 건 드림이나 벼룩을 한다. 날짜는 여유가 생기는 첫째주 금토가 좋겠다.(환경설정!)

생활비가 부족할 때 벼룩으로 마련...(까지는 어렵겠지? 아.. 생각만 해도 귀찮다ㅠ)


4) 그동안 공부한 것을 제대로 <활용>했다고 생각이 들기 전까지는 다른 배움을 하지 않는다!(읭?^^;)

책을 안보는 게 아니라, 학위 과정을 하거나 강의를 늘리지 않는 것이다.


5) 마지막으로, 그동안 찍었던 사진과 메모를 한번씩 보는 연습을 해야겠다.

이동 중 조수석에 앉았을 때와 누워서 쉬고싶다는 생각이 들 때 보자.(환경설정!)

이것을 글쓰기에 <활용>하게 된다면 좋겠다.






많은 것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가진 것을 한번씩 돌아보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하는 것이 더 현명한 방향인 것 같다.




가진 걸 어떻게 누릴 수 있을지, 그 <활용방안>을 위한 고민들이 일상처럼 되어

어머님이 주신 왕고구마와 사과를 떠나보내는 일은 다시 겪지 않기를 바란다.

(이 글은 어머님이 보시지 않기를 바란다.ㅎㅎㅎ 힝 죄송해요ㅠㅠ)


세잔은 사과로 미술을 제패했는데, 나는 반성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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