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중니어 PM의 기록
많은 경우 데이터 분석가, 개발자, 디자이너 등 다른 직무를 거쳐서 시작하는데 저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숱하게 답해봤지만, 답할 때마다 상대가 재밌어하기 때문에 늘 기꺼이 대답합니다. 총평을 먼저 하자면, 굉장히 운이 좋았던 케이스입니다.
학부생 시절만 해도 저는 자유로운 영혼 그 자체로, 스스로도 주변 사람들도 ‘일반 사무직을 하면 힘들어할, 창의적인 일을 해야만 할 사람’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대학원도 안 갔는데 학사 학위 따는 데 7년이 걸린 것도, 마음 가는 대로 산 결과입니다. 물론 그 7년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만, 아무튼 드디어 졸업이 다가오던 어느 2월. 그때까지도 저는 어떻게 밥벌이를 하며 살지 몰랐고 실은 크게 고민하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부모님께 걱정 끼치기 싫어 영어 강사로 일하던 중, 우연한 소개로 뷰티 커머스/커뮤니티 회사에서 2주 단기 알바를 하기로 했습니다.
시작은 단순한 ‘테스터’였습니다. 웹 유저를 앱으로 전환하기 위해 갓 출시된 베타 앱의 기능을 테스트하는 일이었습니다. 인문대 국문과 출신에 IT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타고난 예민함이 뜻밖의 재능이 되었습니다. 사소한 오류까지 집요하게 찾아내는 모습을 보시고, 대표님께서 3일 만에 정규직 전환을 전제로 한 인턴직을 제안하셨습니다. (나중에 듣기로는 CTO님께서 가능성을 보셔서 먼저 말씀을 꺼내셨다고 합니다.)
‘기획? 운영? 그게 뭔데? 근데 시켜주면 해야지! 뭐든 해보면 좋지!’ 정도의 가벼운 생각으로 저는 냉큼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개발의 개자도 모르던 저는 난생처음 ‘개발자’들과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일은 재밌었고 적성에 맞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의외였던 저의 특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로 인정욕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인정욕이라고 해봐야 거창한 성과나 지위를 원한 것은 아니었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주현님이랑 일하면 마음이 편해요’ 혹은 ‘주현님이랑 일하면 일할 맛이 나요’라는 말을 한 번 두 번 들으니, 정말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계속해서 들었습니다.
그래서 일단은 개발의 기본 개념을 배웠습니다. 프런트엔드, 백엔드, API가 뭔지부터 해서, 코딩 언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기 위해 파이썬도 공부했습니다. UX/UI 기초 서적도 보았습니다. 이론과 실무를 병행하다 보니 경험치가 쑥쑥 느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감각 또한 즐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첫 번째 회사에서는 IT 업계의 기본을 배우고 그 안에서 재능이 나름대로 있는 듯한 나를 발견했습니다.
이직을 느슨하게 알아보고 있던 저에게 크래프톤에 재직 중이던 친구가 본인 회사의 채용 공고를 하나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채용 공고의 내용은 마치 저라는 사람을 그대로 묘사한 것만 같았습니다. 창의적이고(나 창의적이지) 논리적인 사고를 하는(나 논술로 대학 갔음), 트렌드에 민감한(나 트위터 없이 못 살잖아), 영어를 잘하는(wow 나 영어 강사했어),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새로운 게 왜 두려워 재밌지) 사람. 게다가 AI를 활용해 ‘세상에 없던 제품’을 만드는 팀이라는 얘기에 재빠르게 지원했습니다. 다행히 핏이 맞다는 생각이 쌍방이었는지 프로세스가 일사천리로 이어져 정신 차려보니 대망의 크래프톤, 프로젝트 벨루가(이하 벨루가)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너무 힘들고, 너무너무 재밌었습니다. 팀원들과 제품에 대한 얘기를 하다 시계를 보면 밤 10시를 넘는 게 일수였고, 집보다 회사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운동도 동료들과 같이 다니고, 사내 동아리도 하고, 주말에도 동료들을 만나서 노는 등, 그 당시에는 어떤 친구들보다 동료들과 더 가까웠습니다. 이때도 마찬가지로 인정욕은 부족함을 채우려는 형태로 발동 됐고, 일단은 머신러닝의 이론, 그리고 AI 기술 중에도 TTS의 phone과 phoneme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AI 이론뿐만 아니라 시니어 PM에게서 문서화와 체계화, 일정 관리 등에 대해서도 많이 배웠습니다. ‘PM’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를 재직 내내 스스로 정의해 보며 일을 했습니다.
내 손으로 만든 제품이 세상에 나오는 것도 굉장한 경험이었습니다. 왜 ‘자식’ 같다고 표현하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혼자서는 절대 구현할 수 없는 머릿속에만 있던 아이디어가 팀 전체에 의해 만들어지던 그 과정과, 그 과정을 매끄럽게 하기 위해 한 저의 노력까지 실로 뿌듯했습니다. 베타 출시 후에 유저 반응이 좋게 왔을 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동료 디자이너가 ‘주현님만큼 제품에 진심인 PM/PO와 일 할 수 있어 행복하다’라는 말을 해주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친구들이 너는 일을 왜 이렇게 좋아하고 열심히 하냐고 의아해하기도 했지만, 역으로 인생의 큰 부분인 일을 그저 ‘먹고살기 위한 행위’로 치부하는 게 저로서는 더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재밌는데? 근데 돈도 받는데? 두 번째 회사에서는 일에 대한 적성과 재능, 타오르는 열정을 확인하고 나에게 이상적인 업무 환경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다음 회사는 초소규모 팀의 프로덕트 리드로 팀 빌딩을 직접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선택했습니다. 벨루가에서도 채용 과정에 적극 참여했고 팀 문화 조성에 관심이 많아 관련 일을 하긴 했지만, 결정권이 없었고 주 업무는 제품이었다 보니 매니징과 팀 빌딩을 제대로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왠지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들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팀원을 꾸리고, 팀의 체계를 잡아서 팀원들 사이에 일이 ‘흐를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재밌었고, 워낙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했다 보니 유의미한 변화도 눈에 보였으니까요. 다만 크게 깨달은 점은 ‘열정의 불씨’가 없는 상태에서 불을 지피는 건, 이미 타고 있는 불을 더 키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라는 것입니다. 제품에 대한 애정을 인위적으로 심어주는 건 리더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더군요. 원래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벨루가의 그 높은 의욕과 애정에 익숙했던 저에게는 새삼 피부로 와닿는 경험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제품에 직접 관여하는 비중이 현저히 적었다는 것입니다. 이전 직장에서 제품 관리자 일이 성취감도 컸지만 그만큼 스트레스와 업무 강도가 높았기에, ‘피플 매니징이 더 잘 맞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팀 빌딩, 컬처 조성하기, 다 의미 있는 일이고 관심도 많지만, ‘그것만’ 하기에는 제 적성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회사에서는 이렇듯 PM/PO로서의 자아를 다시금 확인했습니다. 제품을 직접 만져야 하고, 의욕 있는 동료들 틈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구나.
조금 더 ‘의미 있는’ 가치를 만드는 회사와 의욕 있는 동료를 갈망하던 차에 엔츠를 알게 되었습니다. 환경에 관심이 많은 저에게 탄소 회계라는 도메인이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전 직장 동료 중 마음이 잘 맞았던 분이 재직 중이었다는 것도 큰 장점이었습니다. 그분이 "여기 동료들 진짜 열정적이야"라고 말해준 게 일종의 보증수표였거든요. 제가 이전에 해보지 않은 B2B 서비스라는 것도 플러스 요소였습니다.
그렇게 부푼 기대를 안고 들어갔고, 실제로 멋진 동료들, 모르던 도메인을 공부하는 재미, 의미 있는 제품을 만든다는 뿌듯함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B2B, 그리고 탄소 회계라는 도메인 특유의 구조적인 장벽이 저에게는 생각보다 높았습니다. 제품의 힘만으로 고객을 폭발적으로 확장하기 어려운 시장의 한계, 그리고 제품의 논리보다 세일즈나 비즈니스 논리가 우선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저의 성향과는 맞지 않았습니다. 더 경험치가 있었더라면 이러한 환경에서도 맞는 사람이 될 수 있었겠지만, 그때의 저에게는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결국 엔츠에서의 경험까지 겪으며, 이제는 여러 도메인, 여러 사업 형태의 회사를 두루 경험했으니 확실히 ‘나에게 맞는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를 정형화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리고 다음 회사는 정말로 나와 핏이 맞는 곳으로 가서, 더 오래 기여하고 더 오래 다니자고 굳게 다짐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요.
솔직히, 세상의 어떤 회사의 어떤 제품이라도 조건 없이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지난 시간들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스스로를 움직이게 하는 확실한 ‘버튼’이 있고, 그 버튼이 눌려야만 비로소 에너지를 발휘하는 사람이라는 걸요. 누군가는 까다롭다고 할지 모르지만, 이게 지난 시행착오를 통해 얻은 객관적인 자아성찰의 결과입니다. 대신 그 버튼이 제대로 눌렸을 때 얼마나 깊게 몰입하는지도 스스로 확인했습니다. 웬만한 것에 내공이 생겨 훨씬 무던해지기도 했고요.
벌써 5년 이상의 경력자가 되었습니다. 길다면 긴 기간이지만, 5년이면 제가 학부 졸업도 못한 세월입니다. 조금 느리지만 비로소 나와 맞는 일이 무엇인지 제대로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니 다음 회사는 (제발) 오래오래 다니겠노라 오늘도 다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