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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호 Oct 31. 2015

인간 바틀비

아, 인간이여

<필경사 바틀비>는 <모비딕>의 작가 허먼 맬빌의 단편이다. 월 스트리트의 한 변호사가 고용한 필경사에 관한 이야기다. 변호사는 바틀비에 대한 기억들을 기록한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지난 시간을 되짚는다. 바틀비는 변호사가 고용한 필경사다. 일감이 많아지자 바틀비를 채용한다. 그에 대한 첫 기억은 이렇다. "처음에 바틀비는 어마어마한 양의 문서 작업을 했다. 마치 필경 업무에 오랫동안 굶주린 것처럼, 그는 사무실에 있는 문서들을 먹어치우는 듯 했다. 소화를 위한 휴식 시간도 없었다.“ 변호사는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바틀비가 (으레 들어줄 줄 알았던) 자신의 부탁을 거절한 것이다. 그는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변호사는 당황했다. 그렇게 시작된 거부는 자신의 업무도 내려놓게 한다.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문장이 변호사의 심장에 내리 박힌다. 변호사는 이것을 ‘소극적인 저항’이라고 명명한다. 그에 대한 변호사의 평가는 작가의 목소리가 반영된 것 아닐까.


바틀비는 돌림노래처럼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를 수없이 반복한다. 취하는 문법이 독특하다. 원문으로 "I would prefer not to”. 보통 “I would not prefer to”로 쓴다. 진중권이 지적하는 것처럼 "일하는 것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일 안 하는 것을 ‘긍정’했던 것”이다. 즉 긍정의 부정이 아니라 부정의 긍정이다. 안 하는 편에 있겠다는 말이다. 바틀비는 일을 안 하면서 사무실을 나가지도 않는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이다. 결국 변호사는 그를 놔둔 채 사무실을 옮겨간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찾듯이 말이다.


이 원문을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그 느낌이 다르다. 문학동네는 이것을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로 번역했다. 이는 다른 출판사에선 ‘안하고 싶습니다’(창비) 거나 ‘안했으면 좋겠습니다.’(블루프린트)로 번역한 것과 강도가 세다. 이를 두고 소설가 함정임은 ‘부정(否定)의 선택’이라는 화법을 잘 살렸다고 평가한다. 분명 바틀비는 의도적인 선택을 하고 있다. 일종의 선언인 것이다. 이것이 바틀비를 무엇으로 드러내는가? 아감벤은 이를 두고 비 잠재성의 틀이라고 말한다. ‘글쓰기를 멈춘 바틀비가  (아무것도  씌어지지 않은) 글쓰기 판의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것이다. 다르게는 멜빌의 분신, 글 쓰지 않은 작가의 상징, 새로운 예수 또는 메시아라고 보는 다양한 해석들이 그의 수많은 그림자들 사이에서 웅성거린다고 양운덕은 기록한다. 바틀비를 둘러싼 많은 해석에 놀랄 뿐이다.


바틀비의 정체성에 있어서 중요한 힌트를 그의 죽음에서 찾고자 한다. 바틀비가 의도적을 선택한 ‘부정의 긍정’ 결과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소설의 마지막은 바틀비가 죽는 장면으로 끝난다. 바틀비의 마지막을 지켜봤던 변호사가 그에 대한 기억을 기록한 것이다. 아마도 변호사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결론이 바로 그의 죽음이지 않을까. 바틀비는 변호사의 호의를 거절하다 죽음을 맞게 된다. 그는 주인이 바뀐 사무실을 배회하다 부랑자 수용소에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먹기를 거부하다 죽음에 이른다. 마지막 그의 곁을 변호사가 지켜주었다. 


그의 죽음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만약 바틀비가 ‘부정의 선택' 즉 '소극적 저항’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렇게 빨리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든 그 체제에 적응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는 ‘소극적 저항’으로 말미암아 죽게 된 것이다. <피로사회>를 집필한 한병철은 바틀비에 대하여 병리적 독해를 시도한다. 한병철은 바틀비의 죽음에 대하여 “삶의 위한 모든 노력은 죽음으로 귀결된다"고 하였다. 여기에서의 노력은 쉼 없는 전진을 말한다. 아무런 의욕도 없는 무감각의 상태에서 바틀비의 실존은 ‘죽음으로 향하는 부정적 존재’이며 그의 본성과 불운으로 인하여 죽게 되었다고 평가한다. 즉 바틀비를 후기 근대적 명령사회의 피해자로 규정하는 것이다. 오히려 바틀비는 <피로사회>에서 지향하는 '근본적 피로'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멈춤(의 태도를 취하는 저항)으로 그는 긍정에서 부정으로 돌아섰다. 그의 선택은 ‘인간다움’이었기에 죽음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변호사가 바틀비에게 외치는 외마디가 바틀비를 규정한다고 본다. 변호사는 그의 죽음 앞에 이렇게 말한다.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 그의 죽음은 인간적인 죽음이다. 고결함이 묻어난다. 허무하지 않다. <피로사회>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바틀비의 ‘소극적 저항’은 인간적 저항이다. 스스로 명령사회에 충실하여 쉬는 시간 없이 ‘기계’처럼 일해왔던 자기에 대하여 저항한 것이다. 내밀한 인간의 숨결에 귀를 기울인 것이다. 인간됨의 선택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다. 즉 작가는 인간성이 죽어가는 자본주의를 꼬집은 것 아닐까. 이것이 소극적이라는 것은 바틀비는 인간으로서 기계처럼 강요하는 시스템 내에서 그저 머물렀던 것이다. 안하는 편에 있겠다는 선언만 붙잡을 뿐이다. 환경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는 기계로 살아남지 않고 인간으로 죽고만 것이다.


인간이었기에 (기계적인 작업을 강요하는 시스템 내에서) 바틀비는 죽고 만다. 그의 죽음 이후에 그가 '수취인불명 우편'을 담당하는 직원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수취인불명'이라는 단어에 작가는 죽음을 떠올린다. 우편이 받지 못하는 사람의 연약함을 '선천적으로 불운하여, 무기력하게 절망에 빠지기 쉬운'이라고 표현한다. 그렇다. 사람은 약하디 약한 것이다. 그래서 죽는 것이고.


<필경사 바틀비>를 번역한 횽윤기씨는 후기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그는 자신보다 더 큰 상실을 겪은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그가 자신의'은신처'안에서 하던 몽상이란 바로 그 사람들에 관한 것이지, 변호사와의 갈등 때문이 아니었다. 인간에 대해 연민을 느끼고 고독에 빠질 줄 아는 인간 바틀비. 그는 기계처럼 일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우리에게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아. 인간이여.”라는 탄식은 인간이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의문 아닐까? 오늘 난 인간을 선택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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