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빗물받이 물통이라면 말이 될 것 같다.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문제가 생긴 건 천장이지 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천장에 난 구멍으로 빗물이 뚝뚝 떨어졌고 나는 어김없이 그것들을 받아냈다. 동시에 받지 않았다. 곧 비워내질 물이자 나와는 섞이지 않았으니 그런 셈이라고 믿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위에서부터 떨어진 물은 나의 가장 아래부터 차올랐다. 비워낸 물통이 햇빛에 바싹 말랐다. 그런데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물통은 돌아서면 어느새 또 물로 흥건했다. 습관. 습관이 되어버렸다. 처음과 중간은 타의로 시작하고 진행했지만 끝은 자의가 되어버렸다. 이제는 이런 상황이 전혀 괜찮지 않다. 구멍은 천장이 아니라 물통에 생겨버린 걸까. 지붕이 고쳐진 뒤에도 물통은 고쳐지지 않았다.
우울한 기분도 그렇게 시작했다. 신경질을 부리고 트집을 잡고 막말하는 악인들에 휘둘리지 않으려 의연하게 행동했다. 의연한 척했다. 그들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나는 그대로일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조금씩 나를 좀먹고 있었다. 물론 내 인생을 헤집어놓은 악당들도 영원하지 않았다. 내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다가도 언젠가는 사라졌다. 하지만 우울한 상태는 습관이 되어버렸다. 악당들은 자신들의 구멍을 감추고 자취도 없이 사라졌지만 나에게는 쉽지 않은 상처가 남았다. 계속 물이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