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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수진 Sep 04. 2023

그래서 동화를 썼다

   <흙덩이>는 영어공부방 선생님이 찰흙이 되다는 판타지를 이용하여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고자 했다. 그런데 사실 이 이야기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어떤 독차층을 위한 것인지 애매하다. 어린이들이나 청소년이 읽고 공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30대 후반의 영어공부방 선생님 이야기다. 시로 시작한 작은 이야기가 분량이 많은 이야기로 커져나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흙덩이 / 우수진

 나는 찰흙덩이다.

 매일 밤 자려고 침대에 누우면 찰흙덩이로 변한다. 무거운 몸이 이부자리 위로 떨어지면 먼저 두 다리가 꼬여 하나로 합해지고, 그다음 저릿저릿한 팔이 몸통에 붙는다. 지끈거리는 머리는 어깨로 뭉그러뜨려 내려온다. 마침내 온몸이 한 덩이 찰흙으로 바뀐다. 밤새 묵지근한 덩어리가 매트리스를 누를 뿐. 아침이면 다시 찰흙덩이에 팔다리가 생겨나 걸었고 밥을 먹었고 일을 했다.      

 "안녕하세요."

 "어서 와. 숙제 내세요."

 잠에서 깨면 찰흙덩이는 다시 사람이 된다. 

 선영 씨는 영어공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아직 안 낸 사람"

 "아 맞다. 이거 단어 다하고 낼게요."

 상민이는 교과서와 문제집이 가득 들어찬 책가방에서 끙끙대면서 숙제를 꺼냈다. 


 "선생님, 물 마시고 와도 돼요?"

 도훈이가 물었다.

 "응, 다녀오세요."

 사실 도훈이는 별로 목이 마르지 않았지만 200ml 생수통 하나를 단숨에 비워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응? 한 명이 비는데 누가 아직 안 왔지?'

 "친구들 지금 일곱 명인데 누가 아직 안 왔지? 아, 다은이가 없네."

 "아파트 앞에서 기다렸는데 다은이가 안 나왔어요. 만나서 같이 오기로 했는데……."


 선영 씨는 다은이 어머니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다은이는 학교에서 돌아와 잠깐 소파에 눕는다는 게 그만 깜빡 잠이 들어버렸다. 머리에서 열이 나고 몸도 으슬으슬 추웠다. 지난주에도 이렇게 잠들어 버려 학원을 한 번 빠졌다.

 ‘영어수업이 지루해서 안 오는 건가…….’

 ‘세상에 재밌기 만한 공부는 없어.’ 

 ‘이러다 혹시 그만두는 건 아니겠지.'

 불안한 생각이 마음을 스쳤다.

 영어공부방에선 아이들도 선생님도 아무도 웃지 않았다. 

 ‘무언가에 열중할 땐 웃음기가 사라지기 마련이니까.’

 선영 씨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휴우.'

 몸도 천근만근, 마음도 헛헛했다. 요즘 자신의 처지가 자꾸 솥뚜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무쇠솥뚜껑이야. 내 몸은 너무 무거워서 이렇게 의자에 앉으면 아무도 나를 들어 올릴 수 없을 거야.'

 선영 씨는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가슴이 답답해. 눈이 많이 내리는 나라로 떠나고 싶어. 눈이나 실컷 보고 싶다.' 

 그렇지만 선영 씨는 수업을 해야 했다.

 '저 벽이 뚫린다면…….'

 순간 신기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찌 된 영문인지 벽에 구멍이 숭숭 나기 시작했고 뚫린 구멍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햇살도 구멍 사이로 비추었다. 작고 귀여운 새가 어디선가 날아와 짹짹거렸다. 하지만 사방을 막고 있는 벽은 그대로였다. 

  다음날, 맑은 날이었다. 야트막한 개천으로 맑은 물이 흘렀다. 또 똑같은 그런 날들이었는데, 펼쳐진 이부자리 위에 떨어진 내 몸은 찰흙덩이 같았던. 팔, 다리, 허리, 어깨 할 것 없이 묵지근해 이리저리 치덕치덕한 찰흙덩이.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강아지와 개천을 걷고 있었다. 오리 하나가 주둥이를 푸드덕 거리며 물을 마시고, 다른 하나는 날개를 털어내며 몸을 다듬고 있었다. 새들은 저마다 다른 소리로 자신의 위치를 드러냈다. 그리고 보게 되었다. 물속에 잠긴 킥보드. 

 녹슬지 않은 선명한 색의 깨끗한 킥보드는 반듯하게 물 한가운데 누웠고, 그 사이사이를 개천의 맑은 물이 투명한 굴절을 만들어내며 지나갔다. 네 발을 구르며 장난기 어린 아기를 실어 나르던 킥보드는 모처럼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운동복을 입고 바삐 헬스장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사람, 시장바구니를 무겁게 들고 가는 사람도 흘끗 물에 빠진 킥보드를 쳐다보았다. 그것의 휴가는 전시되어 있었는데, 즐기는 모습이 역력했다. 


"머리를 짧게 잘라야겠어."

 선영 씨는 강아지를 안고 집으로 뛰었다. 현관문을 열어 강아지를 내려놓고 쏜살같이 아파트를 빠져나갔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미용실로 직행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더 짧아지면 기르기 힘들 거라던 엄마의 만류가 잠깐 떠올랐지만 과감하게 버튼을 눌렀다. 머리카락이 신나게 잘려나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평소엔 은은하게 느껴졌던 가로등 불빛이 눈을 찌르는 것처럼 거슬렸다.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쓰러지기 전, 마지막 힘을 짜내 책상에 앉았다. 손때가 많이 묻은 노트를 꺼내 펼쳤다. 연필을 쥐고 글을 썼다.

 ‘이건 좋은 글이 아니야.’ 

 ‘작가가 되면 좋겠어.’ 

 ‘하지만 이따위 형편없는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어.’ 

 글을 계속 다듬는다 해도 더 이상 좋아질 것 같지 않았다. 충동적으로 머리를 자른 일, 글을 쓰는 일, 그리고 좀 더 깊은 거 뭐 더 깊은 거 없나 생각을 해보자 하다가 그냥 그만두었다. 나는 깊이가 없는 사람인 걸까, 이젠 짜내도 더 나올 게 없지 않은가, 뭘 더 하려다가 더 망쳐버리는 실력이지 않은가 낙담했다. 다시 들여다보고 싶지 않아 노트를 덮어버렸다. 

 ‘그거 안 돼도 계속 영어공부방이나 하면 돼.’ 

 ‘조금 글 잘 쓰는 영어공부방 선생님으로 살아도 상관없어.' 

점점 더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우뚝 일어섰다. 거울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짧아진 머리를 응시했다. 뭔가 단단히 결심한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날 밤 선영 씨는 침대가 아닌 택배상자에 몸을 구겨 넣고 잠을 잤다. 상자에 들어가기 전, 검은색 유성매직으로 크게 주소를 적는 일도 잊지 않았다.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 179-10' 

 혹시 택배사고로 반송된다면 집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보내는 사람 주소도 꼼꼼히 적었다. 매직 냄새가 밤새 코를 찔렀다. 덜컹거리는 화물차에 실린 찰흙덩이는 상자 안에서 이리저리로 흔들렸다. 배 안에서는 더욱 심했다. 

 ‘쿵’ 택배기사가 상자를 내던졌다. 택배 차량은 빠르게 저만치 멀어졌다.   

 상자에서 굴러 떨어진 찰흙덩이는 고개를 들었다. 

  "우와, 나 정말 사려니숲에 왔어."


 한라산 깊은 숲, 그곳보다 더 깊은 안쪽의 솔아니, 바로 사려니 숲이었다.

 온통 나뭇잎으로 덮인 하늘을 황홀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했다. 아름다웠다. 하늘도 땅도 온통 초록색이었다. 하나도 같지 않은 다른 색의 초록. 세상에 이렇게 많은 초록색이 있다니 신기했다. 커다란 나무가 뜨거운 해를 막아주었다. 손차양을 하지 않아도 하늘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찰흙덩이가 굴러다니기에 딱 좋은 날이었다.

 "좋아."

 찰흙은 숲 속을 헤집으며 구르기 시작했다. 속도조절이 서툴러 삼나무에 부딪히고 노루 똥에 처박히면서도 깔깔깔 웃어댔다. 붉은 길에 접어들었을 땐, 작은 화산송이들이 찰흙덩이 겨드랑이에 콕콕 박혀 간지럼을 태웠다.

 그렇게 정신이 팔려 또 한 번 노루 똥에 처박혔다.

 "아휴, 똥냄새. 하하하하하"

 찰흙덩이는 여전히 데굴데굴 구르며 정신없이 웃어댔다.

 "아유, 찰흙냄새. 똥이니까 똥냄새가 나지 당연한 거 아니야?"

 울그락불그락 달아 오른 얼굴을 하고선 노루 똥은 멀어지는 찰흙덩이 뒤통수에다 대고 소리 질렀다. 찰흙덩이는 정신없이 구르느라 똥이 하는 말을 듣지도 못했다

 찰흙덩이가 숲을 얼마나 굴러다녔는지 이제는 흙덩이가 되었다. 사려니숲의 건강한 흙으로 온몸이 덮였다. 잠시 나무에 기대어 앉아한숨 돌리는 찰나, 흙덩이의 어깨 위로 풀 하나가 올라탔다. 작고 귀여운 풀이었어요. 

 "어라, 안녕. 넌 못 보던 녀석 같은데 제주 흙덩이는 아니지?"

 풀이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세상에. 이 숲에서는 풀이 말을 하다니…….’  

 놀란 흙덩이는 정신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안녕, 난 밀양에서 왔어. 넌 좀비 비추지? 네가 피우는 작은 연보라 꽃을 좋아해. 종 모양의 앙증맞은 꽃. 그래서 네 이름도 정확히 알고 있어." 

 "밀양? 대단한데. 난 아직 새싹이라서 꽃은 없어."

 "괜찮아, 지금도 충분히 멋져. 자, 다시 출발할 거야. 꽉 잡아."

 흙덩이가 다시 구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작은 흙덩이들이 몰려와 따라 구르기 시작했다. 

 선영 씨의 영어공부방 친구들이었다.

  “너희들도 찰흙이었구나!"

 선영 씨는 표현하기 힘든 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것도 잠시, 흙덩이들은 한바탕 신나게 함께 굴렀다. 다 같이 굴러다니니까 더욱 신나고 재밌었다. 마치 숲의 주인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선영 씨는 예전부터 꿈꿔왔다. 공부방 친구들과 신나게 깔깔거리며 하루 종일 놀 수 있기를.     

 흙덩이들은 어느새 눈이 가득 쌓인 언덕에 다다랐다. 

 "와, 눈이야."

 모두 눈을 보고 감탄했다.

 "우리 여기서 눈썰매 타요."

 다은이는 벌써 뛰어내릴 준비가 되었다.

 "썰매가 있으면 좋을 텐데."

 "무슨 소리야. 우린 흙덩이야. 신나게 굴러서 내려가자."

 "좋아, 모두 하나, 둘, 셋 하면 뛰어내리기다. 하나, 둘, 셋."

 흥분한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한 흙덩이들은 통통 튀어 오르며 숫자를 외쳤어요.

 흙덩이들이 언덕에 온몸을 맡기고 용감하게 미끄러져 내렸다. 흙덩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온몸으로 맞이하는 눈은 부드럽고 차가웠다. 긴 언덕 아래로 신나게 굴러 떨어지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끅끅끅, 너 눈덩이가 됐어"

 "너 도야, 하하하하."

 얼마 만에 배꼽 빠지도록 웃어보는 건지. 모두들 몸집은 그전보다 훨씬 더 커졌지만, 마음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풍덩”

 “퐁.”

 “퐁.”

 “퐁.”

 “퐁.”

 “퐁.”

 “퐁.”

 “퐁.”

 “퐁.”

 아홉 개의 물기둥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하나의 커다란 물기둥과 여덟 개의 작은 물기둥들. 찰흙을 감싸고 있던 가장 바깥쪽의 눈이 제일 먼저 사라졌다. 순식간에 물에 녹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흙도 마찬가지였다. 맑은 호수 위로 흙탕물이 일었다. 아홉 개의 찰흙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물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찰흙은 호수의 깊은 바닥으로 점점 가라앉으며 물속에서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안녕하세요."

 "어서 와. 숙제 내세요." 

 선영 씨는 작은 책상에 앉아서 아이들이 낸 숙제를 하나하나 자세히 살피며 채점했다. 그러다 잠시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컴퓨터 자판을 말없이 두드리는 아이의 어깨 위로 자그마한 좀비비추 풀이 돋아났다. 새끼 고양이가 귀를 쫑긋거리듯 풀이 여린 몸을 살랑거렸다.


 ‘나는 흙덩이야.’

 선영 씨는 좀비비추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 번 더 깨달았다.

 '우리 모두 흙덩이야.'

 그때 아이가 뒤돌아보며 선영 씨를 향해 씩 웃었다. 

 좀비비추는 머지않아 앙증맞고 귀여운 종 모양의 꽃을 피우겠지. 벌써 바람에 흔들리는 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땅그랑 땅그랑, 흙덩이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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