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종이도 귀할때가 아니었겠나. 달리기 상품으로 노트나 연습장을 주던 시절이 있었고, 거기에서 더 더 더 더 뒤로 가보면 무슨 파피루스를 만들거나 소가죽에 잉크를 점찍어가면서 자신의 생각과 정보를 기록하던 시절이 있었다. 아무래도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짙은 농도로 정보를 대했을 것이다.
어쨌든 비쌌을테니까. 돈 없는 학생 사진사가 셔터 한 번 누를 때마다 오백 원~ 천 원~ 하고 돈 빠지는 환청을 듣는 것과 비슷한 심정 아니었을까. 그 절박함과 소중함이 기록의 밀도를 만드는 정수일지도 모른다.
알랭 드 보통의 책에 존 러스킨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림 그리는 행위에 대한 이야기다. 대상을 직접 그려보면, 그 사물을 훨씬 깊게 이해하게 된다고 했다. 선 하나를 긋기 위해서는 뚫어지게 관찰해야 하니까. 그런데 사진이 발명됐다. 사람들은 생각했다. '일단 사진으로 이 멋진 장면을 찍어두고, 나중에 작업실에서 시간을 들여 자세히 들여다보며 그림으로 옮겨야징~'
하지만 인간은 얼마나 간사한가.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영 그렇게 하지 않게 되었다.
여기서부터는 내 생각인데, 마치 그 시절 그림쟁이들의 변명이 내게 보내는 카톡이나 사진첩에 수백 기가씩 쌓인 사진과 동영상들의 처지와 소름 돋게 닮아 있다. 핵심은 “어쨌든 보내놨으니까”. 사진으로 찍어놨으니까. 링크 복사해놨으니까. 카톡방에 던져놨으니까.
놨으니까 놨으니까 놨으니까
우리는 그걸로 그냥 안심해버리고 영원히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러고 계정 한번 잃어버리거나 폰을 바꾸면 끝이다. 결과적으로 다시 꺼내보고, 깊이 사랑하고, 소중히 여길 수 있도록 다시 제대로 관찰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남겨놓은 기록들이 내 삶에 무슨 의미를 가질까?
물론 추후에 핸드폰이 자동으로 말아주는 ‘1년 전 오늘’ 같은 슬라이드쇼를 보며 추억에 잠기고 그 시간으로 돌아가볼수도 있겠지만, 조금 더 풍부하게 그 순간을 만끽하고 내 안에 남길 수 있는 더 나은 방법들이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그리고 오늘 그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된 이유는. 요즘 예스24 북클럽 같은 정액제의 북리스트를 들여다보고 있다보면, 딱히 읽을만한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게 아니라 이들의 정신을 보고 내가 배울 가치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어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그중에도 보석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내 손은 종종 고전이나 익히 아는 작가들의 책으로 향하곤 한다.
어째서 같은 삶을 사는데 이렇게 고통과 통찰의 농도에 차이가 있을까. 아픈만큼 느끼는게 있어서일까? 물론 그렇겠지. 현대사회는 안락해졌으니까. 사람들은 안락한 쇼파에 등을 파묻고 그걸 관으로 삼고 숨 쉰 채 죽어가고 있다. 그건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거기에서 피어나는 꽃들이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현시점의 나는 그런 온실 속의 꽃을 원하는게 아니다. 생명력이 거칠게 맥동하는 그런 자연의 이치가 담긴 현상들을 보고 싶다. 누군가의 그럴듯한 사상이나 세련된 라이프 스타일을 곱게 분칠하는 그런 문장 대신, 해와 달의 리듬에 맞춰 자연스럽게 피어나고, 싹 틔우고, 억세게 가지를 뻗어내는 생명체로서의 인간이 보여주는 몸짓을 읽고 싶은 것이다.
아차차. 다시 돌아와서. 나는 아이폰의 메모 어플을 쓸때 그런 카테고리 하나를 만든적이 있다. ‘내 생각’ 이라는 카테고리. 거기에다가 내가 기억하고 살아가면 좋을법한 생각들을 옮겨놓았다. 삶을 살면서 이런건 참 견지하고 살면 좋겠다 하는 생각들 말이다. 고난이 찾아올때마다 그런게 하나둘씩 생기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그 개인의 깨달음을 잃어버리고 산다. 한동안 메모 어플을 쓰면서는 그걸 종종 들여다보면서 내 인생 고비와 깨달음들을 복습하며 살았다.
하지만 요즘에는 메모들이. 그러니까 내 생각들이 전부 흩어져버렸다. 나에게로 보내는 카톡에 파편화 되어서 찔끔. 사진첩 스크린샷으로 찔끔. 적다만 블로그 임시저장글에 찔끔 뭐 이런 식이다. 이게 다 존 러스킨이 경고했던, 그 편리함이라는 도구가 가져온 참사일까.
예전에는 이런 것들을 글로 적은 뒤에, 종류별로 분류해서 송곳으로 펀칭이라도 해서 실로 묶어 따로 보관하지 않았을까? 이사를 갈때도 그걸 꼭 챙겨서 매달 1일에는 한번씩 커피를 마시며 정독하지 않았을까? 다른게 아니라 그게 나의 성경이고 나의 불교 경전이지 않나. 뭐 아니어도 좋다. 그 시절의 나는 어쩐지 그런걸 하고 싶었고, 지금은 그걸 놓치고 있다고 느꼈고, 다시 하고 싶어졌다. 아무래도 내 인생은 나라는 신을 모시고 사는 순례길이니까. 저 앞에서 항상 등을 보이며 걷고 있던 신의 실루엣에 힘겹게 다가가 어깨를 톡톡 두드려보면, 결국 무심하게 돌아보는건 다름 아닌 나 일 것이다. 나는 나와 산다. 그러니 06시즌의 나. 혹은 26시즌의 나. 이런 여러 시절의 내 생각과 깨달음에 종종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