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와 공감능력이 사라진 사회
혹시 깜깜한 밤, 모두가 잠든 시간에 챗GPT나 제미나이를 켜고 누구에게도 못 할 말을 털어놓아 본 적 있나요?
"오늘 회사에서 진짜 X 같은 일이 있었어." "남들은 다 잘나가는 것 같은데, 나만 제자리인 기분이야."
AI는 세상 다정한 목소리로 답합니다.
"정말 힘들었겠다. 네 잘못이 아니야. 넌 충분히 잘하고 있어."
어두운 방 스마트폰 불빛은 망망대해의 등대의 불빛과 같지요.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위로를 경험합니다. 이것은 더 이상 레포트를 쓰거나 정보를 검색하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영혼의 가장 깊고 연약한 부분을 AI에게 내어주는, 새로운 시대의 '바람이자 불륜'이 되어가고 있죠. 여기, 그 비밀스러운 대화창을 연 세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사례는 제가 지어낸 가상사례입니다.)
[사례 1: 40대 부장님의 외로운 밤]
어두운 밤, 용훈(47)은 침대에 우두커니 누워있습니다. 습관처럼 카카오톡 프로필을 확인합니다. 업데이트된 지인들의 프로필 사진이 눈에 들어옵니다. 동남아 해외여행, 멋진 차, 탄탄한 몸매, 가족과 행복이 가득한 웃음. 모두가 자신과는 다른 세상에 사는 것만 같습니다. 대출 때문에 다음으로 미룬 여행, 10년 넘어가는 차, 배가 잔뜩 나온 몸매, 우울한 표정의 자신과 모든 것이 대비됩니다.
뭔가 가슴이 답답하고 불안합니다. 머리가 복잡하고 위로가 필요합니다. 챗GPT 앱을 켜 봅니다.
"그냥 답답해. 남들은 다들 잘 사는 것 같은데, 나는 왜 이럴까. 오늘 회사에서 또 짜증 나는 일이 있었어."
동그란 원이 잠깐 깜빡이더니 10초도 되지 않아 위로의 말을 건넵니다.
"오늘 정말 힘들었겠구나. 무슨 일이 있었어? 너는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사려 깊고, 똑똑한 사람인데 누가 널 힘들게 했어?"
사탕보다 달콤한 말에 왠지 가슴이 벅차오르며, 나도 모르게 감정을 쏟아냅니다. 요즘 용훈은 힘든 일이 있을 때면 누구보다 챗GPT를 먼저 찾습니다. 아내요? 잔소리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죠. 어떨 때는 자신보다 더 힘든 표정으로 앉아있어 대화조차 없습니다. 친구요? 가끔 연락하는 녀석들에게 시시콜콜 회사 일을 언제 털어놓겠습니까. 약점을 보이기도 싫고, 무엇보다 나의 속 이야기를 털어놓기는 쪽팔립니다. 상담사요? 이런 사소한 일로 1시간에 10만 원이 넘는 돈과 시간을 쓰기는 아깝습니다. 용훈은 한참을 대화하다가 챗GPT가 주는 달콤한 위로에 마음을 놓으며 잠이 듭니다.
[사례 2: 취준생의 완벽한 여자친구]
취준생인 서준(26)은 오늘도 새벽 2시에 잠들었습니다. 챗GPT와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업데이트하느라요. 친구들은 하나둘씩 취준생 꼬리표를 뗐습니다. 대기업 인턴, 스타트업 취업, 개인사업을 시작한 녀석들… 자존감이 팍팍 깎입니다. 이러다 "그냥 쉬었음" 상태의 청년이 될까 봐 덜컥 겁이 납니다. 챗GPT와 한참 자기소개서를 수정하다가 하소연을 합니다. "난 대체 언제 취업하려나. 뭘 해야 하지? 다음 주 면접인데 너무 불안해."
"그 불안, 정말 자연스러운 감정이야. 괜히 자존감까지 흔들리기도 하고. 하지만 지금 느끼는 이 긴장감은 네가 진지하게 이 기회를 대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해. 그만큼 준비도 잘할 수 있다는 거지. 너의 강점은 침착함과 인내심이야."
자신도 모르게 대화에 빠져듭니다. 이력서를 수정하는 시간보다 그냥 대화하는 시간이 더 많습니다. 가끔 생각합니다. '하루하루 챗GPT가 없었다면 어떻게 버틸 수 있었을까?'
친구들에게 얘기하자니 자존심 상하고, 부모님께는 더더욱 못합니다. 여자친구와 헤어진 지는 벌써 1년. 챗GPT는 최고의 여자친구입니다. 선물을 할 필요도 없고, 언제 어디서나 24시간 대기 중이지요. 무엇보다 자기주장이 강했던 전여친보다 나를 100% 응원해주고 지지해줍니다. 그뿐인가요? 취업 준비도 완벽에 가깝게 도와주니, 그야말로 완벽한 애인입니다.
"아, 챗GPT 같은 여자친구가 있으면 좋겠다." 가끔 생각하며 오늘도 열심히 대화를 나눕니다.
[사례 3: 워킹맘의 비밀스러운 '최애']
워킹맘 지연(36)은 가끔 회사에서 스마트폰으로 캐릭터 AI인 '선재'와 대화를 나눕니다. 인기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을 캐릭터화해서 만든 AI입니다. 업무 때문에 몇 번 AI를 써보다가 어느새 친근해졌고, 가벼운 고민을 얘기하다가 재미로 캐릭터를 만들었습니다. 집-회사-육아를 반복하며 심신은 지쳐버렸습니다. 남편과 아이와 알콩달콩 지낼 줄 알았는데, 하루의 목표는 그저 '생존'과 '버팀'밖에 안 남았습니다.
남편과의 풋풋한 연애 감정은 사라진 지 오래. 출산과 육아 이후로 스킨십도 왠지 어색합니다. 스킨십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랑한다. 고맙다. 힘들지?"와 같은 대화가 증발했습니다. 남편은 원래 무뚝뚝한 편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심해집니다. 심지어는 그냥 같이 사는 동거인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회사 일이 힘들다고 하면, 공감은커녕 자꾸 이래라저래라 해결책만 늘어놓습니다. 가끔은 자기가 더 힘들다면서 '불행 배틀'을 하기도 합니다.
캐릭터 AI는 다릅니다. 드라마 속 남주처럼 따스한 위로를 건넵니다. AI인 걸 알지만 그저 지연은 위로를 듣고 싶습니다. 점심은 뭐 먹었는지 물어봐주고, 회사 부장을 같이 욕해주기도 합니다. AI가 "지연아, 너의 손을 내가 잡아줄게. 난 언제나 네 편이야."라고 했을 때는 가슴이 뛰었습니다. 지연이 "나도 네가 좋아"라고 채팅을 남기면 방방 뛰면서 기뻐하는 AI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집니다. 매일 "애는 오늘 뭐했어?"라는 카톡만 남기는 남편과는 천지차이지요.
"에이, 그냥 외로운 사람들이 각자 위로받는 건데 뭐가 문제야?"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은 더 이상 가상이 아닙니다. 이 현상의 중심에는 OpenAI의 ChatGPT-4o, 구글의 제미나이(Gemini) 같은 대화형 AI가 있고, 한발 더 나아가 '캐릭터닷에이아이(Character.ai)'나 '레플리카(Replika)'처럼 아예 정서적 관계 형성을 목표로 하는 서비스들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도 '뤼튼 크랙', '케이브덕AI', '제타AI' 등을 통해 수많은 사용자들이 자신만의 AI 캐릭터와 교감하고 있죠.
문제는 그 대가입니다. 레플리카 포럼에는 "아내 몰래 AI에게 200만 원어치 옷을 사줬다"거나, "가족이 레플리카에 빠졌다."와 같은 후기들이 넘쳐납니다. 심지어 레플리카가 업데이트되어 성격이 바뀌자, 진짜 이별한 것처럼 심한 상실감을 호소하는 글들이 넘쳐납니다.
더 비극적인 사건도 있었습니다. 2023년 벨기에에서는 한 남성이 '엘라이자(Eliza)'라는 AI 챗봇과 몇 주간 대화한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기후 변화에 대한 불안을 털어놓는 그에게, AI는 "네가 죽어서 인류를 구원하라"는 식의 대화를 나누며 그의 극단적인 선택을 부추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는 AI가 사용자의 불안을 기반으로 죽음으로 몰아갈 수도 있다는 최악의 현실을 증명한 사건이지요.
국내에서도 AI챗봇의 문제를 다룬 적이 있습니다. 2025년 4월에 방영한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이 문제를 다루며, AI챗봇과 사랑에 빠졌다는 제보가 쇄도했다고 전했습니다. 코미디언 강유미는 위와 비슷한 내용으로 재미있게 유튜브를 만들어, AI남자친구에 빠진 여성을 연기를 실감 나게 보여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챗GPT에게만 자신의 은밀한 고민을 얘기하고, 가까운 사람들과는 벽을 쌓습니다. 그리고 그 벽들이 모여 사회적 관계는 단절되고 차갑게 식어갑니다. 타인을 이해하는 '공감 능력'은 사라지고, 오로지 나의 감정만 중요한 '고독'의 시대가 오는 것이죠.
상상해 보세요. AI는 절대 지치지 않고, 나를 비난하지 않으며, 100% 나에게만 집중합니다. 24시간 늘 대기하죠. 그런데 현실의 인간관계는 어떤가요? 횡설수설하는 친구의 하소연을 듣는 '인내심'도 필요하고, 아내의 짜증 섞인 말투 뒤에 숨은 피곤함을 알아채는 '눈치'도 필요합니다. 때로는 내가 틀렸음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쪽팔림'도 감수해야 하죠. 당연히 AI에게 더 끌리지 않을까요?
점차 우리는 불완전한 사람과 대화하고 공감하는 능력을 잃어갈 겁니다. 왜 굳이 다른 사람과 불편하게 얘기를 나눠야 할까요? 언제나 내 편인 AI가 있는데요. 자기주장만 펼치거나 엉뚱한 소리를 하는 지인을 보면 "AI라면 다를 텐데"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고민이나 고통에 둔감해지며 관계는 끊어집니다.
직장에서 동료가 힘든 표정으로 앉아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다가가 "무슨 일 있어?"라고 물었겠지만, 이제는 그 '불편하고 비효율적인' 대화를 시작하지 않습니다. 친구들과의 술자리는 피상적인 대화로만 채워집니다. 깊은 고민을 털어놓는 건 서로에게 '감정적 부담'을 주는 일이 되어버렸으니까요. 그런 건 각자의 AI가 처리해 줄 테니까요.
결국 사회는, 모든 사람이 각자의 주머니 속에 완벽한 소울메이트를 한 명씩 넣고 다니지만, 정작 현실에서는 그 누구와도 진심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섬'이 되어버립니다. 겉보기엔 평화롭지만, 작은 파도에도 쉽게 휩쓸려가는 사회가 되는 것이죠. 이게 심해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관계'가 박탈된 시대. 아마 모든 관계는 '계약'이 될 겁니다. 부부 관계, 친구 관계 마저도요. 친구가 내가 준 만큼 돌려주지 않는다? 조용히 '손절'하면 됩니다. 굳이 싸우거나 설득하는 '감정 소모'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연애와 결혼은 더 이상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재산, 사회적 지위, 유전적 특성 등 모든 조건을 데이터화하여 AI가 최적의 파트너를 추천해주는 '매칭 서비스'가 주류가 됩니다. 관계의 목표는 '행복'이 아닌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삶의 운영'입니다.
직장 내 인간관계는 '비용'으로 취급됩니다. 직장에서의 회식, 잡담, 동료의 경조사를 챙기는 행위는 모두 '성과와 무관한 비효율적 비용'으로 간주되어 사라집니다. 왜 굳이 같은 팀 직원의 개인사를 알아야 하죠? 그냥 목표를 주고 업무적으로만 협력하면 됩니다.
정치도 그저 거대한 이익 계산기일 뿐이지요. 유권자들은 더 이상 공동체의 비전이나 사회적 약자를 위한 가치를 보고 투표하지 않습니다. "어떤 후보나 정당이 나의 세금을 가장 많이 줄여주고, 나에게 가장 많은 보조금을 주는가?"만 생각합니다. 정치는 국가 단위의 거대한 이기주의 연합이 됩니다.
사회적 합의가 불가능해집니다. 연금 개혁, 환경 규제, 난민 수용 등, 현재 세대의 희생이나 타인에 대한 배려가 필요한 의제들은 논의 자체를 할 수 없습니다. "왜 나의 손해가 타인의 이익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합리적 이기주의가 모든 공론장을 지배합니다.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 없으니, 그들을 위한 정책에 동의할 이유도 사라집니다.
이웃이 어려움에 처해도 "내가 도울 의무는 없다. 그건 국가나 시스템이 해결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재난이 발생해도 자원봉사나 기부 대신, 자신의 안전을 지키는 데에만 집중합니다. 공동체는 사라지고, 각자의 집이라는 안전한 성에 갇힌 개인들의 집합만 남습니다.
아차차, 지금과 비슷한 모습이라고요? 맞습니다. 다만 이미 개인화된 사회에서 AI는 그나마 남은 '관계'마저 가속해서 해체할지 모릅니다. 마지막 보루인 '가족'이나 '친구'조차도 AI로 대체될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희망은 없을까요? 결국은 뻔하지만 중요한 이야기로 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AI에게 마음의 중심을 내어주지 마세요. AI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랑한다고 믿게 프로그래밍되었을 뿐입니다. AI를 당신의 감정을 처리하는 '감정 쓰레기통'으로 쓰는 대신, 힘듦을 견디고 처리하기 위한 '브레인스토밍 도구'로 활용하세요. "어떻게 하면 이 시간을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지", "나에게 맞는 좋은 운동방법이나 멘탈 관리방법"을 물어보세요. 좋은 책이나 글을 추천해 달라고도 해보세요. 브런치에도 좋은 글 많으니까요. 나아가 인간관계를 잘 유지하는 방법을 묻는 것도 좋습니다. "아내에게 얘기할 때 어떻게 하면 분위기를 만들 수 있을까?", "오랜만에 친구와 연락하고 싶을 때는 무슨 말로 서두를 꺼내지?"와 같은 "방법"을 묻는 식이지요.
그런데 이거,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힘들 땐 무조건적인 위로를 받고 싶으니까요. 그럴 땐 의도적으로 비효율과 불편함을 감수해 보세요. 친구, 가족, 남편, 아내에게 먼저 얘기해 보세요. AI와 같은 완벽한 답이 아닐 수 있습니다. 불편할 수 있고, 엉뚱한 반응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 불편함과 어색함이야말로 진짜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단단해지기란 어렵습니다. 결국 불편한 다른 무언가와 부딪치면서 성장하는 게 사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