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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쩌면 특별한 존재가 아닐까?

「희극의 파편」48. 니콜라이 고골 - 광인의 수기 中

by 재준

과장이 굉장히 격분했다. 내가 관청에 가자 그는 나를 자기에게 불러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 말 좀 해봐. 자넨 대체 뭐하고 다니는 거야?"

"뭘 하다니요? 아무것도 안 합니다." 나는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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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생각해보라고! 자넨 이미 마흔이 넘었으니 현명해질 때도 되었잖아. 도대체 자넨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자네의 모든 장난질을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야? 국장님 딸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잖아! 스스로를 보면서 자네가 누군지 생각 좀 하지 그래? 자넨 보잘 것 없는 인간일뿐 그 이상이 아니야. 자네에게는 땡전 한 푼 없어. 거울로 자신의 얼굴 좀 보게나, 자네 감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젠장, 얼굴을 약간 약병처럼 생겨먹고 머리 위에는 머리카락 한 줌을 포마드를 발라 우크라이나식 도가머리처럼 위로 삐죽 고정시켜 놓은 주제에 자기 한 사람만 모든 걸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군. 왜 내게 화를 내는지 이해해, 이해하고 말고. 그는 질투하고 있는 거다.


「희극의 파편」은 단편, 장편 희곡 중 재미있는 한 장면을 선별해 그 감정적 여운과 미학적 장치를 분석하고 현대적 맥락에서 사유해보는 에세이 시리즈입니다. 말은 거창하지만 그냥 특정 장면이나 대사를 가지고 이리저리 뜯어보면서 독자와 함께 놀아보는 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희극의 파편」 마흔여덟 번째 작품은 니콜라이 고골의 '광인의 수기'입니다.

<고골 이전 작품 1 >


간단한 내용은 이러합니다.


화자는 국장의 서재에서 깃털펜을 깎는, 하찮은 잡일만을 맡은 하급 관리입니다. 그는 몹시 외롭고, 홀로 망상에 잠기는 데 익숙한 사람입니다. 그러던 중 국장의 딸을 보게 되고 첫눈에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나 그녀가 부유한 시종무관과 약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의 정신은 점차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어느 순간 그는 강아지들이 사람처럼 대화하는 소리를 듣고, 심지어 그들이 주고받는 편지를 엿보려 하기도 합니다. 이후 자신의 초라한 처지 때문에 그녀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고 생각한 나머지, 자신이 사실은 숨겨진 스페인 국왕이 아닐까 하는 망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결국 그는 정신병원에 수용되지만, 여전히 자신이 스페인의 국왕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제가 선별한 장면은 자신의 직장에 가서 자신이 스페인 국왕이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장면입니다.


부담없이 가볍게 한번 읽어보시고 가세요^^


<마르토브리 86일.(*3월을 의미하는 러시아어 '마르트'와 9,10,11,12월의 어미 '브리'가 합쳐진 말. 화자는 미친 상태로 정확한 날짜 구분도 하지 못하고 있다.) 낮과 밤 사이>


이미 3주 넘게 관청에 가지 않고 있어서 오늘 회계 검사관이 와서 부서에 나와달라고 했다. 나는 장난삼아 관청에 갔다. 과장은 내가 자신에게 굽실거리며 용서를 구할 거라 생각했지만 나는 그를 그리 노엽거나 호의적이지 않은 무관심한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마치 아무도 보지 않은 듯 제자리에 앉았다. 나는 관청 사무실의 모든 어중이떠중이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앉아 있는지를 알게 된다면... 아! 어떤 소동이 일어날까, 그리고 과장도 지금 국장 앞에서 인사하듯 그렇게 허리를 굽혀 내게 인사하기 시작하겠지.

내 앞에는 요약해야 할 무슨 서류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손가락도 대지 않았다. 몇 분 후 모두가 분주해졌다. 국장이 온단다. 많은 관리들이 그 앞에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앞다투어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가 우리 부서를 지날 때 모두가 자신의 연미복 단추를 잠갔다. 그러나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국장이 뭐라고! 나는 그 앞에서 결코 일어서지 않을 거다. 그가 도대체 무슨 국장이란 말인가? 그는 국장이 아니라 코르크 마개이다. 평범한 코르크 마개. 보통의 코르크 마개 그 이상이 아니다. 병의 구멍을 틀어막는 바로 그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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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하라고 내게 서류를 들이밀었을 때가 무엇보다도 재미있었다. 그들은 내가 종이 맨 귀퉁이에 이렇게 쓸 거라고 생각했다. '주임 아무개',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국장이 서명하는 바로 그 자리에 '페르난도 8세'라고 갈겨썼다. 얼마나 경건한 침묵이 깃들었는지 봤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다만 손을 가닥이며 "그 어떤 경의도 표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한 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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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나는 곧바로 국장의 집으로 갔다. 국장은 집에 없었다. 하인은 나를 들여보내고 싶지 않아 했지만 내가 뭐라고 하니까 기세를 꺾었다. 나는 바로 내실을 향했다. 그녀는 거울 앞에 앉아 있다가 펄쩍 뛰어올라 내게서 물러섰다. 그렇지만 나는 그녀에게도 내가 스페인의 왕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행복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고 적들의 간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함께하게 될 거라는 말만 했을 뿐이다. 나는 더 이상 그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아서 밖으로 나왔다. 오, 이 교활한 존재, 여자들이여! 나는 여자란 어떤 존재인지 인제야 납득하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그녀가 누구와 사랑에 빠지는지 아직 아무도 알지 못했다. 내가 처음으로 그것을 발견했다. 여자는 악마와 사랑에 빠진다.


어떤가요?


자신이 스페인의 왕이라고 선언하고 아무 반응도 없어서 바로 빠져나와버리는 게 저만의 웃음포인트인 것 같네요ㅎㅎ. 생각만 해도 너무 민망해서 아찔한 광경일 것 같습니다.


「희극의 파편」은 독자가 가볍게 마주할 수 있도록, 그저 장면을 꺼내어 놓기만 합니다.


적용 질문입니다.



1. 내가 말을 했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그 침묵을 느껴본 적이 있나요? 혹은 내가 그런 적이 있나요?


2. 어떤 말을 못 들은 척한 적이 있나요? 혹은 일부러 모른 척한 것인가요?


3. 사람은 언제 가장 미치게 될까요? 자신의 비밀이 만천하에 까발려졌을 때, 사람들이 무관심할 때, 혹은 내가 중요한 말을 했는데 아무도 반응하지 않을 때? 혹은 정말 돈이 없을 때?


4. 나는 정상인가요? 혹은 아닌가요? 그럼 정상이 아닌 상태를 자랑스럽게 여기나요?


5. 결국 당당한 일은 무엇인가요?


「희극의 파편」은 ‘이상하게 오래 남는 순간들’을 의도적으로 골라내고, 붙잡고, 말로 돌려줍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 못하니..



-홍길동



오늘의 일화입니다.



images.jpg 슈레버 판사 (독일, 1842.07.25~ 1911.04.14)


정신 질환을 앓았던 엘리트 판사 '다니엘 파울 슈레버'


하늘에서 신의 광선이 내려와 자신과 소통한다고 믿었고 신과의 대화를 통해 세계의 질서가 붕괴되기 직전이라고 주장했다.


그 중 가장 기괴한 것은 여장에 대한 탐닉이었다.

그는 신이 자신을 여자로 만들고 싶다고 한다며, 하루빨리 여성으로 변신해 새로운 인류를 낳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눈이 있어도 보질 못하니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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