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청김치 한 사발

엄마가 들려주던 이야기 1

by 와우wow

뒷집 중국 아저씨가 또 아버지께 돈을 꾸어갔다.

지난번에 빌려준 돈도 아직 돌려받지 못했는데, 아버지는 또 아무런 조건 없이 그에게 돈을 건넸다.

왜 그러셨을까.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파란 대문 집의 송 씨 아저씨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돈을 돌려달라고 하자, 어느 건물 앞에 아버지를 세워두고는 "잠깐만 기다리라, 금방 돈을 받아다 주겠다"라고 말하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아저씨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리다 못한 아버지가 직접 건물 안으로 들어가 송 씨 아저씨를 찾았지만, 관리인은 말했다.

“그분요? 뒷문으로 진작에 나가셨어요.”


답답한 마음에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그날 밤 또 술을 드셨다.

그리고도 다음 날, 아버지는 또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주셨고, 결국 받아내지 못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큰오빠가 군 제대를 하고 집에 돌아왔다.

이곳저곳에서 빌려주고 받지 못한 돈 이야기를 들은 오빠는 가장 먼저 배추장수 아저씨 집으로 찾아갔다.

돈을 달라는 말에 아저씨는 닭발을 뜯으며 시치미를 뗐다.

“없어. 없어, 돈.”

손사래를 치며 돈이 없다고 말하는 그의 마당에는 팔다 남은 무청 한 무더기가 쌓여 있었다.


오빠는 그 무청이라도 달라고 했고, 아저씨는 귀찮다는 듯 말했다.

“마음대로 가져가.”


오빠는 수레를 끌고 가 무청을 한가득 실어 왔다.

하지만 마음이 풀리지 않았는지, 다시 그 집으로 찾아가 더 가져가겠다고 했다.

그러자 아저씨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제 그만 가져가! 애도 아니고 뭘 그렇게 귀찮게 굴어!!?”


군대를 다녀왔어도 아직 어리게만 보이는 오빠에게 대놓고 아이 취급을 하자, 오빠는 쓸쓸히 돌아왔다.

수레에 가득 담긴 무청이었지만, 오빠의 표정은 영 못마땅해 보였다.


엄마는 그 무청으로 김치를 담그셨다.

겨울이라 먹을 것도 없는 집에 무청이 가득 들어찬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고춧가루가 부족했지만, 엄마는 고춧가루를 아끼고 아껴 겨우 김치를 만들어냈다.

큰 고무통에 가득 담긴 무청김치를 보며 나는 부자가 된 듯 기뻤다.

나는 이 집 열 식구의 밥을 담당하는 셋째 딸이었다.


아버지가 돈을 못 받았든, 오빠가 무청을 억지로 가져왔든, 당장 보리밥에 곁들일 반찬이 생긴 것이 그저 좋았다.

그 김치는 마루에 올려두었다.

마루는 높게 올려진 나무 마루였지만 문이 없어 바깥 온도와 다를 바 없이 매서운 찬바람이 들이쳤다.

혹시나 고무다라에 들어 있는 김치가 얼어 터질까 봐 담요로 칭칭 감아 놓았다.


그 해, 그 무청김치는 유난히 맛이 들었다.

사발에 푸짐하게 담아 밥상에 올리면, 열 식구는 말없이 밥을 퍼먹었다.

콩나물국은 사람 수만큼 나눠주기 어려워 형제끼리 한 그릇으로 나눠 먹었다.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해 늘 한숨이 깊었던 아버지,

군대를 막 제대하고 돌아와도 변함없이 가난했던 집안 살림에 책임감을 느꼈던 오빠—

그 푸릇했던 오빠는 이제 그때의 아버지보다도 나이를 더 먹어 할아버지가 되어 있다.


푹 익어 신김치가 되었어도, 지금껏 그 김치 맛을 따라갈 수 있는 건 없었다.

살얼음처럼 시린 마루에서 담요로 감싸 안았던 그 무청김치.

춥고 배고픈 시절, 우리가 함께 먹던 그 김치는 그 자체로 위로였고, 희망이었다.


그 겨울 이후로도 아버지는 여전히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셨다.

돈을 빌려주고 받지 못하는 일은 계속됐고, 그럴 때마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셨다.

“사람은 그래도 믿어야지…”


그 말이 순진해서였는지, 착해서였는지, 아니면 체념이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아버지가 지키고 싶었던 건 사람과 마음이었고,

우리가 버텨낼 수 있었던 건 그 무모할 만큼 따뜻한 마음 덕분이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겨울 무청을 보면,

몸서리치게 추웠던 그 해 겨울이 생각난다.

그러면서도, 묘하게 따뜻했던 기억이 가슴 한편에서 조용히 피어오른다.



칠순이 넘은 엄마의 이야기는 소중하다.

내가 듣고 그걸 글로 쓰면 정말 좋아하는 우리 엄마..

우리 엄마의 무궁무진한 이야기는 여기에 계속 남겨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