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영화 <윤희에게>를 보고 오타루에 가고 싶어졌다. 그해 여름엔 말도 통하지 않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도 다녀왔는데, 일본은 한국과 비슷한 점이 많음에도 선뜻 겁이 났었다. 코로나 19가 한국을 덮치고 나서 영화를 보고 바로 오타루에 가지 못한 걸 많이 후회했다. 그로부터 3년 뒤, 나는 대학을 졸업했고 1인분의 몫을 해내는 사회인이 되었다. 입사하면서 정말로 집-회사-운동을 반복하는 생활에 지치고, 일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아 이러다 번아웃이 올 것 같고, 엔화가 많이 떨어졌고 일본 개인 여행도 된다는 소식을 접하자 바로 겨울 삿포로 비행기 티켓을 샀다.
연초가 되어서도, 여행 날짜가 다가옴에도 일본 여행 계획을 짜지 못했다. 3일 전부터 교통과 삿포로, 오타루 주변 중심지를 알아본 상태로 일본으로 떠났다. 오랜만에 온 인천국제공항은 비교적 이른 아침이었는데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많았다. 코로나 19가 이제 일상과 함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비행기 좌석에 앉고 나서야 긴장이 풀렸다. 비행기는 기상이 좋지 않아 30분 정도 연착이 되었고, 이륙을 느끼고 싶어 잠을 견뎌냈고 이륙하자마자 잠이 들었다. 일본 홋카이도 상공에 들어설 때쯤 일어나 창가를 바라보니 눈으로 가득했다. 삿포로 현지인처럼 보이려면 코트를 입고 다녀야 한다는데, 추위가 조금 걱정되었다. 일본어를 할 줄 몰라 긴장하며 비행기에서 내리고, 입국 수속을 밟았다. 웬일로 JR 트레인, 지하철을 잘 타고 숙소에 무사히 도착했으나, 숙소에서 스스키노 거리를 생각하지 못하고 걸어가다가 길을 여러 번 잃었다. 하지만 여행의 묘미는 새로운 길에서 발견한 것들 아니겠는가. 낯선 곳에서 낯선 것들을 온몸으로 흡수했다. 4시가 넘어가면 이미 어둑해진 거리, 조용한 도시, 빈티지 샵이 많고 현지인만 갈 것 같은 식당들을 표시하면서 걸어가니 반짝이는 니카짱을 찾고 비로소 삿포로에 왔음을 실감했다.
둘째 날은 아침부터 부지런히 걸었다. 길을 자주 잃어버려서, 엉뚱한 곳으로 자주 가는 바람에, 낯선 곳을 눈에 담고 사진도 찍고, 영상도 찍고, 앞으로 걷다가 뒤에도 봐야 하는 등 혼자 여행하면 바쁘다. 또한 언어를 잘 모르기 때문에 시덴과 버스에서는 집중해야 했고, 삿포로 시내 끝과 끝을 구경하느라 이동하는 시간이 절반이었다. 많은 영상을 찍었어도 살릴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없었단 얘기이기도 하다. 초안 영상엔 죄다 이동하는 것만 있어서 일본의 교통수단을 경험하러 간 것인지, 관광을 하러 간 것인지 모르겠는 영상이 나와서 많이 편집했다. 야경에 별로 흥미가 없는 내가 처음으로 모이야와마 전망대에서 삿포로 야경을 보고, 바람이 많이 불었지만 새삼 까만 하늘 아래 빛나는 도시에 감동받았다. 삿포로 TV 전망대도 아니고 먼 곳까지 와서 야경을 본 것에 후회가 없었다.
셋째 날 조식을 먹으러 카페테리아로 내려가니 엄청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눈이 조용하게 쌓였다. 여행하는 동안 눈을 맞지 못하고 가나 하는 아쉬움은 사라졌다. 우산을 챙기지 않아 호텔 로비에 있는 비닐우산을 들고 다녔다. 금방 내리는 눈은 오븐에서 바로 나온 빵 같았다. 하도 많이 내리는 눈을 다 치우기엔 자꾸만 쌓여서 사람과 차가 다닐 길만 만들고 눈을 쌓아만 둔다. 그러면 눈이 단단해지고 얼음이 되어서 딱딱하다. 눈을 밟으면 오래 전에 내린 눈인걸 안다. 하지만 계속 내리는 눈을 밟으면 푹신하고 부드럽고 과자를 밟는 소리가 난다. 내 발도, 우산 꼭지도 모든 눈을 가볍게 통과한다.
오타루로 가는 길에 바다가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바다가 보이는 자리까지 기억하고 갔는데도, 반대편에 앉아 바다를 멀리서 보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관심이 없었는지 창가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나는 카메라 줌 인을 해 노란 출입문 밖으로 보이는 바다를 찍었다. 이때 영화 <윤희에게> 오프닝이 생각났고, 영화는 예약석에서 찍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미나미 오타루역에 내려서 기차가 가는 걸 찍는 관광객을 보며 늦었지만, 나도 기차가 출발하는 영상을 담았다. 역 밖으로 나가자마자 나는 이 작은 도시를 사랑할 것임을 알았고, 오타루에서도 눈이 쉼 없이 내렸다. 영화 속에 나온 카페를 찾으러 가는 길은 오르골 전당과 운하가 있는 곳과는 멀었다. 하지만 주택가 근처에서 많은 눈과 눈을 치우는 할머님과 자동차, 버스를 담았다. 조용한 이 도시가, 정말로 눈이 다 녹으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 겨울이 아닌 다른 계절에 다시 오고 싶어졌다. 오르골 전당에서는 30분, 정각 단위로 시계탑에서 소리와 연기를 뿜는다고 한다. 마침 3시 30분이었고, 나는 그 모습을 담았다. 내가 오르골 전당을 둘러보고 나올 때쯤엔 눈이 더 많이 와서 오르골 전당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 나는 오타루 운하를 향해 걸어갔다. 잠시 눈이 그쳐서 다행이었고, 그 사이에 한국인 관광객에게 사진을 부탁해 인생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운하 앞에서 20년 만에 만난 첫사랑은 어떤 기분일까 상상해 본다. 어색함보다 그리움이 앞선다면, 걱정도 걱정이지만 설렘과 기대감도 공존한다면 나는 그에게 무슨 말을 가장 먼저 건넬까? 영화를 본 이후로 "오랜만이네"라는 대사 말고는 나의 그럴싸한 문장을 찾지 못했다. 또다시 눈이 오기 시작한다. 운하에 도착하기 전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시야를 가리며 눈이 내린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니 정말 이러다 고립되는 상상까지 했다. 오타루에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었으나, 이 아쉬움은 내가 또 여행할 이유를 만들어 놓고 다시 삿포로로 향했다. 여전히 눈이 내리고, 오타루보다 조금 더 시끄럽고 한국보다 조용한 삿포로. 한 번도 자동차 경적 소리를 듣지 못했다. 시덴과 지하철이 익숙해질 때쯤 삿포로를 떠나야 한다.
마지막 날, 날씨가 맑고 따뜻하다. 눈도 깨끗하고 바람이 불 때마다 눈가루가 떨어진다. 눈은 내릴 때보다 내린 다음 날이 더 예쁘다는 것을 알았다. 한국 상공에 비행기가 들어올 때쯤엔 해가 지고 있었다. 해 질 녘의 비행기는 처음이라 조종실의 조종사가 부러웠다. 전경이 트인 창으로 이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다니. 공항 밖으로 나오자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가 한국임을 알게 해 준다. 공항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올 때 멀리서 보이는 남산 타워를 보자 3박 4일간의 여행은 꿈처럼 느껴졌다. 앞으로 이 기억을 안고 힘들 때마다 하나씩 꺼내 보게 될 것이다.
초록 글씨로 오프닝과 엔딩을 띄웠던 영상과 달리 이번에는 겨울, 삿포로라는 콘셉트에 하얗고 단정한 글꼴로 했다. DAY1~4도 글꼴과 영상 분위기에 맞는 것으로 최대한 찾아봤다. 테두리가 있는 것이 여전히 아쉽다. DAY2-4가 뜰 때는 나름의 포인트가 있다. DAY 2는 오도리역 포커스 아웃에서 인이 될 때, DAY 3은 자전거를 탄 남성이 자막과 가까워질 때, DAY 4는 지하철 입구에서 들려오는 딩동 소리에 맞게. SAPPRO, OTARU, KOREA는 모두 같은 위치에서. 엔딩 남산타워만 놔두기에는 밋밋해서 오랜만에 AFTER WO 초창기 시그니처 프레임을 넣었다. 마지막은 WO XI HUAN을 넣음으로써 마침표를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