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책방 탐험의 시작
‘여행 기념품, 뭐가 좋을까?’
처음으로 해외 자유 여행 갈 계획을 짜던 중 들었던 질문이었다.
그전에 여행 간 걸 떠올려 봤을 땐 고등학교 때 일본으로 수학여행 가거나, 국내로 가족들과 짧게 여행 간 게 전부였다.
그중 특히 ‘성진 투어’라는 이름으로 가족 여행의 선봉을 맡았을 때가 기억에 남았는데 틈 없는 일정이 만들어낸 기진맥진이 일촉즉발로 이어져, 결국 위험천만으로 끝났던 여행이었다. 그 기억 덕분에 다음에 여행을 가면 절대 빽빽하지 않은 아주 널널한 일정으로, 보통 다른 사람들이 3박 4일을 간다면 나는 일주일을 그곳에 머물겠다는 마음으로 여행 스타일을 확 바꿨다.
비행기표와 숙소만 잡는다면 여행 준비의 90%는 끝났다고 믿고 널널하게 비워둔 여행 계획. 짧은 날에 여러 군데를 보는 것보다 길게 여유를 두고 한 곳에 있는 걸 좋아해서, 있는 동안 그 동네 정도는 다 볼 수 있을 것 같이 넉넉해진 일정.
그 너른 여유로움 속에서 이 첫 여행을, 그리고 앞으로 있을 여행까지 함께 두고두고 기억할 수 있게 해 줄 기념품은 뭐가 있을까 고민하는 것이 설렁설렁한 여행 계획 속 작은 이정표가 되어 줄 중요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걸 여행 기념품으로 그곳에서 한국까지 가져올까?
궁금해서 찾아본 인터넷에서는 마그넷, 스노우볼, 엽서, 그 나라에서만 파는 스타벅스 MD 등이 나왔다.
마그넷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붙일 공간도 마땅치 않고 그렇게 끌리지 않아서 패스.
스노우볼은 예뻐서 모아보고 싶긴 했지만 안에 물을 꽉 머금은 채 둘러싸고 있는 유리를 깨뜨리지 않고 한국까지 가져올 수 있을지 모르겠고,
내가 앞으로 갈 모든 나라에 스노우볼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서 패스.
엽서는 가벼워서 가져오기는 좋겠지만 평소에 엽서 모으기가 취미는 아니었어서 패스,
스타벅스 MD는 원래도 모으지 않았고 관심도 없어서 패스.
이렇게 인터넷에 나온 기념품들을 패스, 패스하면서 어차피 온전히 내 맘에 들지 않으면 어떤 이유를 대고 라도 ‘이건 아니야’ 할 거 같아서 이럴 바에 많은 사람들이 모으는 건 제쳐두고 나의 여행을 기념하기 위해 정말 필요한 게 무엇일지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러다 문득 책이 생각났다.
맞아, 책이 있었지!
책을 좋아하고, 꾸준히는 못하지만 배울 수 있는
언어는 모두 배워보고 싶어서 이 언어, 저 언어 콕콕 찌르며 다니는 외국어 유목민으로서,
책은 언젠가 배워서 읽을 수 있는, 그러면서도 그 책을 읽고 싶어서 언어 공부를 더 열심히 하도록 동기부여가 될 수도 있는, 게다가 그 나라의 언어로 된 책이라면 여행을 기념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이렇게 그 나라의 언어로 된 책을 사겠다는 마음을 정하고, (그러지 않았어도 다닐 거였지만) 러시아어 학원을 끊었다.
여행 가기 한 달 전, 마침 시간이 돼서 한 달을 끊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얕은 의지로 반은 빠지고 2주 정도의 수업을 들었고, 어차피 내가 원한 건 바로 러시아어 책을 읽을 수 있는 언어 실력이 아니라 여행 갈 건데 맛보기로 한 번 배워보자 하는 마음이었기 때문에 그걸로 충분했다.
그렇게 러시아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고, 한두 개 찾아 두었던 블라디보스톡의 책방에 가서 그 정취를 느끼고, 마음에 드는 한두 권의 책을 사서 한국에 돌아왔다. 라는 완벽하고도 즐거운 결말이면 참 좋았겠지만,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뜻밖의 동행인이 생겼고, 그로 인해 내가 생각했던 여행에서 많은 것을 수정해야 했고, 나와 동행인의 여행을 내가 전부 책임져야 했었기 때문에 책방을 찾고, 책방에 갈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짐하자마자 실행하지 못해서 아쉽긴 했지만, 거기서 좌절됐다면 아마 이 글은 쓸 수 없지 않았을까?
블라디보스톡 여행으로부터 6개월 뒤, 오직 나를 위한 여행으로 그동안 정말, 가장 가고 싶었던 ‘런던’에서 나는 ‘여행 속의 일상’이라는 새로운 모습의 여행을 하게 됐다.
책과, 책방과 함께하는 여행.
나는 아직도 그 넘실거리는 새로운 물결 속에 내 온몸을 퐁당 던져 유영하고 있다.
헤엄치고, 또 헤엄쳐도, 끝나지 않을 새로움과 즐거움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