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의 시작은 고장으로부터
'아침으로 뭘 해줄까나?'
절컥, 냉동실 문을 여는 순간 이상했다. 잠이 묻어 흐릿한 눈에 들어온 건 물방울이었다. 어젯밤 삶아 냉동실에 넣은 옥수수는 얼지 않았고, 비닐엔 물방울만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두 눈을 꿈벅거리며 쭈쭈바를 만져보니 물컹물컹. 얼음통에 채워놓은 물은 살얼음만 있었다.
문이 열렸었나 싶어 꽉꽉 눌러 닫고 온도도 최대한 낮춰보고 기다려봤지만 냉동실 상태는 변함이 없었다.
수리센터에서는 냉각부품을 교체해야 할 거라며 비용이 60만 원은 나올 거라고 했다. 대부분은 수리보다 새 제품을 구입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하긴 우리 집에 온 지 벌써 14년이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지?) 고장 날 때도 되긴 했다. 그래도 이렇게 갑작스레 힘이 빠져버릴 줄은 생각도 못했다. 당장 이 안에 많은 음식들을 어쩌지. 냉장고를 새로 산다 해도 바로 들여놓을 수도 없을 텐데.
다행히 완전히 고장 난 건 아니라 조금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잔뜩 넣어 놓은 삶은 옥수수부터 동생 집 냉장고를 빌려 갔다 놓았다. 그리고 최대한 먹을 수 있는 건 먹어치웠다. 해동되어 가는 닭가슴살부터 식탁에 올렸고, 사골국물과 떡으로 떡국을 끓여 먹었다. 너무 오래되었거나 뭔지도 모르겠는 정체불명의 것들은 버려버렸다. 장을 보러 갔을 때 새로 사려다가도 '아, 냉동 안되지' 하며 내려놓았다.
처음엔 심란했지만, 생각보다 그럭저럭 살아졌다. 오히려 냉장고의 묵은 것들이 하나둘 처리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휑해진 냉동실 안만큼 내 마음도 환해졌다.
'고장이 나니 정리가 되는구나.'
당연하지만 미처 잊고 있던 생각이 떠올랐다. 언젠가 먹겠지 하며 이것저것 쟁여놓던 냉동실은 각종 봉투들로 가득 차 뭐가 있는지조차 파악이 안 됬었다. 그런데 이번 기회를 통해 샅샅이 들여다보게 된 것이다. 묵혀 두었던 것들을 들쑤셔 필요 없는 건 버리고, 먹을 건 먹고. 당장 필요하지 않은 건 쟁여두려 하지 않게 되었다. 냉동실을 휘젓느라 내 손에는 오래된 냄새가 배었지만, 물로 씻으면 그만이었다.
'고장 나는 것도 나쁜 일만은 아니네.'
그러다 문득, 나도 그런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최근 몇 년 동안 내 마음도 고장이 나버렸다고 생각했다. 우울과 감정의 파도 속에서 무엇이 진짜 내 기분인지도 알 수 없던. 하루빨리 원래대로 고쳐지기만을 바랐지만, 결국 그 시간 덕분에 나를 들여다보며 정리하고 필요한 것만 남길 수 있었던 건 아니었을지. 그동안 흘렸던 수많은 눈물은 마음 깊숙한 곳의 쾌쾌한 냄새를 씻어내려는 시도였을지도.
"이거 잘 되는 거 같은데?"
꽝꽝 얼려진 쭈쭈바를 들고 남편이 말했다.
새 냉장고를 주문해 놓고 배송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다시 냉동 기능이 돌아온 것이다. 남편이 전원을 껐다 켜보자고 했고, 코드를 찾아 뽑기 어려워 두꺼비집을 아예 내렸다가 1분 정도 후 올렸는데, 이게 된다고? 생각해 보니 14년 동안 전원이 완전히 꺼진 일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잠시 전환이 필요했을 뿐이었던 걸까? 단 1분의 휴식이 그에겐 간절했던 것일까?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반가웠다. 신형 냉장고를 환영할 날짜를 조금 미루기로 했다. 언젠가는 완전히 고장이 나버릴지 모르지만 그때까지는 좀 더 해보기로.
이제는 조금 덜 쟁여두고, 더 자주 들여다보기로 한다. 내 마음도 냉장고도. 그동안 고생 많았다. 토닥토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