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다행히도, 고장 덕분에

by 뤼더가든

시작은 냉장고였다.

'요즘 왜 이렇게 자꾸 고장이 나는 거야?'

짜증과 답답함이 가라앉자 그제야 작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인생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고장은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그럴 때마다 당혹스럽고 어찌할 바를 모르지만, 돌이켜보면, 크고 작은 문제들 속에서 나름의 선택과 대응을 하며 하나씩 해결해 왔다. 그리고 묘하게 그런 과정은 조금 거창할지 모르지만 인생의 어떤 점과 닮아있다.


영화 <범죄도시2>를 재밌게 봤다. 전일만 반장이 고장 난 총을 바닥에 던지며 허탈해하는 것은 유명한 장면 중 하나다. 소품팀에서 준비한 권총이 정말로 고장이 났고, 카메라가 예상보다 길게 촬영을 이어나가자 즉흥적으로 최귀화 배우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한다. 총이 고장 나지 않았다면 그 장면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배우의 센스가 발휘될 기회가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인생에서 어떤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아 다행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생각했었다. 제목에 끌려 무작정 서점에서 데려왔던 류시화 님의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를 읽은 후였다. 이 유명한 시인도 원망 내지 한탄을 할 수밖에 없는 게 결국 인생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의 메시지는 자신의 한계 앞에서 느낀 좌절이 아니었다. 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지만, 그래서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폭넓게 살아갈 수 있음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안도와 감사였다.


별 것 아닌 생각일지라도 가볍게 읽으며 공감할 수 있기를, 단 한 사람에게라도 작은 위로가 되었기를 바란다. 짧은 시간이지만 연재 약속일을 한 번도 어김없이 지킨 것도 뿌듯하다.


이제 연재를 마무리한다. 고장 덕분에 브런치북을 완성했다. 고장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일어나겠지만 그래도 그 안에서 내가 깨닫는 것들은 분명한 자산이 될 것이다.

이 글을 통해 연결된 모든 이들에게 감사드린다.

이전 11화싱크대: 배수구 막힘과 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