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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애할 권리 Jul 25. 2016

연극 <아버지>

박근형의 초상화 같은 연극


파자마를 입은 아버지가 있다. 집안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시계를 누가 훔쳐갔다고 말한다. 딸은 어딘가 잃어버린 거라며 잘 찾아보라 한다. 아버지는 수시로 같은 질문을 반복하고 같은 대답을 반복한다. 왠지 불안하고 산만해 보이는 아버지의 행동에 딸은 체념한 듯 익숙하게 그를 달랜다. 아버지는 치매다.


ⓒ 국립극단


올여름, 국립극단이 독특한 기획을 시도했다. 프랑스에서 주목받고 있는 30대 젊은 희곡작가 '플로리앙 젤레 르'의 대표작 <아버지>와 <어머니>를 동시에 공연하는 것. 이 두 작품은 '치매'라는 공통된 접점을 가지고 노년에 접어든 아버지와 어머니를 통해 인간의 고독과 불안, 존재적 의미와 소멸에 대해 그린다. 서로 인물도 배경도 완전히 다른 작품이지만, 인물의 의식에 서사를 맡긴 전개나 주제에 있어서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이번 국립극단의 무대화를 봤을 때, <아버지> 쪽이 좀 더 작가가 담고자 한 극적 지점에 더 잘 맞는 듯했다. <아버지>는 시니컬하고 관찰자적인 태도로 인물과 현상을 바라볼 수 있는 여지를 둔 반면,  <어머니>는 좀 더 감정적으로 드라마적 연결 고리를 이어가려는 느낌이었다. 연출과 연기하는 배우의 성향이 만들어 낸 차이일 수 있겠지만, 어쨌든 이 글에서 <어머니>에 대한 내용은 제외하기로 한다.)



ⓒ 국립극단

초상화 같은 작품

이 연극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아버지' 그 자체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 그의 머릿속이 무대의 배경이자 등장하는 인물도 그가 떠올리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아버지를 제외한 다른 인물은 정확한 실재가 없는 모습으로 (계속 모습을 바꾸며) 등장한다. 또한 아버지가 느끼는 감정, 바라보는 시각, 인지하는 해석에 따라 들락날락 장면이 배치되어 있다. 90분 동안 시간과 공간은 수시로 바뀐다. 장면은 튀고, 미묘하게 변형된 모습으로 반복된다. 이 연극은 완성된 이야기로서의 서사를 보여주지 않는다.



연극 <아버지>는 치매 환자에게서 나타나는 물리적, 심리적 증상을 아버지의 시선으로 전개한다. (결국 그의 정신적 세계가 그려낸 모습. 즉, 1인칭 주인공 시점을 의식의 흐름으로) 관객은 치매에 걸린 환자가 느끼는 혼란을 직접 느낄 수 있다. 뒤틀린 서사와 반복되는 장면. 심지어 한 인물이 여러 모습으로 등장한다. 아버지가 혼란스러워하는 상황이 관객에게도 똑같이 찾아가는 것이다. 유일하게 일관된 모습을 가진 건 큰 딸인데(그마저도 한두 번 변형되지만), 이는 아마 아버지의 머릿속에 그리고 마음속에 가장 굳건히 자리하고 있는 인물이라 그런 듯하다.


치매환자가 겪는 인지능력의 상실, 끊임없는 시공간의 혼선과 희미해져 가는 기억을 관객도 연극을 보면서 직접 경험한다. 그러는 동안 치매가 주는 상황을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이 극은 이렇다 저렇다 하는 감정적인 호소를 하는 대신, 관객 스스로 느끼고 판단하며 메시지를 완성할 수 있게 적극적 관람을 유도한다. 자발적인 논리를 이끌어내는 작품이다. 마치 그림을 보고 저마다의 해석으로 작품을 판단하 듯.


아버지, 박근형

이 작품은 작가가 평소에 좋아하는 노배우를 염두에 두고 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연극은 아버지를 맡은 배우의 연기가 극과 관객 모두의 감정을 컨트롤한다. 앞서 말했듯, 정석적인 드라마 구성이 아니기 때문에 감정을 따라갈 수 있는 인물이나 이야기가 없다. 무대에 펼쳐진 인물들의 말과 행동은 모두 아버지의 해석을 거친 모습이다. 즉, 무대는 아버지의 머릿 속이고 관객은 아버지의 의식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아주 가끔 아버지가 등장하지 않는 몇 개의 씬을 통해 상황에 대한 힌트만 줄 뿐)


아버지의 감정 기복은 후반부에 갈수록 점차 빠르고 극적으로 변한다. 이때부터 씬은 짧아지고 암전도 잦아진다. (이런 식으로 한씬 한씬이 아버지의 머릿속 상황 임을 알려준다) 아버지는 갑자기 기분이 좋았다가, 갑자기 화를 내고, 갑자기 서글퍼진다. 상대와 살갑게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누구인지 몰라 당황해한다. 박근형은 그런 아버지의 변화를 섬세하게 그려냈다. 그는 장면마다 '앙드레(아버지)'가 가지는 모든 감정을 파악해 흡수해뒀다가 그때그때마다 명확하게 꺼내보였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의 모습은 혼란스러울지라도, 그 모습을 표현하는 박근형의 연기는 굉장히 날카롭고 정확했다. 그렇게 관객은 아버지의 감정을 읽을 수 있다. 그의 말투, 그의 눈빛, 그의 웃음, 그리고 그의 눈물에서...


고로 지금 명동예술극장 무대 위에 오른 연극 <아버지>는 배우 박근형의 초상화이기도 하다.


ⓒ 국립극단

사라져가는 것들

희곡에 무대를 점점 비워가라는 지문이 명시되어 있다고 한다. 무대가 아버지의 심리적 공간의 메타포임을 암시한다. 아버지는 끊임없이 자신의 공간에 대해 묻는다. 자기 집인지 확인하고, 타인의 침입을 경계한다. 사실 그가 말하는 집은 물리적인 공간이라기보다 자아로서의 공간... 즉 존재를 뜻할지도 모른다. 무대 역시 결국 아버지 그 자체이고, 점차 그 영역이 사라져가는 과정을 통해 자아 상실을 보여준다. 공연에서도 장면이 변할 때마다 가구가 하나둘씩 사라지고, 마지막에는 텅 빈 공간 속에 아버지만 남겨진다.


여전히 존재하는 것

아버지는 계속해서 시계를 찾고 몇 시인지 묻는다. 정말로 시간이 궁금한 게 아니다. 사라져가는 의식 속에 그래도 아직은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이다. 박정희 연출은 아버지가 점진적으로 '퇴행'하는 과정을 담았다. 그 퇴행의 종착점에 다다른 순간, 모든 것이 백지화된 것이다. 마치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나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끊임없이 질문하던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자기가 누구인지 묻는다. 자신의 나뭇잎들이 모두 떨어지고, 잔가지마저 사라져버린 순간. 아버지는 나무로써 제 역할을 할 수 없는 죽은 기둥이 된다.



아버지가 등장하지 않고 딸이 그의 남편과 대화할 때, 치매 노인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으로 이런 말을 한다. 'Being happy, Being Together, Being Alive'.  아버지가 끝까지 지키고 싶었던 것, 아니... 인간이 살면서 끝까지 놓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 세 가지가 아닐까. 죽은 기둥이 되어버렸지만, 그 기둥도 뿌리를 내리고 살면서 그곳을 찾아 앉는 이와 함께 행복하고 싶은 꿈을 꾼다. 비록 나무로써 기능은 못하지만... 나무였을 때의 푸르름을 기억하지는 못할지라도...



그동안 치매 노인을 다룬 작품이 적지는 않았다. 대개 미약한 사회적 제도와 허술한 복지, 주변인들의 말 못 할 감정, 그런 힘든 현실을 그를 둘러싼 상황을 중심으로 전개한다. 즉, 치매 환자를 '바라보는 자들의 시선'으로 그려낸 것이 많았다. 그렇다 보니 아무리 많은 사건을 입히고, 많은 묘사를 더해도 관객이 치매 노인의 감정에 닿기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그의 배우자, 그의 자식, 그의 동료가 되어 측은하게 그를 동정하고 그들을 연민하는 선에서 그쳤다. 연극 <아버지>는 그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굉장한 반전이다. 역지사지,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신발을 직접 신어봐야 알 수 있다. 이 연극은 그렇게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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