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생명력은 무엇일까?
얼마 전, SNS에 어느 승객이 한 버스 기사에 대해 비난한 글이 올라왔습니다. 한 아이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만원 버스에 탔는데, 버스 안이 혼란한 탓에 내려야 할 정류소보다 먼저 아이만 내리게 된 거죠. 뒤늦게 알아차린 엄마가 기사에게 세워달라고 했지만, 기사가 이를 무시하고 운행했다는 거죠. 어린아이가 걱정되는 엄마는 울부짖었고, 승객들도 이에 대해 강하게 어필했지만 기사는 듣는 척도 안 했다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글은 일파만파 퍼져갔고, 모두 버스 기사를 비난했습니다. 사람들은 아이 엄마를 동정했고, 자신의 일이 아니었지만 모두 한 목소리로 버스기사의 태도에 대해 분노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SNS에 올라왔던 상황과 달랐습니다. 감정적인 억측이 있었고, 버스 기사가 과도한 비난을 받았다는 반발이 나왔습니다.
왜 분노를 한 걸까요? 당시 버스기사를 향한 비난에는 자신이 이전에 겪었던 난폭한 버스 기사를 만났던 경험들도 올라왔습니다. 다 내리지도 않았는데 문을 닫고, 급출발하고, 승객에게 집중하지 않고 등등. 그때의 억울한 상황도 그 버스기사 탓인냥 모두 쏟아내듯 분노했죠. 아이들과 함께 하는 부모의 태도에 대한 비판도 따랐고요. 또 다른 분노도 생각납니다. 광화문 일대에 모여든 촛불들, 그리고 반대편에 대치한 태극기들. 연극 <옥상 밭 고추는 왜>는 바로 이런 분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분노의 발화점에서 시작해 전부 연소되며 끝나죠.
사실 거의 사전 정보 없이 보았습니다. 장우재 작가와 김광보 연출의 조합만으로도 일단 연극을 봐야 할 이유는 분명했으니까요. 김광보 연출은 제가 전작주의 관람을 고수하는 연출입니다. 장우재 작가도 <여기가 집이다> 이후 쭉 작품을 챙겨보고 있는데, <햇빛 샤워> <환도열차> <여기가 집이다><미국 아버지>를 보았고, 언급한 순서대로 좋아합니다. 이야기꾼이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그의 연극은 (대체로 연출까지 맡았죠) 일상과 가까운 말로 인물과 상황을 사실감 있게 그려내기 때문이죠. 그림자에 가려진 부분을 들춰내듯, 때로는 환부에 소독약을 바르듯, 현실적이고 섬세하게 세공된 주인공을 데리고 롤러코스터 같은 드라마를 태웁니다. 사건이 촘촘하게 진행되다가 극적인 순간에 달하고, 대화 중심의 전개가 빠르게 펼쳐지기 때문에 작품을 보고 있으면 영화나 드라마로도 그림이 그려지죠. 김광보 연출은 텍스트에 집중하는 미니멀리즘 연출가입니다. 무대에서 트릭을 쓰지 않고, 텍스트를 방해하는 난해하거나 과장되는 요소들은 자체 검열하듯 다지고 다듬는 연출이기도 합니다. 어찌 보면 두 사람의 연출적인 성향은 서로 다르면 다르다고 할 수 있어요. (개인적으로 장우재 작가가 연출한 작품은 영화적이었습니다. 장소를 이동하거나 장막을 연결하는 부분에서도 그런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조합의 결과가 궁금할 수밖에 없었죠.
배경은 다세대가 살고 있는 작고 낡은 빌라. 이곳의 옥상은 주민들이 공용으로 쓰고 있지요. 304호에 사는 광자(문경희)는 옥상에 텃밭을 만들어 고추를 키웁니다. 매일 손으로 진딧물을 잡고, 고추를 어르고 만지는 게 광자의 일상입니다. 201호에 사는 현자(고수희)는 광자가 키운 고추를 동의 없이 한 무더기씩 따갑니다. 선심 쓰듯 동네 사람들을 나눠줄 정도로 많이 따 가죠. 이웃사람들도 이러한 정황을 알지만, 별말은 못 하는 상황입니다. 그냥 옥상 밭 고추일 뿐이니까요. 어느 날 광자는 옥상에 올라갔다가 자신의 고추를 따는 현자를 봅니다. 그렇게 많이 따면 어떡하냐고 제제하자, 현자는 자기가 흙을 다 대준 것이니 당연한 거라고 반박합니다. 그리고 광자에 대해 인신공격을 하지요. 충격을 받은 광자는 쓰러지고 병원에 갑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301호에 사는 현태(이창훈)는 현자를 비난하며 광자에게 사과하라고 말합니다. 현자가 들은 척도 안 하자, 303호 동교(유성주)가 데려온 무리를 모아 빌라 앞에서 시위까지 하죠. 고추밭에서 벌어진 싸움은 일파만파 커집니다. 연극은 이렇게 사과를 받아내려는 현태와 사과하지 않으려는 현자의 대립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여기에 빌라에 살고 있는 여러 인물들의 몇 가지 상황이 잔가지처럼 얽혀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한바탕 소동극입니다. 이전의 장우재 작가의 작품과는 다소 결이 달라요. 이전의 작품이 요소요소들을 모아 잘게 붓칠 한 풍경화였다면, 이번 작품은 콜라주 같았어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보였죠. 게다가 등장인물은 굉장히 많은데, 이들은 저마다 개별적인 존재로 그려져요. 사건의 원인과 결과보다는, 사건에 대해 반응하고 움직이는 다양한 군상을 보여주는 데 더 중점을 둔 것 같습니다. 일단 인물의 전사가 없어요. 싸우고 있는 현재만 보여줄 뿐입니다. 동교나 현자나 현태나, 주인공들은 갈등을 내제 한 상태로 출발합니다. 이전에 일어났을 법한 일은 일상적으로 주고 받는 말에서 추측할 뿐이죠.
연극을 보며 궁금증이 들었던 점은, 왜 현태가 저렇게 분노하며 현자와 싸우냐는 것입니다. 대체 현태와 광자가 어떤 사이길래? 두 사람의 연대에 대한 묘사나 공통점은 어디에도 그려지지 않거든요. 아마도 현태의 분노는, 현자에 대한 분노라기보다는 자기 안에 쌓인 울분의 표출일 것입니다.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울분, 그런 상황을 방치하고 방관한 주변에 대한 배신감이 광자의 일로 터진 셈이죠. 광자에게 소중했던, 광자에게 전부였던 고추를 빼앗아 간 상황에 뜻대로 되지 않는 자신의 현실을 감정 이입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현태의 마음을 잘 아는 듯, 현태의 엄마는 괜한 데에 화풀이하지 말라고 혼을 내죠. 하지만 현태는 끝을 보겠다는 심정으로 이를 갑니다. 현태는 현자에게 '살인행위'를 한 것과 다름이 없다는 말을 내뱉죠. 설령 광자에게 사과를 받아낸다고 한 들, 현태한테 득이 될 것도 없는데 말이죠. 나중에 가면 분노는 복수로 이어집니다. 근데 복수의 방법이 후지죠. (그 방법은 연극을 보고 확인하시길...) 여기서 현태라는 인물을 지탱하고 있던 정의(혹은 윤리)가 무너집니다. 관객의 마음도 현태와 멀어지는 지점이 아닐까 싶네요. 피해자는 침묵하고 있는 상황에서, 현자가 무릎 꿇는 것을 보고야 말겠다는 건, 일종의 집착이죠. 막말하면 징징대는 루저가 아닌가 싶네요. 자기가 주도권을 잡고 집중할 것이 필요했고, 그냥 뭐가 됐든 간에 목소리 높여 싸울 명목이 필요했던 거죠. 이 싸움에 동참한 동교 역시 마찬가집니다. 아내와의 불화에 모든 것을 체념하고, 심지어 당장 나가 살 집도 없는 자신의 일에도 심드렁한 동교가 여기에는 적극 나서니 말입니다. 참 이상한 싸움이죠.
+ 덧) 개인적으로 현태에게 일말의 변명을 할 수 있는 탈출구를 만들어 주지 않았던 것이 아쉽습니다. 사회가 그를 충동적인 악마로 만들었다는 그런 설정이 아니길 바랐는데... 사실, 현태를 연기한 이창훈 배우는 찌질하고 억울한 연기에 출색합니다. 특히 그 찌질하고 억울한 감정이 발생한 시발점에서 코믹한 순간이 나오는데, 그런 포인트를 이창훈 배우가 굉장히 잘 살려내거든요. 이번 작품에서 그 장기를 제대로 못 본 것이 좀 아쉽네요....
싸움의 동기가 된 현자는 다들 속물이라고 못 박아 정의하지만, 사실 가장 입체감이 있는 캐릭터입니다. 현자를 둘러싼 모든 요소와 행동은 그녀가 외로운 사람이란 걸 알게 하거든요. 그녀는 먹을 것을 노인과 이웃에게 나누어주고, 늘 품고 사는 강아지에게 모든 사랑을 쏟아요. 쓴소리를 달고 살고, 돈을 밝히지만, 그녀가 살아온 배경을 보면 그게 그녀의 생존법일 거란 걸 알게됩니다. (이런 고집스러운 모습이 한편으로는 보수층을 대변하는 것 같죠). 좁은 시야에서 자신의 가치관을 왜곡되게 정의하고, 이타적인 감정과 공동체에 서툴고요. 물론 현자의 양가적인 감정을 잘 담아낸 고수희 배우의 노련한 연기는 캐릭터에 큰 설득력을 불어넣습니다.
반면 지영의 캐릭터는 다소 전형적이고 단순한 감이 있습니다. 지영은 전임 교수가 되기 위해 필사적인데, 그녀가 말하는 건 그저 자신의 상황에 대해 불평만 하는 것 같거든요. 남자 교수들에게 제대로 의견 피력도 못하고, 행여나 꼬투리 잡힐 까 봐 SNS도 못한다, 이런 불만들이에요. 이건 사실 본인의 의지로 깨뜨릴 수 있는 벽이죠. 자신이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받는다는 것이 전제라면, 젠더의 유리벽은 좀 더 물리적/제도적 한계인 문제로 접근했어야 설득력 있다고 봅니다. 행여나 이게 의도한 설정이라면, 지영이라는 인물은 매력이 없는 게 되죠. 자존감이 낮고, 상황 탓만 하는 투정으로 보이니까요. 현태의 엄마인 재란(백지원)의 캐릭터도 설정에 비해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가 부족했습니다. (그냥 의상에 모든 걸 다 담아버리다니요...ㅠ) 결국 이런 부분들은 대본 상의 한계로 보였습니다. <햇빛 샤워>에서 '광자'를 섬세하게 그렸던 작가의 관찰력과 묘사처럼, 이번 작품에도 좀 더 구석구석 닿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죠.
이 작품의 이야기는 전반적으로 빌라 안팎에서 전개됩니다. 하지만 분리된 공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거나, 짧은 호흡으로 장면이 삽입된 부분도 있고, 주요 장소에서 멀리 가지는 않지만 새로운 배경도 심심찮게 등장합니다. 연출적으로 이러한 장면의 변화를 매끄럽고 튀지 않게 그려낸 덕분에 극의 에너지는 흩어지지 않고 잘 응집됩니다. 무대를 종횡으로 사용하지만, 관객의 시선을 필요한 곳에 머물게 하며 드라마에 집중할 수 있게 돕습니다. 긴장을 풀고 숨을 고를 수 있는 여유도 만들어주고요. 개인적으로 이게 김광보 연출의 장기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연극에서 유성주 배우의 연기가 참 좋았습니다. 원래 훌륭한 배우고, 다른 연극에서도 눈에 띄는 연기력을 펼쳤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다른 측면으로 인상적이었어요. 대사는 거의 없었지만 가끔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살아있는 말로 들렸거든요. 인물이 오래 품었을 듯한 심중이 느껴졌기 때문이죠. 그가 듣고 있거나 바라보고 있을 때의 반응과 표정도 좋았어요. 숨죽일 때와 분출할 지점을 적확하게 조절하는, 보이지 않는 존재감이라고 해야 할까요? 참 좋은 배우임을 다시금 느꼈습니다.
연극은 결국 분노와 복수의 게임이 종결되며 끝납니다. 현태의 시점으로 따지면,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죠. 하지만 승자는 기쁘지 않습니다. 아니, 승자는 없습니다. 모든 게 끝났지만 후련하지도 않습니다. 너무 쉽게, 너무 자주 화를 내고 있는 현대인의 단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떡밥을 던지면 득달같이 달려들고, 그걸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는 피라미떼처럼요. 그리고 한탕 끝나고 허무해진 감정은, 또 다른 먹이를 찾게 합니다. 대체 누구에게 던지는 분노이고, 누구를 위한 싸움이고, 왜 그렇게 치열한지. 그러면서 정작 옥상 밭 고추는 왜 아무도 돌보지 않는 거죠? 극장을 나오며 그런 질문들이 맴돌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