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는 평범한 하루를 특별한 여행처럼 의미를 담아 쓴 연작 형식의 글입니다. 제목은 내용 중 일부에 관한 이야기니 참고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이름이나 세세한 사항은 실제 인물과 다릅니다.
삶의 여유라고 하기엔
마음에 들지 않는
일상이 된 아침 풍경.
아침에 뭉그적대거나 침대에서 누운 채로 뭔가를 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자는 것도 아니고 깬 상태도 아닌 반쯤 몽롱한 상태이다. 첫 알람에서 다음 알람까지는 쪽잠을 자는 상태처럼 있고 그다음 알람까지는 휴대폰을 만지작댄다. 영어 공부를 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걸그룹이나 영화 소개 유튜브 채널을 몽롱한 상태로 본다. 중환자실에 누워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저 눈만 깜빡이는 사람처럼 그렇게 시선을 휴대폰에만 둔다. 한두 개의 채널을 더 감상하고 나서 간신히 몸을 일으킨다. 삶의 여유라고 하기엔 마음에 들지 않는 일상이 된 아침 풍경이다. 침대에서 나와 좁은 방 위에 섰을 때, 바닥 한쪽에는 어제 입고 벗어둔 옷가지들이 즐비하다. 그리고 반대쪽에는 버려야 할 쓰레기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문밖으로 나가 공용 거실에 둔 빨래 건조대에서 수건과 팬티만 걷어 욕실로 향한다. 샤워기로부터 떨어지는 물줄기들을 온몸으로 맞고서야 정신이 든다. 샤워가 끝나고 아침을 먹을까 하다가 그냥 계란 2개와 두유, 그리고 견과류 조금으로 때우고 얼른 길을 나선다. 정류장에 버스가 서자 많은 학생이 분주하게 내린다. 길 주변은 아직 아침의 분위기가 남아 있다. 아침 기상 모임을 시작한 지 절반 정도 지나니 슬슬 초심의 약발이 딸리고 있음을 느낀다. 아침 운동모임을 시작할까 하다가도 모집까지 신경 써야 하는 거추장스러움과 귀찮음이 며칠째 그저 생각만 하게 한다. 운동 인원이 8명 정도 보장만 된다고 하면, 모임을 추진해볼 의사가 있다. 다만, 몇 번의 모집 경험 후 아침 7시 운동모임에 8명을 모집하는 게 생각보다 쉬운 일도 아니고 꾸준함을 요구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부터는 그런 번잡스러운 일을 하느니 그런 관심을 자신에게 더 두자고 생각한다. 차라리 영어 모임까지 없애고 아침 시간을 적극적으로 글을 쓰는 데 활용할까? 오후 시간을 일기를 쓰는데 대부분 할애를 하자 상대적으로 책을 볼 시간이 부족해졌다. 내 삶의 가장 제일의 목적인 글쓰기를 하는 것이므로 싫지는 않으나 지금으로선 초기의 여러 목표 중 일부는 시간이 많지 않아 포기해야 알지도 모르겠다. 사실 영어 회화 공부는 아르바이트 가는 길 위에서 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현재로서 영어 모임은 참여자들을 관리함으로써 자신에게도 계속 학습 의지를 북돋기 위함과 검소한 삶에 조금이나마 경제적인 도움을 받고자 위함이지, 내 실력의 향상을 위함은 아니다. 오히려 영어 실력을 향상하려면 그 시간에 지금 보는 단어장과 유튜브를 통한 영어 듣기를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게 낫다. 그래서 차라리 아침부터 오전까지 일기에 집중하고 오후에는 책을 보거나 혹은 책을 집필하기 위해 좀 더 신경을 쓰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혹은 돈을 생각한다면 아예 저녁 시간대를 비워두고 그 시간에 관련 과외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혹은 차라리 아침 7시, 스타벅스가 오픈하는 시간부터 와서 무언가를 하는 것은 어떨까? 오전 7시부터 10시까지 와서 일기를 쓰고 가는 것이다. 일종의 의식 행위로써 제일 먼저 스타벅스에 가서 3시간 동안 글을 쓰고 10시에 영어 모임을 시작한 뒤 점심을 먹고 오후의 일과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 자금 사정에 아침과 오후의 연이은 커피 구매는 부담이 되지 않을까?
내 시간을
비교적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생활할 수 있는 돈이 넉넉하게 있다면, 해보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다. 많이도 필요 없다. 그저 내 생활의 최소한을 유지하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원하는 책을 구매하고 글을 쓸 수 있기만 하면 된다. 남에게 빚을 지지 않아도 되며 때로는 가볍게 술 한잔 함께 기울일 정도의 금액이면 된다. 물론 그렇게 지금도 할 수는 있다. 다만, 그렇게 할 경우 하는 것들 일부를 포기하거나 타협해야만 한다. 나도 안다. 이런 삶을 계속할 수는 없다는 것을. 그래서 내 삶의 일부를 할애하여 그 삶이 무너지지 않도록 일을 하는 것 아니겠는가? 지금 난 최소한의 비용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내 부모를 비롯한 누군가는 내 삶을 걱정하는 것도 안다. 나도 안다. 이 연극 같은 삶이 언젠가는 끝날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삶이 머지않았다는 사실을. 그런데도 이 삶을 놓고 싶지 않은 까닭은 지금의 삶이 때로는 공허하면서도 행복하기 때문이다. 이 공허는 어쩔 수 없는 공허이며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번다고 해도 존재할 공허임을 알고 있다. 제시간에 출근하고 퇴근을 해봤지만, 마찬가지로 이 공허는 존재했다. 이 녀석은 아마 내가 마음이 약해질 때 언제든 고개를 쳐들 공허일 것이다. 일할 때와 비교하면 단지 돈이 없다 뿐이지 참으로 행복하다. 이렇게 글을 쓴다는 것, 책을 본다는 것, 영어를 한다는 것, 운동한다는 것, 내 시간을 비교적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어쩌면 이 일에서 조금 더 신경을 쓰면 넉넉하게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이룬 수많은 것들을 보면 아직은 모든 것이 누군가에게 보이기 부끄럽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랑스럽기도 하다. 나를 돋보이게 하는 것들은 단지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니라 꾸준한 시도와 노력 속에서 된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내 궁극적인 목표에 못 미칠 뿐이지 무가치한 것은 하나도 없다. 무언가를 이뤄 나가는 것이 너무나 즐겁고 내 진심과 노하우를 나누는 게 너무나 기쁘다. 나를 기를 수 있는 것과 그것을 나눌 수 있는 것이 진실로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내가 스타트업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도 그것이 나를 기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해서였고 거부한 까닭은 그 일이 아닌 다른 일을 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일을 하며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다. 특히 내 이름으로 쓰는 글은 진심이 담기길 바란다.
작가가 되자고 마음먹었던 순간의
다짐과 나 자신에게 했던 조언을
10년 정도가 지난 지금
또다시 하고 있었다.
영어 모임은 참여자가 없어서 다음 모임들을 위한 작업을 했다. 학습에 필요한 사전 작업에도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린다. 다만, 단순 타이핑 작업이 많아서 보통은 보고 싶었던 다른 방송을 보면서 작업을 한다. 지루함을 이기는 방법이며 동시에 즐거움을 꾀할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휴대폰으로는 유튜브를 켜놓고 노트북으로 자료 정리 작업을 했다. 일이 끝나고 집에 들어가 다이어트식으로 닭가슴살을 비롯하여 견과류와 과일, 채소 및 두유를 넣고 도깨비방망이로 간 뒤에 숟가락으로 천천히 퍼먹었다. 예전에는 그저 한입에 들이켰는데, 그렇게 하다 보니 한꺼번에 들어가서 그런지 목이 막히는 기분과 가슴이 답답해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씹어 먹듯 천천히 먹고 스타벅스로 향했다. 전날과 같이 레드아이를 텀블러에 주문하고 어제와 같은 자리에 앉아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일상을 기록하고 분량을 점검해보니 공백 포함 9천 자가 넘었다. 200자 원고지로 45매가 넘는 분량이었다. 휴대폰만으로 이렇게 쓸 수 있다는 게 자못 즐거워 상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제 긴 글을 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 같았다.
이것을 출판할 수도 있을까? 제목은 무엇으로 할까? 하루의 삶을 세세하게 기록한 것이니 '나의 투쟁?' 단조로운 삶에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는 것이니 투쟁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등장하는 실제 인물들의 이름은 바꾸는 게 나을까? 그저 일기와 같은 글인데, 이 글이 정녕, 가치가 있을까? 문학적 가치에 대하여 의심한다면 차라리 지금이라도 미뤄두고 있던 소설을 쓰는 게 낫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면서 다시금 아침 시간을 활용하는 방법에 대한 생각이 났다. 이렇게만 글을 써 내려갈 수 있다면 그것이 어떤 소설이 되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만 하면, 금방 여러 권의 소설을 완성할 것이고 그것이 내 삶의 여유를 안겨줄 것만 같았다. 그렇게만 되면 소설가로서 여러 권의 책을 쓰면서 지금의 삶을 유지하고 그러면서 학생들과 모임을 함께하며 내가 가진 지식과 노하우를 기존처럼 알려줄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누구에게나 인사를 건네면서 '작가'라는 타이틀을 당당히 말할 수 있겠지. 소설가 오르한 파묵이나 하루키처럼 침전하는 시기를 거쳐 날아오를 수 있게 되겠지. 그러려면 써야 한다. 지금처럼 써야 한다. 누군가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하기 이전에 끊임없이 쓰고 두드려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 이 알의 두꺼운 막을 스스로 깨고 나와서 비로소 성장할 수 있다. 이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작가가 되자고 마음먹었던 순간의 다짐과 나 자신에게 했던 조언을 10년 정도가 지난 지금 또다시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분명 달랐다. 마치 헤세의 '싯다르타'에서 나오는 젊은 시절의 고타마와 나이가 든 고타마는 그 의지와 현상은 같을지언정 경험이 달랐다. 비슷한 조언이라도 어린 아이가 하는 것과 원숙한 노인이 하는 것의 무게감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처럼 분명히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꿈을 꾸고 있음에도 달랐다. 돌고 돌고 또 돌아서 같은 출발점 위에 다시 섰건만, 지금의 앎은 그때의 앎과 다르다. 저 바다로 흐르는 넓은 강은 깊은 강이 되었다. 강 위에서 보면 그전과 다를 바 없이 유유히 흐르는 강일지라도 이제는 더 많은 것들을 받아들이고 홍수조차 견디어 낼 수 있는 강이 되었다. 바라건대, 갠지스의 깊은 강처럼 그런 강이 되고 싶다.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 고통과 쾌락마저도 강물 위에 띄울 수 있는 그러한 강이 되고 싶다. 그런 강으로서 나만의 글을 쓰고 싶다.
'정의'는 법률가에게
서명의 거부를 명한다.
그러나 '사랑'은
귀를 막고 모른 체할 수 없게 한다.
글을 쓰고 남는 시간에는 전날과 같이 ‘부분과 전체’를 보았다. 마찬가지로 ‘데카메론’을 가져왔지만, 시간상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책에서 하이젠베르크는 히틀러 치하에 있으면서 독일에 계속 남아 있어야 할지 혹은 다른 학자들처럼 망명해야 할지에 관하여 고민했다. 독일에 남아 있을 젊은이들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옛날의 올바른 가치척도를 조금이라도 심어주려면 남아 있는 것이 낫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히틀러의 요구를 들어줘야 할 것이다. 망명을 시도할 경우 나치에 협조했다는 오명은 남지 않겠지만, 독일의 젊은이들을 버리고 혼자 떠났다는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다.
책에서 그는 이 두 가지 현실적인 선택을 한 가지 사고 실험에 비유한다. 어느 독재 정부가 자신의 정적 10명을 투옥하고 그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한 사람을 죽이려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 사형의 정당성을 위하여 한 명의 국제적으로 유명한 법률가인, 정적 한 사람에게 한 가지 타협안을 제시한다. 그가 사형집행의 정당성을 보증하는 성명을 하면 9명을 살려주고 아니면 10명 모두를 죽이겠다고 한 것이다. 이 행위를 거부하면 모두가 반드시 죽고, 허락할 경우 9명이 살겠지만, 신념을 버리고 서명할 경우 그 정치적 귀결은 9명보다 더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 것이었다. 여기에서 '정의'는 법률가에게 서명의 거부를 명한다. 그러나 '사랑'은 귀를 막고 모른 체할 수 없게 한다.
이는 얼마 전에 보았던 엔도 슈사쿠의 ‘침묵’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그 책에서 한 신부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신념을 버리고 성화에 발을 올린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자신의 종교적 신념은 무너져 버렸고 그는 그를 괴롭히던 권력자들에게 부역했으며 그를 따르던 신도들의 신념은 진흙 속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이 소설에 다루는 것은 종교적 신념이기는 하나, 결국 사랑을 위해서 자신의 신념과 반하는 결단을 내린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리고 하이젠베르크 역시 전후 독일과 젊은이들을 위하여 남는 것을 택한다. 이 모든 이야기가 그를 위한 조잡한 변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밖에서 조국의 전쟁을 막기 위한 노력을 하고 전쟁 이후 돌아와서 전후 독일을 위해 노력하면 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누군가가 역경에서 목숨을 구하려고 도망쳤다가 돌아왔을 때, 어느 젊은이가 그를 그토록 믿고 의지할 수 있을까? 물론 누구도 나이 든 이론 물리학자의 그런 망명을 비난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마음에는 자신만 비겁하게 피했다는 남아있는 자들, 그래서 모진 고초와 죽음을 피할 수 없던 자들에 대한 마음의 짐이 끊임없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앞으로의 무너진 사회의 재건을 위하여 남는 것을 선택했으며 그곳에서 그가 해야 할 일을 택했던 것이다. 그는 무고하고 핍박을 당하던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망명의 정당성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양심적 독일인으로서(적어도 그가 그렇다는 가정에서) 떠나건, 남아 있건 어느 위치에 서 있건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쿠오 바디스, 도미네….
나는 어디로 가야 한단 말입니까?
그는 전쟁의 상황에 대하여 그리고 그 생각으로 독일 사회와 민족이 엉망이 되는 상황을 전염병적 상황으로 비유한다. 그리고 만약 자기 집에서 가족 한 사람이 전염병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그 전염병의 감염을 더 확대하지 않으려면 집을 떠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희망은 없을지라도 그 병자를 끝까지 간호하는 것이 옳은가를 생각한다. 그리고 혁명과 질병을 견주는 자신의 행태에 대해 스스로 꾸짖는다.
알베르 까뮈의 페스트는 바로 이러한 전염병에서 사람들의 선택과 그곳에 남아 끝까지 간호하는 상황을 보여준다. 전염병이라는 측면에서 생각이 미친 것이긴 하나, 그 질병이 한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사건, 혁명, 전쟁 같은 것이라면, 이 책은 그 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한다. 사람들은 전쟁의 광기라는 전염병 속에서 그것이 닿지 않는 곳으로 서둘러 도망치거나 더 확산이 없도록 자기 일을 할 뿐이다.
엔도 슈샤쿠의 책에 나오는 자신이 성화를 밟지 않아서 다른 사람이 고문을 당하고 죽게 되는 상황이나 지방관에게 인사를 하지 않아 아들의 생명을 극단적인 상황에까지 몰고 간 빌헬름 텔의 상황이나, 이렇게 자신의 선택이 다른 이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나의 신념과 사회를 위한 '정의'를 선택할 것인가, 나로 말미암아 고초를 당할 이들을 위해 연민과 '사랑'을 택할 것인가? "네가 마땅히 행할 일을 행하라."라는 그리스도의 말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나는 내 목숨이 아닌 타인의 목숨이 걸려 있을 때, 신념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그때 나는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을 것인가? 쿠오 바디스, 도미네…. 나는 어디로 가야 한단 말입니까?